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하나님이 [죽음]을 뚫으신다는 말은? 소멸이나 비극을 뚫어 단지 없애고 묻어버리는 방식으로 해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길을 실제로 걷도록 우리를 계속 인도하신다는 말이다
nazunzaro
2021. 4. 24. 18:11
[다시 보는 히브리서 (2020 초판)_4. p.51~68]
히브리서는 초대교회 시대에 고난받는 공동체에 보낸 위로의 서신이다. 여기 나온 위로는 단지 '힘 내라. 다 잘될 것이다'라는 막연한 격려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현실에서 당하는 비극이나 재앙으로 방해할 수 없는, 그런 모든 것들을 *넘어서 있는 *귀한 일이라는 답으로 격려한다.
성경 본문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예수의 십자가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 을 가진 마귀를 멸한 행위다' 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결국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재앙인 *죽음이 진정한 재앙일 수 없다는 이야기까지 가는데, 우리는 이 점이 의아스럽다.
■신자에게 *죽음이 재앙이 아니라는 말의 의미를 성경을 따라 깨닫는다면, 히브리서가 말하는 위로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위로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인생에 고난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의 기대보다 더 높게 목적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얼마나 클까?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우리를 후사로 부르셨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소원하는가? 그저 천사처럼 살고 싶어 한다. 천사는 지지고 볶으며 살지 않아도 되기에.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는 내 상속자다. 너희는 여기까지 와야 한다'라고 하신다. 어디까지를 가리키는 걸까? 예수가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써 이루신] 영광과 존귀의 자리를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상속자로 부르셔서 결국 이루고자 하시는 목적에 고난은 필수라고 한다.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의 손에 죽으셨다. 수치와 고통 속에 *죽음이라는 최고의 재앙, 최고의 불행, 최고의 비극을 살아 내셨다.
그런데 그 *죽음으로 부활을 만들어 '부활의 영광은 이런 과정이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를 증언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자리를, 즉 '예수님이 수난과 모욕과 고통을 감수하여 *죽음을 *통과하셨고, 이 *죽음을 영광과 존귀의 과정으로 겪어 내셨다'라는 데를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죽음이란 소멸되는 것이다. 그리고 헛된 것이다. 세상의 자랑과 명예에는 승리가 없다. 그것들은 다 소멸되기 때문이다.
■영생이라는 단어는 '생명이 영원히 지속되다'라는 시간적 개념보다 '그 가치가 영원하다'라는 측면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라는 말에는 죽음의 헛됨이 우리에게 미치지 않는다, 죽음의 비극이 우리를 침범할 수 없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런 영생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
■하나님이 *죽음을 뚫으신다는 말은 무엇일까?
소멸이나 비극을 뚫어 단지 그것으로 힘을 못 쓰게 없애고 묻어 버리는 방식으로 해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길을 실제로 걷도록 우리를 계속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죽음이 모든 것을 삼키고 끝장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우리의 소원과 기대를 넘어서게 하는 자리라는 것을 우리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살면 뭐해? 고생하면 뭐해? 오래 살면 뭐해? 자식 키우면 뭐해?라고 하는, 죽음이 어른거리는 그런 모든 자리에서 이렇게 타협으로 주저앉은 우리를 끌어 일으키는 것이다
우리의 체념과 한계를 무너뜨리는 자리로, 죽음을 치워 버리고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의 자리에서 새로운 문을 향하여 열어 가도록 ■우리의 불만, 우리의 재난, 우리의 고난을 가지고 하나님이 일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를 향한 사랑을 축소하여 자신의 현실을 비난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있다. 여기를 건너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현실 속에서 일하신다는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란, 인간의 마음과 씨름하고 함께 협력하여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끊임없이 그것을 돌파해 나가는 힘이다.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힘]이다.' (로완 윌리엄)
(*출처: 다시보는 히브리서_.51~ 68_4강)
히브리서는 초대교회 시대에 고난받는 공동체에 보낸 위로의 서신이다. 여기 나온 위로는 단지 '힘 내라. 다 잘될 것이다'라는 막연한 격려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현실에서 당하는 비극이나 재앙으로 방해할 수 없는, 그런 모든 것들을 *넘어서 있는 *귀한 일이라는 답으로 격려한다.
성경 본문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예수의 십자가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 을 가진 마귀를 멸한 행위다' 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결국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재앙인 *죽음이 진정한 재앙일 수 없다는 이야기까지 가는데, 우리는 이 점이 의아스럽다.
■신자에게 *죽음이 재앙이 아니라는 말의 의미를 성경을 따라 깨닫는다면, 히브리서가 말하는 위로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위로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인생에 고난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의 기대보다 더 높게 목적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얼마나 클까?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우리를 후사로 부르셨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소원하는가? 그저 천사처럼 살고 싶어 한다. 천사는 지지고 볶으며 살지 않아도 되기에.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는 내 상속자다. 너희는 여기까지 와야 한다'라고 하신다. 어디까지를 가리키는 걸까? 예수가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써 이루신] 영광과 존귀의 자리를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상속자로 부르셔서 결국 이루고자 하시는 목적에 고난은 필수라고 한다.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의 손에 죽으셨다. 수치와 고통 속에 *죽음이라는 최고의 재앙, 최고의 불행, 최고의 비극을 살아 내셨다.
그런데 그 *죽음으로 부활을 만들어 '부활의 영광은 이런 과정이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를 증언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자리를, 즉 '예수님이 수난과 모욕과 고통을 감수하여 *죽음을 *통과하셨고, 이 *죽음을 영광과 존귀의 과정으로 겪어 내셨다'라는 데를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죽음이란 소멸되는 것이다. 그리고 헛된 것이다. 세상의 자랑과 명예에는 승리가 없다. 그것들은 다 소멸되기 때문이다.
■영생이라는 단어는 '생명이 영원히 지속되다'라는 시간적 개념보다 '그 가치가 영원하다'라는 측면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라는 말에는 죽음의 헛됨이 우리에게 미치지 않는다, 죽음의 비극이 우리를 침범할 수 없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런 영생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
■하나님이 *죽음을 뚫으신다는 말은 무엇일까?
소멸이나 비극을 뚫어 단지 그것으로 힘을 못 쓰게 없애고 묻어 버리는 방식으로 해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길을 실제로 걷도록 우리를 계속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죽음이 모든 것을 삼키고 끝장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우리의 소원과 기대를 넘어서게 하는 자리라는 것을 우리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살면 뭐해? 고생하면 뭐해? 오래 살면 뭐해? 자식 키우면 뭐해?라고 하는, 죽음이 어른거리는 그런 모든 자리에서 이렇게 타협으로 주저앉은 우리를 끌어 일으키는 것이다
우리의 체념과 한계를 무너뜨리는 자리로, 죽음을 치워 버리고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의 자리에서 새로운 문을 향하여 열어 가도록 ■우리의 불만, 우리의 재난, 우리의 고난을 가지고 하나님이 일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를 향한 사랑을 축소하여 자신의 현실을 비난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있다. 여기를 건너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현실 속에서 일하신다는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란, 인간의 마음과 씨름하고 함께 협력하여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끊임없이 그것을 돌파해 나가는 힘이다.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힘]이다.' (로완 윌리엄)
(*출처: 다시보는 히브리서_.51~ 68_4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