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하나님만이 사랑을 만들고 기쁨을 만든다. 나이먹은 자랑 해보자. 멋진 어른이 되어 보자. 우리가 사는 시대와 후손들 앞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보여주기로 하자

nazunzaro 2020. 10. 27. 04:38
우리 얼굴을 마주하고 웃는 얼굴 보고 싶다. 함께 찬송드리고 함께 안부를 묻고 기뻐하며 반가워하고 싶다. 그런 날이 속히 이르기를 바란다.

구약성경으로부터 성경을 쭈욱 보는데 사사기에 이르니까 너무나 기가 막힌 이스라엘 역사를 만나게 되었고, 말도 안되는 이 사건들이 사실은 역사 속에서 반복되고 있고, 우리가 사는 지금 현대 사회의 사건, 사회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 것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사사기 20장의 이 마지막 사건은 훨씬 참혹하다. 이스라엘이 행한 모든 일들은 여호와라는 이름과 율법을 근거로 하는 것으로 기록됨으로써 더욱더 이 마지막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신랄하다. 어찌하여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하는 모든 일들을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하면서, 하는 행동에 있어서는 실오라기만큼도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붙일 수 없는 일을 하는가 하는 것이 사사기의 마지막 장이 되고 끝절에,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렇게 나온다.

이것은 따지고 보면, 온 인류가 그렇게 해 온 일이다. 인류는 하나님 없이 살아올 수밖에 없었고, 이스라엘만 그나마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택하시고 그 역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개입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따지고 보면 아직까지도 민족적으로 회개하고 있지 않다. 이방 나라들은 그러니까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고, 전쟁은 언제나 폭력적이며 그리고 폭력에 의해서 정의와 평화가 언제나 깨지는, 그리고 어떤 폭력도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정의와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둘러대는 법 아닌가?

우리가 생각해보면 지금도 어느 나라나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국민 전체의 공감을, 승복을 받아내는 그 명분이 있어야 되는 게, 그것은 언제나 정의와 평화인 것이 맞다. 그런데 그 정의와 평화라는 것은 세상에서는 폭력으로 밖에는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폭력이 정의일 수도, 평화일 수도 없는데 왜 세상에서는 폭력일 수밖에 없느냐 하면, 세상은 권위가 없기 때문이다.
권위란 존재와 생명과 가치와 명예와 영광에 관한 힘이어야 된다. 세상에는 그런 게 없다. 우리가 이런 멋진 개념들, 멋진 단어들을 알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걸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하나님 만이 만드시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사랑을 만들고, 하나님만이 기쁨을 만든다.
그 단어를 쓰는 세상이 가지는 그 기쁨이나 세상의 사랑은 다 부패한 것이고 왜곡된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늘 배신, 그리고 이 폭력, 공포, 그리고 헛된 것이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가 역사 내내 보고 우리 인생에서도 본다.
그러니 이 폭력이 난무하고 공포가 들어오면, 결국은 무슨 문제가 되냐 하면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할 수 없고,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사사기의 결론이다.

어떻게 해야 이 문제가 해결이 되는가?
하나님께 돌아와야 된다.
그러나 사사기에서는 이 일이 우리 인류가 아담의 범죄로부터 자초한, 즉 죽음이 운명이 된 현실에서는 이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더 궁극적인 질문을 할 수 있다. '인류가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하나님이 답을 내셔야지 왜 방관하고 계십니까?'라고 물을 수 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아담이 그 모든 것을 거부했다. 여기서 모든 것을 거부했다는 것은 그가 행복과 승리를 거부했는 것은 아니다. 선택권에서 그에게 주어진 자유, 그의 선택을 하나님 없음으로 선택을 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을 우리는 '순종'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선택해야 모든 것이 가능한데, 하나님을 외면하자, 그 금령을 어기자, 그는 하나님 없는 존재가 되었고, 하나님 없는 존재가 되자, 그의 운명은 죽음이 되었고, 그의 현실은 살육이 되었다.
우리가 거부한, 하나님의 임재를 거부하여 하나님의 부재를 초래한 우리가,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가 초래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로 보게 하는 것. 신약성경에서는 탕자의 비유같이,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아버지 집을 나서는 순간, 두려움과 가난과 고통에 시달려야 됐던 그 길을 이 역사가 걷는 것이다.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하실까?
자유가 가지는 책임, 자유를 사용할 실력, 분별과 통찰을 갖게 하는 시간을 주신다. 그것이 인류 역사이고 우리 인생에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경험이다.
'우리가 쉽게 순종하면 됐을 것을, 왜 말 안 듣고 고생을 사서 해?'
●살아 봐야 안다. 자식 길러 봐서 알잖은가. 부모 말 듣는 자식 없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 모든 것이 다 선한 것이 없다. 그 우리 본성이, 인간이 쉬운 것, 망하는 것 거기까지밖에 실력이 없다.

그 이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하나님은 이것을 강요하지도 강제하지도 겁을 주지도 않는다. 우리가 깨닫고 기쁜 마음으로 주 앞에 항복하기를 바란다.
이 항복은 굴복이 아니다. '그 때는 왕이 없었다' 그런 말은 아주 여러가지의 의미이다.
열왕기에 가서도 왕이 생겨도 이스라엘은 승리도 성공하지도 못한다. 왕이 실패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왕은 폭력이어서는 안된다. 그 왕은 하나님이어야 된다로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왕은 누구신가 생각하라.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하는 것은 말과 각오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폭력과 위선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쉬운 길을 약속하는 오늘의 시험 앞에서, 하나님의 편을 들어야 하는 그 결정을 내려야 하는 현실적 도전 속에 있는 것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래서 오늘은 무섭다. ●그 오늘을 승리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 된다.
쉽게 성공이 이루어지지도 않고 성공이 또 자연적으로 연장되지도 않는다. 자라야 된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 세상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것같이, 하나님은 더욱더 크신 힘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
●우리 나이 먹은 자랑을 해 보자. 멋진 어른이 되어 보자. 우리가 사는 시대와 후손들 앞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보여주기로 하자.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아들을 보내셨고, 죽음을 뒤집어 부활과 영생을 주시고, 소망과 사랑 속에 살게 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
●세상이 우리에 대하여 폭력과 공포로 우리를 몰아갈 때, 하나님을 믿는 자의 담대함과 믿음으로 대항하고, 우리가 빛과 소금으로 살아내는 인생이 어느 하루도 손해 보는 날이 없고 쓸데없는 날이 없도록 힘써 깨어 기도하여 순종하고, 믿음을 동원하고, 인내하고 기도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