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모든 것의 동력은 사랑이어야 한다

nazunzaro 2021. 2. 12. 08:29
I.
요한복음 17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제 죽으시며 그의 죽으심이 가져 올, 《우리들이 얻게 될 은혜, 복, 영광, 기쁨들》을 소개받고 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그리고 너희가 우리 안에 있어 하나가 되려 한다.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 같이 내가 너희를 보내어, 내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낸 것같이 《너희가 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것은 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 것같이 아버지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이며, 《너희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부름 받는 모든 사람들의 영광과 기쁨이 될 것》이며..` 이렇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연합과 일하심에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축복들이, 쓰여진 단어들만 해도 기쁨이며, 영광이며, 가장 긴밀한 연합이며, 그리고 복된 약속들이, 그러나 결국 18장에 와서는 이제《그의 사로잡힘과 죽음으로 끝날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모든 신자들의 말하자면, 어떤 신앙상의 그 어려움이 있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 간다는 것도 다 믿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도 믿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도 믿지만,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끝나버린 이 사역의 증인이 된다는 것이,
■우리 현실 속에서 우리의 기대와 같은 보상이 없는 어려운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신자들에게 어렵다.
게다가 믿고 난 후에 바로 천국으로 불려가지 않고, 감격과 진심의 고백을 했으나
■현실 속에서 만족스러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또한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래서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그 생활 속에서 두려움과 걱정 속에 있는 것은 우리가 당연시 하지만, ■신자가 되어가지고도 현실이 그리고 신앙생활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은 우리에게 늘 풀리지않는 수수께끼 같고 꺼내 놓을 수 없는 어떤 어려움이 되곤 한다.

​II.
그러나 이 문제는 매우 놀랍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세상에 내보내시는 일이, 성자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시간과 공간에 잡혀 육신을 입고 우리와 동일한 고난을, 어려움을, 반대를, 유혹과 시험과 도전을 받는 속에 그의 생애 전체를 걸쳐서 "내가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행함으로 기쁨이 충만하고 아버지께서 나로 인하여 영광을 받고,
■《"내가 죽는 것이 나에게도 영광이다"라는 그 표현으로 우리를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를 연결해야만》,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들과 우리의 이 문제, ■'하나님은 왜 일을 이렇게 하시는가?, 예수의 뒤를 이어 세상에 보냄을 받는다는 우리의 현실이 어떻게 영광된 것인가?' 라는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우리 대신 속죄 양이 되었다`라는 건 우리 다 안다. 그렇게 외우고 있고 그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래도 기왕이면 로마 황제를 끌어내고 황제가 되어서 온 세계에 하나님의 통치를 베푸시고 잘하는 사람에게 보상하고 못하는 자들은 잡아넣는 ●그런 손쉬운 방법을 왜 택하지 않으셨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큰 의혹이고 시험거리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이제 성경 구약 역사에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사건이 있다. 다윗의 밧세바 범죄 사건이다. 여기서 다윗이 하는 회개는 《존재론적 회개》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회개가 용서를 받는 게 아니라 지금 이 회개는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이다.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이고, 이 기도를 할 수 있는 이 뉘우침이 용서 이전에 《본질적인 존재 자체의 문제인 것을 해결받기 위하여》 그걸 하나님 앞에 이걸 꺼내 놓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 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가 이미 은혜를 받은 거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이요, 죄를 용서하는 분인 줄 알지 못한다면 이 고백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윗의 회개는 바로 이거다; '나는 나쁜 놈입니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놈입니다. 나를 도와주시면 나는 또 죄밖에 지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고쳐 주십시오' 이렇게 한 회개의 기도가 시편 51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에 이르는 이 마지막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애와 그 생애의 의미와 목적과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다. ■이것이 새로운 계명이라는 것은, 여태껏 없었던 덧붙여진 명령이 아니라, 그 전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윗을 예로 들자면, 다윗 안에는 사랑이라는 것은 없다. 탐욕이라는 건 있을 수 있지만, 욕심은 부릴 수 있지만, 그러나 사랑을 할 수는 없는 존재였다.
거기에다 대고 말하는 것이다; '너희는 모두 죄인이 되어 너희 안에는 선함과 보람과 가치와 당연히 영광과 명예라는 것은 너희에게 일어날 수도.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제 할 수 있다. 내가 너희로 그렇게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왔고, 《이제 죽노라》' 그것이 이 17장에서 이렇게 완벽하게 그 절정을 이룬다.

어떻게 됐다고?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는 것같이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내가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같이 너희가 나에게 순종할 수 있다.
순종의 필요는, 영광과 승리와 기쁨은 아버지께만 있는 것이고 너희는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사,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서 누렸던 평화와 기쁨과 영광을 너희와 함께 누리기를 위하여 나를 보냈고, 나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기꺼이 그 뜻을 따라 이제 죽는다` 이렇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새 계명은 그 전에는 할 수 없었던 것,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것이 이제 새로 생겨난 것을 말한다.

그래도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하필 왜 죽으셔야 하는가? 말로 하시지. ■그냥 어떤 권능으로, 그렇게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시면 되지, 그것이 왜 하필 십자가냐, 하는 문제가 나온다.
여기가 아주 성경이 가르치고 싶어하는 대목에서 아마 신자들이 제일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 들이기도 싫어하는 내용이 될 것이다

따져 보자. 이 밧세바의 범죄는 이런 내용이 자세하게 *다윗을 일깨우는 하나님 방법이 긴 시간, 긴 사건에 걸쳐서 일어난다. 나단이 다윗에게 ●'당신이 그 사람입니다'라고 한다. 이 '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라는 말은 성경에서 아주 촌철살인같이 등장하곤 한다.
예수는 구원자로 왔으나 이제 거꾸로 죄인들이 구원자를 향하여 그를 범죄자라고 잡아가겠다고 덤벼드는 자리에서, ■'내가 그니라' '그래. 너희가 찾는 이가 나다.' '너희 눈에는 내가 범죄자다. 너희의 잘못이 나를 범죄자로 만들었고, 나는 너희의 범죄자인 자신과 범죄 행위를 구원하려고 온 자다'를 이 속에 다 담고 있다. 절묘하다.
모세는 팔십 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모세는 어이가 없다. 지난 사십 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아무 기미조차 없는 막막한 세월을 보냈다. 나이 팔십이 되고 아무 희망도 가질 수 없는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부른다. '내 백성을 가서 구해 내라'. 너무 기가 막혀서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겠는가? 딱 하나 묻는다. '당신은 왜 일을 이렇게 하십니까?' 줄여서 이렇게 묻는다. '당신의 이름이 뭡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부르시고, 예수를 보내어 우리 문제를 해결하되, 무얼 해결하느냐? ■잘못한 것들을 지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것? 우리가 전에는 할 수 없었던 것, 선과 의와 정의와 어떤 희생과 봉사, 무엇이든지 다 갖춘, 우리가 개념으로 갖고 있으나 할 수 없었던 것.

■왜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이 모든 것의 《동력》은 사랑이어야 되니까. 사랑이 없는 개념들은, 사랑이 없는 소원들은, 《사랑이 동력》이 아닌 진심들은 결단코 선과 의의 것일 수 없다. 그건 죄가 된다.
다윗의 사건이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순수한 정념에 불탔을 거다. 순수한 사랑에 이끌렸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죄를 짓는다고 생각을 아니했을 것이다. 그게 우리 세상에서 얼마든지 보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반복되는 비극은 뭔가? 잘하려고 할 때마다 죽어 나갔다는 것이다 잘 할려고 많은 피를 흘려야 되고, 많은 싸움을 해야 되고, 많은 실패를, 후회를 해야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본다.
■동력이 사랑이 아니고, 동력이 소원이고 이념에 불과하고, 동력은 언제나 질투이고 시기이고 강제력이고 폭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걸 바꿔 놓으시는 거다. 우리는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은 어떻게 드러나느냐? 우리 현실에, 실존에 부딪히는 모든 사소한 반복되는 일상에 사랑이 동력이 되어야 되는 거다. 인사를 함에, 만남에, 결정을 함에.

무슨 사랑이라는 것을 결정의 내용으로 가지고 행동의 내용으로 가져서 봉사를 한다든가 무슨 단체를 만든다든가 무슨 행사를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도전받는,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장 그 하나하나에서 사랑이 동력이 되는가 보라 이거다.

정직이라는 게 무언가?
정직이란 사실을 말하는 정직이 아니라 《그 정직이 사랑을 동력으로 가져야만 정직은 정직이 된다》.
정직이란 뭐냐? 인간이 참다운 인간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정직이다. 사실을 말해서 책임 회피하는 것으로 정직이라 그러지 않는다. 필요하면 거짓말을 해야 된다. 모세 시대에 산파들이 거짓말을 한다. 기생 라합도 거짓말을 한다. 그걸 우리는 거짓말이라 하지 않는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최고의 목적으로 삼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다.
■하나님이 다만 힘이 되면, 동기는, 동력은 우리의 탐욕이 된다.
우상 숭배는 뭘 우상 숭배라고 하느냐?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게 아니라, '탐심은 곧 우상 숭배니라' 성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슨 뜻인가? 결정권은 내가 가지고, 소원은 내 본성 대로 하고, 방법과 힘에서만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우상 숭배이다.

■《거기서 우리가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적 인생이 예수께서 오셔서 보이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에 묶이고 육신에 묶인다. 모든 필요에 하실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주신다. 그러나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그것으로 때우거나 회피하지 못한다. 모든 것에 담으셔야 된다. 모든 경우에 담으시고, 죽음을 죽음에까지 당신을 담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죽음마저도 뒤집어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십자가이다. 그러니 "겁내지 마라"이다

우리의 신앙은 무섭다. 《우리는 비난하기 바쁘고 경쟁하기 바쁘고 그리고 원망하기 바빠서》, 긍정적인 사랑이 동력이 되는 아무 것도 할 줄을 모른다.
명분도 있고 무슨 주장도 있고 무슨 표어도 있지만, ■《그 모든 것에 사랑을 가지고 할 줄을 몰라서 실제로는 하루도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다》. 형식과 형태에서 종교성을 가질 뿐, 그 동력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하신 걸 생각해 보라;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도 하리니`라는 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가?
■우린 그렇게 보냄을 받고 있다. 우리 보고 무슨 나라를 바꾸고 역사를 바꾸라 하지 않는다. 그건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바꿔 놓았고, 《바꾼 그 세상을 우리 보고 살아 완성하라고 하신다》. 그건 정치적이지도 사회적이지도 권력적이지도 않다. 이런 존재론적으로 정체성에서 그 내용과 운명에서 다른 존재로 우리는 빛이고 우리는 진리이고 우리는 생명인 것이다.

우리의 생애가 그렇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명예로 부르고, 그의 명예로 우리의 인생을 지켜 보신다. 힘내라고 응원하신다; '네가 해라. 네 인생으로 만들어 내라. 네 생애와 네 자신이 돼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만나는 모든 일과 네가 소원하는 모든 일에 언제나 내 이름으로 나한테 기도할 수 있다. 내가 무슨 기도든지 다 들어주겠다. 걱정하지 마라. 그러니 네가 살아서 네가 해 봐라.

그것이 내가 세상에 와서 한 일이고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낸 구체적인 증거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 방법이다. 나의 승리를 하나님이 그렇게 바라신다. 내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가 나를 보낸 이 방법, 이 뜻, 이 목적, 이 내용이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하나님의 생각을 기계적으로 조작하고 결국을 만드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
너희를, 아버지가 나를 세상에 보낸 것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걱정마라. 힘내라. 승리해라. 영광을 살아라. 기적을 살아라'

요한복음 17장의 연합을 얘기하면서 비유로 부부를 예로 든다. 부부는 시작이 목숨을 건 정열로 시작을 한다. `이 사람 없으면 나 죽겠다` 그렇게 다 시작을 한다. 그러고 살면 `왜 그랬을까?` 싶다고 그랬다. 그건 너무나 뻔한 진리이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이 자명한 진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부부로 살면 그럼 뭐가 생기나? 비로소 자기의 책임을 질 줄 아는 어른이 된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자기 자리를 울면서, 한숨 쉬면서, 원망하면서, 그러나 자기 자리를 떠날 수 없다. 그것은 실력이기도 하고 운명이기도 한, 그래서 훌륭해지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마치 요셉이 옥에 갇혀 선택의 여지없이 그 발에 차꼬를 차고 그 몸이 쇠사슬에 매여 할 수 없이 감옥생활을 십수 년 해야 하는 되는 것과 같이. 그래서 원치 않고 상상치 않고 이해할 수 없었던 그 과정이 총리라는 한나라의 지도자와 책임을 질 수 있는 실력이 만들어지는 것같이,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토록 놀랍다.

*이제 이를 알았으니 우리 하루하루를 복되고 충실하고 넉넉하고 그리고 기쁨과 자랑으로 살아내는 그런 인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

(기도)
우리의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인생입니다. 복 받으라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찬송이 되라고 부름 받은 인생입니다.
■무얼 겁을 내겠습니까? 울어야 되는 날도 있고, 한숨을 쉬어야 하는 날도 있겠지만, 그것은 힘든 것이지 그것은 잘못된 것도 아니고 그것은 절망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하루의 인생의 자질구레한 나날들을 사랑으로 메꾸는, 채우는, 쌓아 올리는 기적과 기쁨이 예수 믿는 생애에 얼마나 놀라운가를 각자 스스로 경험하고 스스로 확인하는 기쁨이 우리에게 있게 하여 주소서.

(* 2021.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