박영선목사설교메모

내가 책임져야 하고, 내가 묵여있는 조건 거기서 어떤 기대와 보람이 있을까? 일단 참는 거다. 그게 사랑이다. 여길 넘어서기 위해 애써야 된다. 거기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다.

nazunzaro 2021. 7. 3. 18:33

[다시보는 요한복음_50_2021.6.27.]

I.
- 사도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잊을 수 없는 상처를 각인시켜 놓고 그에게 일을 맡겼다는 것은?
- 사도바울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사단의 사자를 품고 일을 해야 된다면?

-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 도대체 이런 방법으로는 어떤 결과를 기대를 할 수 있는 건지?
-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언제나 불안과 소극적인 생각밖에 들지 않을텐데, 그건 도대체 어떻게 해결하라는 말인가?

우리가 사도 바울을 좋아하고 사도 요한을 좋아하는 것은, 실제로 그 시대에 그 처지에 있지 않았던,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알게 된 기독교신앙의 위대함 때문에 그들을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것이지,
■그들이 당한 일이 무엇인지는 실제로 다 심사숙고하지 않는다.

그들 12명의 예수님 제자들은 다 순교당했고, 사도바울도 순교했고 그의 생애는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온 바와 같은, 한 인간이 그의 생애에서 당할 수 없는 여러 육체적 민족적 사회적 국가적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던게 사실이다.

여기서 이런 베드로에게 준 사명, 그에게 '나의 양을 치라. 나의 양을 먹이라.' 라는 위대한 사명을 맡기면서 베드로의 실패를 다시 한번 새삼스럽게 각인시키는 이러한,
- 사단의 사자가 자기 안에 있는 심리적 육체적 장애 속에서 하는 신앙생활에 어떤 기대, 어떤 보람, 어떤 적극적인 신앙생활의 보람이 있겠는가?

■ 그에 대한 답이 사도 요한에게서 나오는 셈이다.
성경은 '순진하자'를 결단코 권면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가 실력이 있기를 바란다. 바울에게나 베드로에게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쫓는 그 막중한 임무와 조건이 부각되고 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 베드로에게서 일어난 '너는 실패한 자다. 잊지 마라.' 그리고 '네가 내 양을 치라.' 그래서 이 말을 우리에게 대입하면 우리 모두가 땅끝까지 보내진, 하나님의 예수 안에서 허락한 구원과 복음의 산 증인인데, 우리의 일상에 우리가 가지는 조건이 위대하지 않은 조건 속에서 하나님의 예수 안에 담은 복음을 전해야 할 자로 서 있다.

■ 여기서 우리가 각오하고 진심을 바치면 형통하고 유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복음을 감당할만한 실력이 없는 모습으로 계속 묶이면서, 가장 중요한 복음을 증언해야 되는 이 모순 속에 우리가 있어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체념한다.​

체념이란건, '실제로 내 조건 속에서 하나님은 정말 사도 바울에게 일하고 베드로에게 일한 것처럼 정말 나한테도 일하실까?' 이런 거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해 버린다. 그런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해버린다. 류현진이나 손흥민 얘기를 하지, ※좀 더 구체적인 얘기를 하려면 분명 이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 있다.
■ 현실이 내가 실력 발휘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진심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내 신앙이 불분명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의욕을, 어떻게 확인을 해야 될 지를 모르고 있다.

II.
■ 거기에 사도 요한이다. 에수의 제자중 가장 어리고 사랑을 받았던 그가 지은 요한 1,2,3서의 핵심 내용은 '사랑하라'이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는 이렇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데, 하나님을 믿는다면 네 형제를 사랑해야 된다. 그런데 보이는 형제를 못 사랑하는 주제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건 거짓말이다' 이렇게 되는거다.

■ 아, 이거 어렵다. 어떻게 모두를 사랑하는가? 이웃은 거의 다 악당들이다. 세상 속에서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악당이고, 아는 사람은 아는 악당이 세상에 사는데, 거기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도전을 받는 것을 우리는 견딜 수가 없다.

그러니까 대강 안 마주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적극적인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면 그 마음에 자신감이 없다. 그러니까 계속되는 도망감과 변명을 이렇게 우리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 여기 중요한 이해가 있다. 사랑은 처음부터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하는 게 아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대로, 《사랑은 일단 참는 거다》.
우리가 이미 하고 있는 거다. 모든 웬수와 다 싸울 수는 없다. 참을 수밖에 없다. 그건 사랑이다.
그런데 그걸 '내가 저걸 언젠가는 한번 죽여 버릴거야'라고 참는 거랑 '얘, 참는 게 사랑이래' 그렇게 얘기하는 건 얘기가 다르다. 이렇게 가야 어디를 갈 수 있냐면 정말 사랑으로 간다.

계속되는 사랑에 대한 설명이 뭐였나?
■ 사랑은 성 내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이기적이지 않고, 그리고 아주 중요하게 미래적으로 이렇게 얘기한다;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

굉장하다. 왜 그러라고 하는 건가?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주셨으니까. 예수는 그를 찌른자들을 위하여 죽는 거다. 믿은 자들을 위하여 죽는 게 아니라 안믿고 배신하고 분노하여 그에게 폭력을 행사한 자들을 위하여 죽은 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는 안 그런다고 그런다. 우리의 선조들이 그랬고 우리도 그렇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살면서 세상의 도전과 시험 앞에서 우리의 분노는 다, '하나님 왜 보복하지 말라 그러고, 왜 권력을 주지 않고, 그리고 사랑하고 지고 손해보라고 그러십니까?'가 우리가 분노하는 거다.

■여길 넘어서기 위해 애를 써야 된다. 왜 애를 써야 되냐 하면, 우리는 적극적인 데로 가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즉, 가장 기본적인 문제, 보복하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으로 출발을 해야 적극적인 것, 사랑이 가지는 관계, 기쁨, 소망, 감사, 찬송의 자리에 갈 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에서 다 무너져 버린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몸 담고 사는 이상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이해관계적 차원을 벗어날 수는 없다. ■ 세상에서 세상사람들이 폭력을 쓰고, 거짓말을 하고, 시비를 걸고 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 하는 첫번째 생각은, 그러나 상대가 비참한 존재라는 걸 이해해야 된다. 그들은 그 방법밖에 살 방법이 없는 자들이다.
■ 거기서 우리는 한발 이겨야 되는 것이다. 나도 저들과 똑같이 굴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가장 큰 이유이다.

예수께서 다 아시고 우리의 결론을, 우리의 결과를 당신이 십자가 안에서 해결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 써먹기 어렵다. 우리가 이런 마음을 다 가지고 또 마태복음 25장에서 나오는 것처럼, '이 어린 소자에게, 이 작은 자 하나에게 한 선행이 내게 한 것이다.' '이 작은 자 하나에게, 이해관계에서 상관없는 자, 적대적인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를 모르면 우리는 체념하고 살 수밖에 없다. 베드로와 바울의 위대한 점은 그들이 장애를 안고 사역을 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지금 요구하는 게 뭐겠는가? 남에게 비난받지 않고, 남에게 굽힐 필요 없고, 남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양보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양보는, 가지고는 양보가 안 된다. 가지지 않고 양보를 해야 되는데, 그럴 수 있는 건 우리 밖에 없다. 그게 너희들이 빛이고 소금인 임무이다, 라고 얘기하는 거다.

이걸 이해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할 방법이 없다. 이건 매일 부닥치는 우리의 일상이다. 언제나 웬수들 하고 부닥친다. 신문에 나는 걸 보라. 신문에 좋은 일 나는 적 있는가? 그 신문보기 TV보기 싫어진다..
그럼 어디로 가 지는가? 생각 안해도 되는 데로 기지지 않는가? LG가 이기나, 두산이 이기나? 누가 이겨도 좋다. 그렇지 않던가?

■ 그러나 목숨 걸 필요 없는 데로 도망 다니면 위대한 인생을 살 틈이 없다. 우리가 무슨 우리 잘 아는 저 유명한 슈바이처나 아이슈타인이 되는 게 위대한 게 아니라, 《한 인간이 증오와 저주를 어떻게 벗어나는가? 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어떻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나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욕심,욕망보다 크고 나를 오히려 삼키게 할 수 있는가?,를 매일 도전받는 것이고 훈련받는 것이다. 그 싸움에서 이겨야 된다.

그러면 우리 신앙생활은 무슨 기사거리나 간증거리가 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조건, 책임져야 하고 묵여 있는 조건, 거기에 평안이, 거기에 기쁨이 있는 줄 알게 된다. 내 자식이, 내 부모가, 내 친구가 가장 귀해진다.
이 복된 인생을 살아내는, 먼나라 얘기로 외우고 있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심겨 지는 성육신의 생활이 우리에게 매일매일의 기적을 선사하는 그런 인생이 되어야 한다.

(*다시보는 요한복음_50_2017.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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