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정치력, 경제력, 세상적 힘 그런 걸 부러워 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가장 중요한 명예를 이해하고 살아야 한다

nazunzaro 2020. 10. 14. 14:47
삼손은 사사(士師, Judge)였으나 그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블레셋 속에 들어가 살았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그들의 삶을 그가 즐겼다는 뜻이다. 블레셋의 삶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과 다른 것이다. 거기에는 하나님도 없고, 율법도 없다. 하나님도 없고 율법도 없다는 것은 인생을 그저 한번 살고 그만인, 짧은 기회 속에서 그저 흥청망청 사는 게 다이다. 삼손이 그렇게 산다.

그런 인생을 사는 것은, 지금 기독교 이천 년 역사 속에서나 그 이전에 이스라엘 이천 년 역사 속에서나 보면, 하나님이 택한 그의 백성들을 또는 신약시대 교회를 세상 가운데 놓고 일을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세상의 제사장 나라였다. 하나님 없는 자들과 다른, 하나님 있는 자의 삶이라는 것은 거룩해야 되는 것이었다.
●그건 다만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운명과 명예에 관한 것이었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보고 죽음이 끝이라고, 그래서 체념하고 혹은 방탕하고 절제하거나 아낄 것이 없이,조심할 것이 없이, 마음대로 그냥 불사르라고 유혹하고 위협한다.

그러니 성경의 기록에서 삼손이 왜 사람들에게 오해되느냐 하면, 그가 가진 힘 때문이다. 폭력, 그의 무력, 현대판으로 오면 이것이 아마 정치력이거나 경제력이 될 것이다.
●그런 걸  부러워 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가장 중요한 명예를 이해하고 살아야 하는거다.

블레셋의 침략을 받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운명과 정체성과 현실적인 보상은, 그들이 구별된 백성으로 자기 정체성을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섬기는 백성이어야 됐다. 그것이 사사를 세우는 이유였다.

오늘날에도 그렇다.
'교회가 어떤 면에서 그 기준이고 평가가 되고 무엇을 목표하는가?'라고 물어야 된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수를 믿는다는 표현이 가지는,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라는 말들을 실천할 수 있어야 된다.

그러한 일들은 어느 현실에서도 우리가 마주치는 그 위협이 있다.
세상이 우리에게. '내게 절하라 그러면 세상을 다 네게 주겠다' 예수님께 했던 그 유혹, 협박을 우리에게 계속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삼손이 그랬던 것처럼 대강 산다. 

●우리는 세상 속에 있는 것으로 세상을 따라가서는 안된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 구실을 해야 한다. 그것은 나이도 건강도 그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핑계 댈 수 없다. 오늘 지금을 어떻게 사느냐의 싸움이다. 
그 싸움에서 승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무엇을 해야 되는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너무나 분명하다. 핑계댈 데도 없고 스스로를 속일 수도 없다. 힘을 다해야 된다. 완벽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냥 해야 한다.
자식들 앞에 보이고 더 진지하게 기도하고 ●그리고 살아있는 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쳐 하나님의 사람 노릇을 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생애는 건강이든, 나이든, 무슨 조건이든 어떤 경우와도 상관없이 해 같이 빛날 것이다.

삼손은 모든 것을 가졌으나 실패한다.
우리의 불만은 언제나 우리는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했다는 그런 원망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 우리는 예수를 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안다. 구원받은 것을 안다.
부활과 영생을 가지고 있다. 기도할 수 있다. 용서할 수 있다.
●말로만 생각만으로가 아니라, 하루하루를 그렇게 소망과 생명과 진리와 부활과 기쁨과 명예로 채우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