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더 나아가야 한다. 고난이 우리를 시험과 원망에 사로잡히게 함으로써 우린 더 가야 하는 길을 놓치곤 한다. 그러기 위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고난, 순종과 고난
nazunzaro
2021. 5. 23. 19:49
[다시 보는 히브리서(2020) p.140~153_10]
성경이 '순종'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우리 인생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고난이 있더라는 사실이다. 잘못해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잘해도 고난이 떠나지 않는다.
여러 증거들로 인해 우리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 라는 데로 마음껏 불리어 간다.
그런데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이를 자주 놓친다.
우리는 고난 앞에서, '나를 예수 믿게 하고 감동하게 해 놓고서는 왜 이런 어려운 길로 인도하는가'라는 시험과 원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래서 정작 우리가 《*더 가야 하는 길》을 놓치곤 한다.
아브라함이 낳을 수 없던 아이를 얻게 되고 죽었던 아이를 돌려받는 이런 일에 이런 증거들에 우리는 그저 만족하고 말지만,
그러나 이런 일들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의 *일부일 뿐》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건 《*시작》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이보다 *더 큰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그분이 기뻐하시고 만족하시는 존재》로의 운명과 목적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순종과 고난이라는 현실이 있다'고 성경은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돕고 계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고난이 싫다.
힘들게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방법'으로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
*왜 고난이 있을까? '하나님은 고난으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고난으로 하시는 그 일'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자신의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 매다신 하나님이 예수의 부활로 보이신 증거로 간단히 이야기해 버릴 수 없는,
●《*무언가 더 굉장한 것》(-부활보다도 더 굉장한 것?) 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역사가 이어지고 있고 우리 인생이 있고 *오늘의 한숨과 고민이 있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가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지금도 우리를 편들고 계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고난과 순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히 5:8-9중)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니 《*고난과 순종은 온전함을 채우는 몸통 같은 것》이다. 다만 한 번의 도전이나 위협이나 테스트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본질과 *내용을 채워 *위대함으로 가는 방법》이라고 성경은 이야기 한다.
(우리의 진정 위대함이란 고난과 순종으로 만들어 지는 것임을 말함. 곧 겸손 온유 인내 섬김 용서인데, 이런 류는 이유없는 고난을 겪어 본 사람이 알고 배우게 되는 인격적 성품임)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원통함》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그것을 뒤집어 영광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정반대로 가는 길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채우려고 하시는 내용을 담는 방법 (고난으에 대한 자발적 순종에 의해서만 채워지는 것임) 이라고 믿어야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찬송가중의 하나인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지은 존 뉴턴은 노예들을 실어날랐던 노예선 선장 출신이다. 이 찬송가의 가치는 그의 말도 안되는 과거에 있다. 그래서 깊이와 가치와 울림이 있다. 우리의 경탄을 자아낸다.
●이 찬송을 등따시고 배부르게 살아온 사람이 지었다고 하면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이런 반전, 역전이 있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가.
낮은 선이고 밤은 악인가? 그렇지 않다. 《밤도 낮만큼 풍성함이 있다》.
해만 선이고 달은 악인가? 그렇지 않다. 모두 다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성경은 '너희가 핍박을 당하나 지지 마라'라고 응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핍박이 일을 한다'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나아가기까지 그 모든 눈물과 한탄과 절망이, 결국 《*한 인간에게 채우려는 하나님의 뜻 (자기를 뒤로 하고 순종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알게 하고, 아브라함을 얼마나 《*깊이 있는 존재로 만들었을지》 생각해 보았냐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주는 위로이다. (고난의 해결이나 회피가 아니라, 고난이 우리를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존재로, 곧 영화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가족으로, 예수의 친구로 만들어 가는 기회의 과정이요 하나님의 방법임을 이해하게 함으로써 위로를 줌)
우리를 만들려는 하나님의 의지, 냉정하고 기계적인 심판관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깊고 놀랍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길을 고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성경은 '믿음'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11-14)
성령이 우리를 붙잡고 《이 약속》을 이루신다고 한다.
*성령은 우리를 붙잡고 계실 뿐,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지는 않으신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숨어 침묵하고 계신다.
*그런 다음 우리를 어디로 떠밀고 있는가? '하나님, 맙소사!' 라고 외치는 자리로 떠다민다.(고난의 자리로)
'제가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합니까' 하고 물으면,
*성령은 이유를 말씀하시는 대신 우리더러, 《'더 가자'》 라고 하신다.(너는 더 가야 한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의 신비는 '예수께서 걸으신 길'의 신비와 같다.
예수가 원치 않으신 길을 하나님이 고집하여 예수로 걷게 하신 순종, 고난, 이런 단어들은 잘잘못의 문제를 넘어서 있는 길, 그런 선택의 문제가 아닌 길을 《하나님이 요구하시기 때문에》 나온다. 그리하여 우리 인생에 *고난이 있다
●내가 예수도 믿고 선한 소원도 있고 잘 믿겠다고 다짐도 했는데도, 《이해할 수 없는 길》을 걸어야 한다는 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의 고통'이 있다.
성경은 이것을 지극히 정상이라고 가르친다.
●《우리 모든 이들의 현실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위로 힘 자랑 실천이 넘치는 우리 인생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눈물과 한숨'을 하나님께서 기억할 것이다.
주께서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통곡하셨다.
《그런 길》이었지만, '그 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영광스러운 운명을 만드신 길이었다.
●《그 길을 우리도 가고 있다.》
정답을 가져서 가는 길이 아니라, *실제로 걸어 《*내가 되어야 하는 길》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줄 아는 '믿음'과 '인내'와 '순종'이 있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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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순종'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우리 인생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고난이 있더라는 사실이다. 잘못해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잘해도 고난이 떠나지 않는다.
여러 증거들로 인해 우리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 라는 데로 마음껏 불리어 간다.
그런데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이를 자주 놓친다.
우리는 고난 앞에서, '나를 예수 믿게 하고 감동하게 해 놓고서는 왜 이런 어려운 길로 인도하는가'라는 시험과 원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래서 정작 우리가 《*더 가야 하는 길》을 놓치곤 한다.
아브라함이 낳을 수 없던 아이를 얻게 되고 죽었던 아이를 돌려받는 이런 일에 이런 증거들에 우리는 그저 만족하고 말지만,
그러나 이런 일들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의 *일부일 뿐》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건 《*시작》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이보다 *더 큰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그분이 기뻐하시고 만족하시는 존재》로의 운명과 목적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순종과 고난이라는 현실이 있다'고 성경은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돕고 계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고난이 싫다.
힘들게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방법'으로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
*왜 고난이 있을까? '하나님은 고난으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고난으로 하시는 그 일'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자신의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 매다신 하나님이 예수의 부활로 보이신 증거로 간단히 이야기해 버릴 수 없는,
●《*무언가 더 굉장한 것》(-부활보다도 더 굉장한 것?) 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역사가 이어지고 있고 우리 인생이 있고 *오늘의 한숨과 고민이 있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가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지금도 우리를 편들고 계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고난과 순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히 5:8-9중)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니 《*고난과 순종은 온전함을 채우는 몸통 같은 것》이다. 다만 한 번의 도전이나 위협이나 테스트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본질과 *내용을 채워 *위대함으로 가는 방법》이라고 성경은 이야기 한다.
(우리의 진정 위대함이란 고난과 순종으로 만들어 지는 것임을 말함. 곧 겸손 온유 인내 섬김 용서인데, 이런 류는 이유없는 고난을 겪어 본 사람이 알고 배우게 되는 인격적 성품임)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원통함》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그것을 뒤집어 영광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정반대로 가는 길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채우려고 하시는 내용을 담는 방법 (고난으에 대한 자발적 순종에 의해서만 채워지는 것임) 이라고 믿어야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찬송가중의 하나인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지은 존 뉴턴은 노예들을 실어날랐던 노예선 선장 출신이다. 이 찬송가의 가치는 그의 말도 안되는 과거에 있다. 그래서 깊이와 가치와 울림이 있다. 우리의 경탄을 자아낸다.
●이 찬송을 등따시고 배부르게 살아온 사람이 지었다고 하면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이런 반전, 역전이 있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가.
낮은 선이고 밤은 악인가? 그렇지 않다. 《밤도 낮만큼 풍성함이 있다》.
해만 선이고 달은 악인가? 그렇지 않다. 모두 다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성경은 '너희가 핍박을 당하나 지지 마라'라고 응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핍박이 일을 한다'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나아가기까지 그 모든 눈물과 한탄과 절망이, 결국 《*한 인간에게 채우려는 하나님의 뜻 (자기를 뒤로 하고 순종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알게 하고, 아브라함을 얼마나 《*깊이 있는 존재로 만들었을지》 생각해 보았냐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주는 위로이다. (고난의 해결이나 회피가 아니라, 고난이 우리를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존재로, 곧 영화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가족으로, 예수의 친구로 만들어 가는 기회의 과정이요 하나님의 방법임을 이해하게 함으로써 위로를 줌)
우리를 만들려는 하나님의 의지, 냉정하고 기계적인 심판관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깊고 놀랍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길을 고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성경은 '믿음'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11-14)
성령이 우리를 붙잡고 《이 약속》을 이루신다고 한다.
*성령은 우리를 붙잡고 계실 뿐,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지는 않으신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숨어 침묵하고 계신다.
*그런 다음 우리를 어디로 떠밀고 있는가? '하나님, 맙소사!' 라고 외치는 자리로 떠다민다.(고난의 자리로)
'제가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합니까' 하고 물으면,
*성령은 이유를 말씀하시는 대신 우리더러, 《'더 가자'》 라고 하신다.(너는 더 가야 한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의 신비는 '예수께서 걸으신 길'의 신비와 같다.
예수가 원치 않으신 길을 하나님이 고집하여 예수로 걷게 하신 순종, 고난, 이런 단어들은 잘잘못의 문제를 넘어서 있는 길, 그런 선택의 문제가 아닌 길을 《하나님이 요구하시기 때문에》 나온다. 그리하여 우리 인생에 *고난이 있다
●내가 예수도 믿고 선한 소원도 있고 잘 믿겠다고 다짐도 했는데도, 《이해할 수 없는 길》을 걸어야 한다는 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의 고통'이 있다.
성경은 이것을 지극히 정상이라고 가르친다.
●《우리 모든 이들의 현실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위로 힘 자랑 실천이 넘치는 우리 인생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눈물과 한숨'을 하나님께서 기억할 것이다.
주께서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통곡하셨다.
《그런 길》이었지만, '그 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영광스러운 운명을 만드신 길이었다.
●《그 길을 우리도 가고 있다.》
정답을 가져서 가는 길이 아니라, *실제로 걸어 《*내가 되어야 하는 길》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줄 아는 '믿음'과 '인내'와 '순종'이 있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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