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내 당위성에서 출발하고 내 능력으로 출발한 기독교를 세우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nazunzaro 2021. 4. 10. 18:15
[구원 그 이후 (2005 제3판)_1. 상한갈대]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후 신앙생활을 하는 데 가장 큰 숙제는 '성장에 관한 문제'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가장 큰 병이 있다면,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이렇게 놀라운 신앙고백을 예배 때마다 하고 있는데도
■우리의 생활은 이러한 고백을 하지 않는 사람과 그 차이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당혹케 한다.

■말씀대로 살자고 하는 것을 말로 하면 쉽지만,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부분에서 생각대로 되지 않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성서에서 말씀하는 대로 정말 하나님을 믿고 살자고 마음에 다짐을 하는데도
정작 살려 하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왜 그런가를 살펴 보자. ​
성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살인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우리는 이 말씀에 공감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왜 공감하는가?
살인하지 말라는 얘기가 당연하지, 그럼 살인하는 것이 옳단 말인가?' 이렇게 도덕성에서
그 당위성이 발견되고 그 원인과 이유가 발견이 된다면 이는 도덕이요 기독교는 아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 말씀은 물론 옳다. 그런데 왜 옳은가?
이것은 윤리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선 공감을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우리에게어려움을 준다. 기독교는 이해와 납득의 대상물이 아니다
기독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에서 가장 무서운 단어가 '믿음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어떤 부분에서는 전혀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리한 요구를 할 수밖에 없기에 여기서 이 단어를 쓰고 있다.

그런데 믿음의 근거는 '무리한 대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납득이 되는 대상으로서 기초를 쌓고 있다'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우리가 분명히 납득할 수 있기 때문에 공감하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수학이요, 과학이요, 내가 지니고 있는 수준의 이해력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약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결코 한 걸음도 떼어놓을 수 없게 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사야 42:3에 진술된 말씀은 이렇다: '너희는 상한 갈대이고 꺼져가는 등불이다.'
이것이 얼마나 무섭고 소중한 말씀인지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살인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이 말에 우리가 공감하는 기초가 무엇이겠는가? '그럼 살인을 하는게 옳단 말인가?'하는
이런 기준의것이라면,'원수를 사랑하라는 요구도 동일한 기초에서 출발을 하게 된다.
곧, '에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까지는 해야지' 하는 것이 기초가 되는 것이다.
지금 성서가 우리를 고발하는 이사야 42:3 말씀은, 우리가 기준이 아닌 것에서 출발한다는 암시를 주고 있는데,
이 암시가 어떤 것인가 하면, '살인하지 말라고 요구받고 있는 너희는 어떤 자들인 줄을 아느냐? 너희는 상한 갈대니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곧 상한 갈대란 표현으로 우리를 설명하고 있다.

성서가 말씀하는 것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거리가 먼가 하면 바로 이 지점에서 설명하는 것만큼 멀다.
하나님으로부터 살인을 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요구받고 있는 우리가 바로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
'온 누리를 비추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라고 하시면서 또
■'너희는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이니라'라고 지적한다.
말도 안되고 연결시킬 수도 없는 두 극단이다.

이 시점에서 쳐다보는 하나님의 요구는 성취 불가능한 요구들이다.
하나님의 멸영이 우리의 머리 속에 내가 성취할 만한 기준 속에서 요구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신자들에게는
신앙이 설 자리가 없다는 말씀이다.
도덕성에서 그 당위성이 발견되고 그 원인과 이유가 발견이 된다면 아직도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신앙이란 할 수 없는 갈등을 느끼는 사람에게만 드디어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어느 지점이 모자라는가 하면, ■'어디 그럼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 두고 보자'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데 신자들의 모자람이 있는 것이다.
신앙인의 최고의 약점은 이 갈등 속에는 와 있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해낼 수 없는 상황속에 있고 하남님은 우리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대한 약속을 해 놓았다는
그 꿰어 맞출 수 없는 출발선(start line)과 결승선(goal line)을 갖고 있는 갈등이 없는 것이다.
그 갈등이 뱌로 우리의 마음에 없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선언하신 목적지와 그것을 이루어야 할 너무나 처절하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모습과 이율배반적이고 도저히 꿰어맞출 수 없는 이 불연속선, 도무지 연결될 수 없는
이 황당함, 바로 이런 갈등이 없다.
이것이 없는 자에게는 신앙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꺼져가는 등불이요, 상한 갈대인데도 요구되는 것이 저 하늘나라인 것을 꿰어 맞출 수가 없으니까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버리는 이상한 지점에 서서 대충 눈감고 외면하고 살기로 스스로 결심해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이 아픔을 아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면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이 오해하는 것은 우리의 출발지점이 어디인지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여기서부터 신앙생활을 잃어버리고 있다. 출발지점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수준의 시작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내가 납득한 것이 내 신앙의 근거가 아니다. 권위이다. 그래서 겸손할 수 밖에 없고 좌절할수 없다.
우리의 출발 지점은 다른 것이다. 나는 못하지만 그분이 하라는데, 하라고 하시는 분이 어떻게 해 주시겠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 어떻게 해결을 하시겠지.. 이것이 신자의 배짱이다.
우리는 이 출발 지점에 대해 오해하기 일쑤이다.
모든 신앙이 좌절해 마땅할 자리에서부터 요구되고 있는 이 간격을 모르는 데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출발한 자는 누구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돌아오는 것은 좌절밖에 없다.
좌절이 출발지점이다. 이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사탄은 출발지점을 찾을 수 없게 만든다.
이제 눈을 떠야 한다. 우리는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나로부터 출발된 것으로는 저기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몰아붙인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내 당위성에서 출발하고 내 능력으로 출발한 기독교를 세우고 있지는 않는가?
그럴까봐 겁이 난다. 자중해야 한다. '하나님, 제가 이 꼴인데도 그러한 약속을 선포하시다니요,
그럴 수 있습니까?' 이런 아우성이 없는 자는 아직도 신앙에 입문하지 못한 자이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새로운 출발지점이 되고 새로운 힘이 될 것이다.
이 신앙을, 이 삶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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