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6) 가장 큰 본질은 인격성이다.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조종하시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격이 다른 것이다

nazunzaro 2020. 12. 16. 10:27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냐?》 할 때 가장 크게 《인격성》이다.
기독교 신앙은 사실에 관한 확신이 아니고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으로 찾아오시는가, 그리고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것은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이런 인격의 중요한 요소들에게 발언하시는 것이며, 그 일에 하나님이 어떻게 의지를 동원하시며 또 우리의 의지를 촉구하시는 가 하는 것들을 본다.

우리는 지, 정, 의라고 나눌 것 없이 한 인격으로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찾아옴에 대한 성경의 보편적인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창세기 1:26-28은 '인간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서 《믿음에 관한 본질》을 엿보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것을 '영성(靈性)'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영성이 없다. 동물은 그저 본능대로 살고 지성이 없지는 않지만 영성은 전혀 없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생물들에게 '종교'가 없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리고 한편 '다스리는 통치권'으로 이해를 삼는 학자들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모른다. 어쨌든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 만들어졌음은 성경을 통해서 충분히 알고 그것이 영성이며 도덕성이며 인격성이며 고급한 지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라고 볼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하게 우리가 살펴야 되는 것 중의 하나로 《인격성》을 들 수 있다.

인격성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조종하시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 우리가 그 명령을 수행하거나 또는 거절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자유의지》라는 것은 독립된 인격이 갖는 결정권이다. 이것이 아마 하나님의 형상 중에 중요한 내용이 아닌가 싶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 가지 명령을 주시는데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책임과 해서는 아니 되는 금령을 주신다. 그런데 이것을 전부 우리에게 《명령》으로 하시지, 마치 전기 스위치에 동력을 공급하듯 하시지 않는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갖는 신앙의 큰 오해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고서 선한 생각만 나고,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기계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제일 많이 틀리는 부분이다.

TV드라마를 보면 대부분 불륜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집사람이 옆에 있다가 꼭 시비를 건다. '당신도 저런 예쁜 여자를 보면 생각이나?' 목사도 눈이 있고 머리가 있는데 왜 생각이 안 나겠느가?척 보면 우리 집사람보다 예쁘고 다 나은데, 생각이 없기를 바라면 이미 인격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생각이 안 난다면 그건 자신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생각이 나지만 결정을 한다, '에비!~' 하는 결정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게 '큰 것'이다. 스스로에게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왜 이런 쓸데없는 꿈을 꾸지?' 하는 것은 인간의 인간된 가치를 놓고 묻는 것이고,
'난 생각이 안 나! 난 예쁜 여자를 보면 눈이 감겨' 하는 것은 무슨 알레르기 병에 걸린 환자이다. 병원에 가야 한다.
'선한 일을 할 때는 가는 길이 평탄케 해주시고 죄를 지으려고 하면 길이 무너지게 해주십시오.' 이런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아본 사람이 없다.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은 그런 일에 감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결정을 해야 되고.. 책임을 져야 되는 것이다.
선악과에 대해서도 우리는 전부 뭐라고 불평을 하였는가? ' 왜 만들었습니까? 하나님, 도대체 그런 건 왜 만드셨어요? 꼭 만들어야만 했으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갖다 놓으셔야죠.'
그런데 그렇게 안 하셨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우리를 조종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보고 결정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다스려야 되는가를 생각하고, 노력해야 되고, 결정하고, 책임져야 된다. 저 선악과를 왜 먹으면 안 되는가를 생각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 의지라는 것은, 우리가 누구의 조종 대상이 아니고, 자기 문제에 대하여 자기가 책임지고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지, 그것이 최종 권위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격이 다른 것이다.
최종 결정권, 운명을 결정하는 그 힘은 하나님만 갖고 계신다.

우리가 자식을 키워보면 안다. 부모가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겠다고 작정을 하면 맹모삼천(孟母三遷)이라는 고사에서 보듯이 삼십 번이라도 이사를 간다. 그것이 부모의 뜻이고 의지이고 부모가 갖는 권위이다. 자식은 수 없이 이사를 가야 할만큼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자기 결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기 결정]은 자기자신에 관한 것이지 운명을 결정할 힘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신자 된 인생을 보라.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면서도 순종한 적이 몇 번 없다. 우리가 고집부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길인 줄 뻔히 알면서 간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놔두신다. 그러나 아주 가지는 못하게 한다. 하나님이 결정하는 운명의 선을 넘어가지는 못하게 하신다. 그러나 돌아오게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아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항복시켜서 돌아오게 한다. (창 28:10-15 벧엘 사건)

창 32:22-30 야곱의 얍복나루터 사건에서, 하나님이 한 인격에게 어떤 사실을 그 내용으로 갖게 하는데, 강제로 주입하지 않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깨우치도록 시간과 기회와 경험의 장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려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무엇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목표이고 목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알고,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전인격적인 항복을 하는 그 깨우침, 그 선택, 그 결정을 요구하신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빨리 순종해서 뭘 해드리려고 하는데 바쁘다. 그래서 교회들이 다 '만세 삼창' 하고 빨리 나가서 뭘 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목표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한 인격이 하나님에 대하여 갖는 신뢰와 애정과 열심과 진심을 요구하고 있어서,
그것은 긴 시간과 과정을 통하여 항복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격이란 그런 것이다. 한번 보고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생전 처음 봤는데 '형제여!' 이러면 안 된다. '사랑해요'라는 말은 최소한의 관계를 갖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얼마만큼 서로 간의 인격적인 교류가 깊이 있어야 쓰는 말이다. '너 참 괜찮다!' 이 말하는데도 몇 년 걸리는 것이 아닌가?
앞에 있는 사람 모두에게 '할렐루야'를 외치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한 인격이 상대방이 하는 말의 깊이와 진심을 용납하기 위해서는 둘의 사이가 그 단어와 표현을 쓸 수 있는 관계에까지 맞닿아 있어야 한다. 인격과 인격이 나눠야 되는 대화들을 서로가 서로 간의 깊이를 다듬고 나눈 후에 써야 하는데, 우리는 늘 잊어버리고 그렇게 되기 전에 이 말을 한다. 마치 '열려라 참깨!' 하고 주문을 외우듯이 말이다. 상대가 인격이 아니니까 주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다스리지 않는데 우리는 그렇게 나선다.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아는 이 야곱 하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은 얼마나 긴 세월을 보내어 기다리시고 한 순간도 놔두지 않고 간섭하시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야곱이 된다. 그 야곱을 항복시키는 것이다.

창세기 49 장을 보면 야곱이 자기 자식들에게 마지막으로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주 재미있다. 기막힌 것이, 야곱이 자기의 축복이 자기 선조의 축복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놓고 비교하면 야곱이 제일 못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의 정도나 수준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야곱이 무엇을 자신 있어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누구인지는 자기가 더 잘 안다 이거다.
왜 더 잘 아는가? 속을 더 많이 썩였다. 아브라함과 이삭보다 야곱이 훨씬 더 말을 듣지 않았고 훨씬 긴 세월을 버텼기 때문에 하나님이 야곱에게는 더 많이 간섭하셨다. 더 많이 복을 주셨다가 아니라, 더 많이 손을 대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야곱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브라함이나 이삭 보다도 더 많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고 충분히 얘기할 수가 있다.

이런 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입시키러 오거나 조종하신 적이 없으며, 우리를 목적으로 놓고 인격적인 내용으로써 우리 안에 채울,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 편에 서는 《결정》을 또는 《책임》을, 《항복》을 우리에게 받아내시고 결과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생애에 간섭하시는 분이심을, 그리고 우리가 《납득》할 때까지 《설명》하고 《경험》하게 하시고 《시간》을 주시는 분이심을 야곱이 안다는 사실이다. (창 49:22-26 참조)

믿음의 《인격성》을 자꾸 논하는 것은 믿음이란 결국 어떤 수단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믿음은 그것 자체가 내용이다.

그 믿음이라는 것을 하나의 관념으로 떼어 놓을 수가 없다. 그것은 대상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있으며,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하나님을 닮는 것을,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하고》, 그렇게 완성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