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할것 같은데 못한다. 잘안된다. 그러나 억지로 해야한다. 큰목적을 세워서 지금을 도망가지 말고, 오늘 할일,하나님의 용서,섬김을 해야된다. 매일마다 수많은 기회가 온다. 거기서 하나님의..
nazunzaro
2020. 11. 13. 10:42
■성경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고 한다. 이 세상 임금은 사망이다.
(이 세상의 최고 권세는 죽음이다)
이 세상은 사망이 운명인 세계다. 무엇을 해도 결국은 헛되게 되고 망하고 마는 세계다.
이제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그 세상을 뒤집었다고 분명히 성경에서 말씀하신다.
(예수가 자아를 부인하고 타인을 섬기고 용서하는 삶을 사심으로써 세상의 헛된 가치관을 뒤집었다)
■신자된 우리가 빛이다.
우리로 인하여 세상사람들이 자기네가 죽음 아래 있고 절망 아래 있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최소한 도전받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 성령이우리에게 주어진 바 된 이유다.
(신자된 나의 성령 곧 하나님의 용서와 섬김, 하나님의 온유 겸손을 보고 나를 대하는 사람들이 도전을 받게 되는 그러한 빛이다 )
■왜 하나님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그런 지극한 일을 해놓으시고, 아직도 죄가 권세를 잡고 있는 것같은, 실패와 절망이 아직도 전부인 것같은 이 세상을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실까? 우리는 이 질문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이 다만 고통이고 다만 원망에 불과하다. 주께서 이 땅에 오셨던 것이 실수였다든가, 잘못이었다든가, 최선이 아니었다 이렇게 말하는 기독교인은 없을 것이다.
그가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우리 인간의 현실, 가장 밑바닥까지 찾아오신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은혜가 된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어느 경우에도 절망할 필요가 없으며, 우리의 못난 것을 인하여 우리가 포기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다.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다.
■우리는 그의 제자다.
요한복음 14장에서 그렇게 약속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 그보다 큰 일도 하리라".
(예수가 하신 일이 뭔가? 남을 섬기고 용서하고 온유와 겸손으로 사랑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놀라운 성자 예수님이 행했던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과 영광의 약속들의 증인들이다. 그렇게 말하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아내라고 하는 약속과 명령 아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나?
세상은 결국 최선이 도덕이다. 그리고 현실은 실용성이다. 이해관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고, 옳고 그른 것 외에 더 이상의 가치는 없다.
■그러나 예수의 오심은 그런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고, 우리를 사랑하사 베푸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다. 권능이다. 지혜다. 그의 성실하심이다.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참여는 예수의 성육신에서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같이, 배척같이, 우리의 생애에도 고스란히 그대로 있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예수를 믿어 얻는 구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정성이 보내진 사람들을 통한 그 소식에,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 현실이다. 믿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찾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 자들에게까지도 찾아갈 것이요, 종일 역사 끝날까지 하나님은 이 일을 하실 것이다. 거기에 우리가 붙들려 있다.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발생하는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우리의 어떤 자부심, 신자의 인생을 사는 고통과 원망 말고, 그런 것을 극복하는 자부심, 명예와 영광에의 항복은 왜 우리에게 생기지 아니할까?
우리는 이 문제가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지금도 행하시는 이 일에 이런 중요한 이유가 있고 근거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뭘 하셨다는 건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를 그의 자녀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를 붙드셨다는 거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요, 우리에게 허락한 의다. 의란 곧 의지요 의리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의리를 지켰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그의 형상으로 자기가 사랑할 자기가 만든 세상을 다스릴 인간을 창조했다. 사람들은 배반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원칙을 적용하시지 않고, `의리`를 지키기로 한다. 하나님의 자존심을 지키며, 하나님의 목적을 기어코 이루신다. 그게 인류의 역사다. 그것이 그 아들이 오신 이유다. 그 아들이 하신 일이다.
■의리, 편파적인 것이다. 편파적인 것.
아니, 원칙이 없고 편파적으로 하는 게 뭐가 잘하는 건가? 공정과 원칙을 넘어서는 것이.
하나님이 도덕성이 없는 것도 아니요, 원칙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그 위에 더 한 것, 우리가 보통 말하는 은혜.
은혜란 잘하는 사람에게 주는 보상이 아니요, 결코 받을 수 없는 보상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편애다. 편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 그래서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기로, 우리를 놓아두지 않기로, 우상에게 우리를 넘기지 않고, 사망에게 우리를 포기하지 않겠다. 이제까지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아담의 배신과 거역을 수용하신다. 여기가 놀라운 곳이다. 왜 그걸 수용하셔야 됐나?
하나님은 죄 없는 인간, 말 잘 듣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서로 믿을 대상을 목적하시는 거다.
거기에 뭐가 차이가 있나?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는 최고의 가치, 도덕성과 실용성은 비정하다. 누구를 칭할 때도 이해관계나 혹은 공감으로 인하여 친했다가 그게 깨지면 다 깨지지 않는가?
그런 게 깨져도, 깨지는 원칙과 이해와 이익이 깨져도 그대로 관계가 유지되는 것, 가족이다. 가족.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가 부르라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신다. 이 하나님의 편애에 우리의 구원이 있고, 우리의 운명에 작용하여, 우리에게 승리와 영광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뭘 하라는 것인가?
'내 의리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자발성을 가지고. 사랑과 믿음이라는 것은 대등한 인격적 지위를 가지지 않으면, 즉 자발성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인간이 이 자발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발적 선택을 하려면, 자유가 있어야 된다. 자유는 그걸 쓰는 사람의 마음이다.
■아담은 실패했었다. 예수님은 성공하셨다.
우리에게 묻는다. 이 자발성이 없고, 하나님을 모르고, 자발적으로는 하나님을 외면하며, 사랑도 믿음도 기쁨도 없는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요구하시고 참여하시고 항복시키는 중인가 보는 인생을 살게 된다.
무지한 자들을 보게 된다. 비정한 자들, 무지한 자들, 선택을 할 수 없는 자들 속에서,
내가 선택을 할 수 있고, 내가 사랑을 할 수 있고, 내가 순종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로 부르신다.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의리를 사용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자유다.
이 자유는 선택권이고, 선택은 기회가 있어야 된다.
■그리고 자유는 한 번 잘하겠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결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매 경우마다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수많은 경험을 가져야 된다.
그 수많은 경험을 겪음으로써 한 사람이 훌륭해지며, 자발성을 가지며, 안목을 가지며, 분별할 수 있으며, 실력이 생긴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이 긴 인류역사를 허락하셨고 우리에게 이 죽을 것 같은 인생을 허락하신다.
우리의 실패가 우리에게 일할 기회다. '나 다시는 이렇게 하지 않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다. 그리고 모든 것이 허락되어 있다.
■세상에서 도덕이나 논리성, 그 다음에 이기심 같은 것들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그 사람들을 승부와 그리고 경쟁의 상태로 몰아넣는다면,
교회는(그리고 가족은) 훨씬 더 용서가 있고 기다려 주고 사랑하는 푸근한, 용서를 받는, 반가움의 대상의 곳이라고 이렇게 만들어져야 되는 곳이다.
그런데 교회 여기가 도덕보다 더 높은 종교심을 요구하는 데라는 것 때문에 더 긴장감이 더 많다. 틀리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여기에 오면 다 이러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다. 지난 번에 내가 마스크에 웃는 입을 그려갖고 오라 했다
■우리의 진정성으로 가득 차서 선행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의리, 하나님의 의지에 붙잡혀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일에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이 명예와 위대함에 우리가 참여함으로, 우리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무슨 이것과 견줄 다른 대안이 있는가? 어떤 성공, 어떤 승리, 어떤 영광이 세상에 있는가? 우리가 가지는 이 영광과 이 명예와 이 기적을 무엇과 바꿀 수 있는가?
■억지로 해야 한다. 할 것 같은데 못한다, 안된다.
큰 목적을 가지고 지금을 도망갈 것으로 목표를 세우지 말고, 오늘 할 일을 하라. 매일마다 수많은 기회가 온다.
거기서 우리, 의리를 가진 자가 되라. 하나님의 의리를 가진 자가 되라.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이, `성령이 내 심장이 되었다`는 이 현실이 무얼 해야 되는지, 그거를 하라.
하루하루가 기적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최고 권세는 죽음이다)
이 세상은 사망이 운명인 세계다. 무엇을 해도 결국은 헛되게 되고 망하고 마는 세계다.
이제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그 세상을 뒤집었다고 분명히 성경에서 말씀하신다.
(예수가 자아를 부인하고 타인을 섬기고 용서하는 삶을 사심으로써 세상의 헛된 가치관을 뒤집었다)
■신자된 우리가 빛이다.
우리로 인하여 세상사람들이 자기네가 죽음 아래 있고 절망 아래 있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최소한 도전받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 성령이우리에게 주어진 바 된 이유다.
(신자된 나의 성령 곧 하나님의 용서와 섬김, 하나님의 온유 겸손을 보고 나를 대하는 사람들이 도전을 받게 되는 그러한 빛이다 )
■왜 하나님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그런 지극한 일을 해놓으시고, 아직도 죄가 권세를 잡고 있는 것같은, 실패와 절망이 아직도 전부인 것같은 이 세상을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실까? 우리는 이 질문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이 다만 고통이고 다만 원망에 불과하다. 주께서 이 땅에 오셨던 것이 실수였다든가, 잘못이었다든가, 최선이 아니었다 이렇게 말하는 기독교인은 없을 것이다.
그가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우리 인간의 현실, 가장 밑바닥까지 찾아오신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은혜가 된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어느 경우에도 절망할 필요가 없으며, 우리의 못난 것을 인하여 우리가 포기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다.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다.
■우리는 그의 제자다.
요한복음 14장에서 그렇게 약속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 그보다 큰 일도 하리라".
(예수가 하신 일이 뭔가? 남을 섬기고 용서하고 온유와 겸손으로 사랑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놀라운 성자 예수님이 행했던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과 영광의 약속들의 증인들이다. 그렇게 말하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아내라고 하는 약속과 명령 아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나?
세상은 결국 최선이 도덕이다. 그리고 현실은 실용성이다. 이해관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고, 옳고 그른 것 외에 더 이상의 가치는 없다.
■그러나 예수의 오심은 그런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고, 우리를 사랑하사 베푸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다. 권능이다. 지혜다. 그의 성실하심이다.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참여는 예수의 성육신에서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같이, 배척같이, 우리의 생애에도 고스란히 그대로 있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예수를 믿어 얻는 구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정성이 보내진 사람들을 통한 그 소식에,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 현실이다. 믿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찾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 자들에게까지도 찾아갈 것이요, 종일 역사 끝날까지 하나님은 이 일을 하실 것이다. 거기에 우리가 붙들려 있다.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발생하는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우리의 어떤 자부심, 신자의 인생을 사는 고통과 원망 말고, 그런 것을 극복하는 자부심, 명예와 영광에의 항복은 왜 우리에게 생기지 아니할까?
우리는 이 문제가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지금도 행하시는 이 일에 이런 중요한 이유가 있고 근거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뭘 하셨다는 건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를 그의 자녀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를 붙드셨다는 거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요, 우리에게 허락한 의다. 의란 곧 의지요 의리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의리를 지켰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그의 형상으로 자기가 사랑할 자기가 만든 세상을 다스릴 인간을 창조했다. 사람들은 배반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원칙을 적용하시지 않고, `의리`를 지키기로 한다. 하나님의 자존심을 지키며, 하나님의 목적을 기어코 이루신다. 그게 인류의 역사다. 그것이 그 아들이 오신 이유다. 그 아들이 하신 일이다.
■의리, 편파적인 것이다. 편파적인 것.
아니, 원칙이 없고 편파적으로 하는 게 뭐가 잘하는 건가? 공정과 원칙을 넘어서는 것이.
하나님이 도덕성이 없는 것도 아니요, 원칙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그 위에 더 한 것, 우리가 보통 말하는 은혜.
은혜란 잘하는 사람에게 주는 보상이 아니요, 결코 받을 수 없는 보상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편애다. 편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 그래서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기로, 우리를 놓아두지 않기로, 우상에게 우리를 넘기지 않고, 사망에게 우리를 포기하지 않겠다. 이제까지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아담의 배신과 거역을 수용하신다. 여기가 놀라운 곳이다. 왜 그걸 수용하셔야 됐나?
하나님은 죄 없는 인간, 말 잘 듣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서로 믿을 대상을 목적하시는 거다.
거기에 뭐가 차이가 있나?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는 최고의 가치, 도덕성과 실용성은 비정하다. 누구를 칭할 때도 이해관계나 혹은 공감으로 인하여 친했다가 그게 깨지면 다 깨지지 않는가?
그런 게 깨져도, 깨지는 원칙과 이해와 이익이 깨져도 그대로 관계가 유지되는 것, 가족이다. 가족.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가 부르라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신다. 이 하나님의 편애에 우리의 구원이 있고, 우리의 운명에 작용하여, 우리에게 승리와 영광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뭘 하라는 것인가?
'내 의리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자발성을 가지고. 사랑과 믿음이라는 것은 대등한 인격적 지위를 가지지 않으면, 즉 자발성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인간이 이 자발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발적 선택을 하려면, 자유가 있어야 된다. 자유는 그걸 쓰는 사람의 마음이다.
■아담은 실패했었다. 예수님은 성공하셨다.
우리에게 묻는다. 이 자발성이 없고, 하나님을 모르고, 자발적으로는 하나님을 외면하며, 사랑도 믿음도 기쁨도 없는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요구하시고 참여하시고 항복시키는 중인가 보는 인생을 살게 된다.
무지한 자들을 보게 된다. 비정한 자들, 무지한 자들, 선택을 할 수 없는 자들 속에서,
내가 선택을 할 수 있고, 내가 사랑을 할 수 있고, 내가 순종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로 부르신다.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의리를 사용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자유다.
이 자유는 선택권이고, 선택은 기회가 있어야 된다.
■그리고 자유는 한 번 잘하겠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결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매 경우마다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수많은 경험을 가져야 된다.
그 수많은 경험을 겪음으로써 한 사람이 훌륭해지며, 자발성을 가지며, 안목을 가지며, 분별할 수 있으며, 실력이 생긴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이 긴 인류역사를 허락하셨고 우리에게 이 죽을 것 같은 인생을 허락하신다.
우리의 실패가 우리에게 일할 기회다. '나 다시는 이렇게 하지 않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다. 그리고 모든 것이 허락되어 있다.
■세상에서 도덕이나 논리성, 그 다음에 이기심 같은 것들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그 사람들을 승부와 그리고 경쟁의 상태로 몰아넣는다면,
교회는(그리고 가족은) 훨씬 더 용서가 있고 기다려 주고 사랑하는 푸근한, 용서를 받는, 반가움의 대상의 곳이라고 이렇게 만들어져야 되는 곳이다.
그런데 교회 여기가 도덕보다 더 높은 종교심을 요구하는 데라는 것 때문에 더 긴장감이 더 많다. 틀리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여기에 오면 다 이러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다. 지난 번에 내가 마스크에 웃는 입을 그려갖고 오라 했다
■우리의 진정성으로 가득 차서 선행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의리, 하나님의 의지에 붙잡혀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일에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이 명예와 위대함에 우리가 참여함으로, 우리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무슨 이것과 견줄 다른 대안이 있는가? 어떤 성공, 어떤 승리, 어떤 영광이 세상에 있는가? 우리가 가지는 이 영광과 이 명예와 이 기적을 무엇과 바꿀 수 있는가?
■억지로 해야 한다. 할 것 같은데 못한다, 안된다.
큰 목적을 가지고 지금을 도망갈 것으로 목표를 세우지 말고, 오늘 할 일을 하라. 매일마다 수많은 기회가 온다.
거기서 우리, 의리를 가진 자가 되라. 하나님의 의리를 가진 자가 되라.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이, `성령이 내 심장이 되었다`는 이 현실이 무얼 해야 되는지, 그거를 하라.
하루하루가 기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