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지금 나의 이 현실적 조건이, 이 보잘것 없는 자리가, 이 초라한 모습이, 의심과 불안들이, 하나님이 즐겨 일하시는 조건이다

nazunzaro 2020. 1. 10. 06:31

내 지금의 현실적 조건, 지금 내가 있는 자리, 지금의 내 이 모습이, 의심과 불안들이, 하나님이 즐겨 일하시는 조건이다.

이게 예수의 탄생이다

 

달리 할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자폭하고 싶은 지금 내 이 한심함과 무능함이, 이 의심과 불안과 절망들이, 별볼일 없는 초라한 지금 내 이 꼬라지가,

섬김과 용서로 온유와 겸손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영광과 생명과 기쁨의 자리이다.

그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성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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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 오는 모든 시대에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시는 중에 예수를 보내어 모두를 끌어 안는, 모든 운명을 확정짓는 일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일에는 묘한 모순이 하나 있다.

성경에 높은 자와 낮은 자,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위대한 자와 비천한 자의 비유에 ●마리아는 비천한 자에 속해 있다고 얘기하는 거다.

이 놀라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이루려 오신 하나님의 개입, 그 놀라운 권능과 진심어린 하나님의 행사에 부름을 받고 택함을 받았는데 ●자기 자신은 비천한 자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비천하다는 것, 가난하다는 것,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긍휼이 필요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이 결과를 만들어낸 게 아니다,라는 걸 알 수 있고,

그보다 더 크게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선언했던 제자도를 한번 떠올려 보자.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이다.

여기서 부인한다는 게 뭔가? 겸손해야 된다, 낮은 자가 되어야 한다고 이렇게 의지적 선택적 얘기를 하는게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자리를 말한다. 처녀가 애를 뱄는데 무슨 새삼스럽게 겸손을 떨 것이며, 새삼스럽게 뭔 금식기도를 할 것인가. 일은 일어났고 그 일은 이 세상 우리의 이해 속에서는 말이 안되는 자리에 있게 된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적 표현에서 이것을 '내려 놓음' 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런 단어들이 우리에게 잘못 전달되곤 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못났고 닥쳐온 현실은 무섭고 해결책은 없고.. 선택의 여지가 없으면 무슨 선택을 하느냐 하면 자폭을 해버리게 되는데, 그걸 하지 말라는 거다.;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폭하지 마라. 네가 가는 길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고 네가 상상할 수 없는 길로 이제 인도될 것이다. 그때 어떻게 해야 되나. 그 짐을 지고 쫓아와라. 자폭하지 말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현실에서 그 짐을 지고와라. 십자가를 져라`는 말이다.

 

●내가 도무지 감당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고 아무 해결 방안이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그 자리에서, 자폭하지 말고 그 짐을 그대로 지고 감수하라는 말이다.

왜? 그게 하나님이 즐겨 일하시는 조건이고 방법이니까.. 하나님이 그 조건에서 그 방식으로 일하시어 마침내 우리로 영광을 이루실거니까..

 

●이런 것이 다 헌신, 희생, 소명이라는 단어로, 다 어떤 의지, 어떤 간절함이라는 단어로 추상화되지 말고. 우리 모두의 현실, 지금의 자리, 여기. 우리 인생에서 내가 자랑스럽고 후회해서 고칠 수 있고 반성할 수 있다고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그 많은 부분들.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것도 아니었던 그 일들이, 그게 하나님의 즐겨 일하시는 조건이다. 이게 예수의 탄생이다.

 

하필 마리아냐 이거다. 하필, 하필 처녀냐? 그것도 약혼까지 해놨는데, 미리 하든가, 결혼한 다음에 낳든가, 하필 나냐? 이렇게 된 것을 감수한다.

 

왜 감수하나? 방법이 없으니까, 방법이.

왜 미혼모가 됐냐고 물으면 뭐라 그러나? '글쎄 말이예요' 그런다. ●'글쎄 말이예요..' 그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성탄절이다.

 

●예수의 오심이 굉장한 사건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너희 자신을 과소평가 하지 마라. 네 조건이면 충분하다. 내가 그렇게 일하겠다`

그게 예수를 보내시는 그 약속, '내가 맹세한다. 내가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내가 네게 한 약속을 이루고야 만다`는 이 가장 크신, 모든 존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자기를 가리켜 정말 목숨을 걸고 한 약속을 이루시는 방법으로 마리아에게 보낸 그 아들, 십자가에 죽는 그 아들이라는 방법으로, 세상이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든다,라는 걸 우리는 믿는 것이다.

 

●뭘 믿나? 우리는 자폭할 수는 없다. 포기하지는 않겠다. 그게 믿음의 정수이다. 하나님은 어디서든지 일하실 수 있다. 마굿간에 태어나실 수 있다. 십자가에 죽을 수 있다. 그가 역사와 모든 인생을 바꾸실 수 있다. 그를 찬송하게 하며,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누리는 영광보다 더 크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게 던지우는 들풀의 영광도 솔로몬이 입은 것보다 얼마나 찬란하냐..

 

그렇게 얘기했던 성경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우리의 생명과 실존과 ☆●우리의 가슴에 가득한 모든 의심과 불안들 속에 하나님이 찾아오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입으로 이 마리아의 찬송을 함께 부를 수 있는, 우리의 기적이 되도록 해야 한다.

 

*기도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셨다. 마굿간에 처녀에게 보내셨다. 우리로서는 알아 볼 수 없는, 저 헤롯이 물은 것같이, 유대인의 왕이 나신 곳이 어디뇨? 고급 저택이 아니었다. 알아 볼 수 있는 외적 조건이 없었다. 꼴 위에 누워 계셨다.

●그, 그 꼴로, 초라하고 비천한 볼품없는 모습으로, 십자가까지 갔고, 거기 부활이, 영광이, 소망이, 기쁨이, 자랑이 넘치게 하셨다. 우리 각자가 처한 자기의 현실적 조건, 지금 이 자리, 지금 이 모습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기적을 깨우치고 살아 내는 그 기적도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예수 안에서.

 

(*2019 성탄절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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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할수 있는 선택의 여지도 없어 자폭하고 싶은 지금의 내 이 한심함 무능함 의심 불안 절망이, 별볼일 없는 초라한 지금 내 꼬라지가, 남섬김 용서 온유 겸손이 일하는 영광과 생명의 자리이다.

내가 형통해서 하게 되는 자기자랑 갑질 무례함 거기에는, 남섬김 용서 연민 온유 겸손의 기쁨과 영광이 일할 자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