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하나님을 믿으면 종자가 변해야 되는 거다. 그 정체성과 그 삶의 방식과 원리와 그 추구하는 바 목적과 그 본질이 다른 사람으로.
nazunzaro
2020. 10. 11. 18:22
구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서 너무나 답답한 마음이 들고 너무나 의아로운 생각이 든다. 그 쉬운 정답, 왜 하나님을 순종하고 복을 받지 못하고 배신하고 우상을 섬겼을까? 그 다른 우상들은 그때 엘리아 시대에 갈멜산에서 보았듯이 그 제물에 응답도 못하는 그저 하나의 조각한 신상에 불과한데,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그 제물을 받으신 하나님을 왜 외면했을까? 왜 순종하지 못했는가? 이렇게 쉽게 질문을 던지고, 나는 그러지 않으리라 그럴 리가 없다 이렇게 안심을 하는 경우가 많다.
유다 백성의 멸망의 관해서, 저들은 성전도 가지고 있고 율법도 지키고 있고 이런 왕조에 관한, 왕권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네 나라가 다른 나라,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 이방민족에게 망할 리가 없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꾸중은 우리가 들을 때도 너무나 그 내용이 명백하게 '너희는 가난한 자를 돌아봐라. 너희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 하는 너무나 쉽고 간단한 요구인데, 왜 이스라엘은 이걸 지키지 못했을까?
●그러나 이 예레미야가 지적하고 있는 이 문제들은 훨씬 뜻이 다르다.
하나님께서 유다 보고 정의를 행하고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라는 것은 도덕적이거나 사회정의적이거나 한 명분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율법도 받았고 성전제사도 나한테 요구받았고 또 그 왕권도 내가 택한 자를 세워서 너희에게 약속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복을 베풀고 기뻐하고 사랑하는 백성들, 그 나라들은 《어떻게 세상과 다르게 명예롭고 놀라운 존재가 되는가 하는 것이 나를 알고, 나의 백성이 되고, 내가 명하는 것들을 지킨 표여야 되는데》,
너희는 이 세 가지를 갖고 있다고 자랑하면서도 너희가 이런 것이 없는 이방민족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동일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지 않느냐?
너희는 왜 이런 못난 짓을 하느냐? 명예로운 짓을 해라,라는 둘 간의 선택을 꾸중하는 것이 아니라,《'내가 너희를 선민으로 불러 세우고 너희에게 특별히 나타나고 많은 것을 약속한 이유는, 내 창조의 목적을, 그리고 나를 아는, 나를 알린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이 영광됨을, 이 창조의 영광됨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영광됨을 너희에게 열매 맺고자 하는 것이 내 뜻이었다.》
그러나 너희는 이것을 못했다. 그러니 어찌 보면 너희는 바벨론만 못한 거다. 그들은 자기 신에게 충실했다. 그래서 폭력적이고 그래서 열심히 힘을 길러서 마침내 너희를 이겼다. 그들은 자기네 신의 폭력성과 거짓된 것에 힘을 다하여 이 공을 이루었고'
《'너희는 나를 아는 것을 힘써 지켜 마침내 드러냈어야 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오히려 거침돌이 됐다. 너희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이냐?' 이렇게 꾸짖는 것이 이 유다 왕조의 멸망에 가해지고 있는 지적이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서 늘 마주하는 이 질문들, '예수 믿는 게 뭐냐?' 라고 물어 보면, 우리 보고 소위 예전에 단도직입적인 그 질문이었다; '하나님이 있으면 보여 봐'.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종자가 변해야 되는 거다. 그 종자의 변함은 무슨 업적이나 어떤 권능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종자가 다르다, 이 사람은 그 정체성과 그 삶의 방식과 원리와 그 추구하는 바 목적과 그 본질이 다르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조건 속에 있느냐는 부차적인 것이다. 우리가 부요하냐 가난하냐 하는 것이 상관이 없고, 건강하냐 병약하냐도 상관이 없는,
종자가 다른, 말하자면,
●'힘든 이 세상에서는 너는 어떻게 살래?'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인생을 요구하고 계신다 이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힘든 세상에서, 왜 힘든가? 죄악이 관영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서 자기 삶을 지키기 위하여 먼저 상대방을 꺾어야만 하는 난투극 속에서, 힘든데,
■우리는 손놓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는 자기를 방어하기 위하여 폭력을 쓰지 않고 존재가 변한, 종자가 다른, 새 창조와 부활에 참여한 자로서, 어떻게 그 고난을 이해하고 극복하고 정말 빛이고 생명이고 진리가 되는가, 이렇게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것이 안된다' 이렇게 손빠르게 빨리 결론에 가지 말고,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것이 무섭다, 자기가 자기를 지켜야 된다, 그러니까 바로느고에도 아첨을 떨어야 됐고, 바벨론 왕에게도 아첨을 떨어야 했고, 그리고 뱅성들 앞에서도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힘에 지나는 짓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이 악정을 폈다, 백성들을 핍박했다 하는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나를 떠나서 네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네가 무슨 짓을 하게 되었는가 봐라' 이렇게 이스라엘 전 역사에 대하여 꾸짖고 있는 것이다》.
`유다의 멸망이 어디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식으로 부패가 확대되어 갔는가 봐라`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신약시대의 약속과 증거 속에서는 우리한테는 훨씬 큰 사실은 유리한 조건에 있는 것이다.
《예수가 죽음으로 우리 편을 든다면, - 이 세상이 어떤 위협을 가해도, 이 세상의 최고의 위협은 죽음이다. 너 그렇게 살면 죽어. 내 말 안 들으면 죽어. - 그 죽음이 극복되었다면, -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것이 이제는 위협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 어떤 위협도 우리에게 약속된 그 사망을 이기고 허락된 새 생명, 새 운명, 새 권능, 새 믿음의 시대에는 이 죽음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는 커다란 명예와 영광과 약속된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하는 문제를 확인해 낼 줄 알아야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할 일이다.
순교의 정신, 선교하는 열심, 기도하는 진심 이런 것들로 쉽게 추상명사들로 얼버무리지 말고, '그 아들을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라는 말에 자기를 붙들어 매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이 우리에게 가하는 어떤 위협이나 고난이나 어려움들도 그것 자체로 우리에게 중심을 흔들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가 고단할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고 힘들 수야 물론 있다. 그러나 거기서 부활을 죽음에다 꽃 피우신 우리 하나님이 일 하신다.
한국 교회가 위기라 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지만, 무얼 위기라 그러는지 핵심은 얘기하지 않는다. 세상이 우리를 욕한다, 교회에 대해서 여론이 좋지 않다 이런 것들은 위기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우리가 이것을 맞받아 해야 되는 대답이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에 이미 들어있었던 것임을 기억하고,
《내 생애에 나라는 존재가 사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순종으로 충성으로 응답되어야 하는 것이다》.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서는 안 되는 우리의 책임과 영광의 기회를 승리로 만들어내는,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믿음의 식구들 되어야 한다.
세상은 자신의 정체를 유감없이 보이고 있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그냥 막 살아라 그런다. 죽어버리면 그만 아니냐고, 우리를 부추긴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는 할 말이 있다. 우리는 주 앞에 서야 하고 영생을 약속 받았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으로서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 그것은 아무도 와서 뺏을 수 없으며 나도 절대 거기서 타협하지 않겠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다.
이 인생을 오늘 하루 살아내고 하루마다 더 충성하여 더 깊은 자리까지 하나님의 자녀의 충성에 자랑을 증언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유다 백성의 멸망의 관해서, 저들은 성전도 가지고 있고 율법도 지키고 있고 이런 왕조에 관한, 왕권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네 나라가 다른 나라,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 이방민족에게 망할 리가 없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꾸중은 우리가 들을 때도 너무나 그 내용이 명백하게 '너희는 가난한 자를 돌아봐라. 너희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 하는 너무나 쉽고 간단한 요구인데, 왜 이스라엘은 이걸 지키지 못했을까?
●그러나 이 예레미야가 지적하고 있는 이 문제들은 훨씬 뜻이 다르다.
하나님께서 유다 보고 정의를 행하고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라는 것은 도덕적이거나 사회정의적이거나 한 명분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율법도 받았고 성전제사도 나한테 요구받았고 또 그 왕권도 내가 택한 자를 세워서 너희에게 약속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복을 베풀고 기뻐하고 사랑하는 백성들, 그 나라들은 《어떻게 세상과 다르게 명예롭고 놀라운 존재가 되는가 하는 것이 나를 알고, 나의 백성이 되고, 내가 명하는 것들을 지킨 표여야 되는데》,
너희는 이 세 가지를 갖고 있다고 자랑하면서도 너희가 이런 것이 없는 이방민족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동일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지 않느냐?
너희는 왜 이런 못난 짓을 하느냐? 명예로운 짓을 해라,라는 둘 간의 선택을 꾸중하는 것이 아니라,《'내가 너희를 선민으로 불러 세우고 너희에게 특별히 나타나고 많은 것을 약속한 이유는, 내 창조의 목적을, 그리고 나를 아는, 나를 알린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이 영광됨을, 이 창조의 영광됨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영광됨을 너희에게 열매 맺고자 하는 것이 내 뜻이었다.》
그러나 너희는 이것을 못했다. 그러니 어찌 보면 너희는 바벨론만 못한 거다. 그들은 자기 신에게 충실했다. 그래서 폭력적이고 그래서 열심히 힘을 길러서 마침내 너희를 이겼다. 그들은 자기네 신의 폭력성과 거짓된 것에 힘을 다하여 이 공을 이루었고'
《'너희는 나를 아는 것을 힘써 지켜 마침내 드러냈어야 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오히려 거침돌이 됐다. 너희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이냐?' 이렇게 꾸짖는 것이 이 유다 왕조의 멸망에 가해지고 있는 지적이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서 늘 마주하는 이 질문들, '예수 믿는 게 뭐냐?' 라고 물어 보면, 우리 보고 소위 예전에 단도직입적인 그 질문이었다; '하나님이 있으면 보여 봐'.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종자가 변해야 되는 거다. 그 종자의 변함은 무슨 업적이나 어떤 권능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종자가 다르다, 이 사람은 그 정체성과 그 삶의 방식과 원리와 그 추구하는 바 목적과 그 본질이 다르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조건 속에 있느냐는 부차적인 것이다. 우리가 부요하냐 가난하냐 하는 것이 상관이 없고, 건강하냐 병약하냐도 상관이 없는,
종자가 다른, 말하자면,
●'힘든 이 세상에서는 너는 어떻게 살래?'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인생을 요구하고 계신다 이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힘든 세상에서, 왜 힘든가? 죄악이 관영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서 자기 삶을 지키기 위하여 먼저 상대방을 꺾어야만 하는 난투극 속에서, 힘든데,
■우리는 손놓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는 자기를 방어하기 위하여 폭력을 쓰지 않고 존재가 변한, 종자가 다른, 새 창조와 부활에 참여한 자로서, 어떻게 그 고난을 이해하고 극복하고 정말 빛이고 생명이고 진리가 되는가, 이렇게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것이 안된다' 이렇게 손빠르게 빨리 결론에 가지 말고,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것이 무섭다, 자기가 자기를 지켜야 된다, 그러니까 바로느고에도 아첨을 떨어야 됐고, 바벨론 왕에게도 아첨을 떨어야 했고, 그리고 뱅성들 앞에서도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힘에 지나는 짓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이 악정을 폈다, 백성들을 핍박했다 하는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나를 떠나서 네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네가 무슨 짓을 하게 되었는가 봐라' 이렇게 이스라엘 전 역사에 대하여 꾸짖고 있는 것이다》.
`유다의 멸망이 어디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식으로 부패가 확대되어 갔는가 봐라`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신약시대의 약속과 증거 속에서는 우리한테는 훨씬 큰 사실은 유리한 조건에 있는 것이다.
《예수가 죽음으로 우리 편을 든다면, - 이 세상이 어떤 위협을 가해도, 이 세상의 최고의 위협은 죽음이다. 너 그렇게 살면 죽어. 내 말 안 들으면 죽어. - 그 죽음이 극복되었다면, -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것이 이제는 위협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 어떤 위협도 우리에게 약속된 그 사망을 이기고 허락된 새 생명, 새 운명, 새 권능, 새 믿음의 시대에는 이 죽음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는 커다란 명예와 영광과 약속된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하는 문제를 확인해 낼 줄 알아야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할 일이다.
순교의 정신, 선교하는 열심, 기도하는 진심 이런 것들로 쉽게 추상명사들로 얼버무리지 말고, '그 아들을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라는 말에 자기를 붙들어 매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이 우리에게 가하는 어떤 위협이나 고난이나 어려움들도 그것 자체로 우리에게 중심을 흔들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가 고단할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고 힘들 수야 물론 있다. 그러나 거기서 부활을 죽음에다 꽃 피우신 우리 하나님이 일 하신다.
한국 교회가 위기라 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지만, 무얼 위기라 그러는지 핵심은 얘기하지 않는다. 세상이 우리를 욕한다, 교회에 대해서 여론이 좋지 않다 이런 것들은 위기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우리가 이것을 맞받아 해야 되는 대답이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에 이미 들어있었던 것임을 기억하고,
《내 생애에 나라는 존재가 사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순종으로 충성으로 응답되어야 하는 것이다》.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서는 안 되는 우리의 책임과 영광의 기회를 승리로 만들어내는,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믿음의 식구들 되어야 한다.
세상은 자신의 정체를 유감없이 보이고 있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그냥 막 살아라 그런다. 죽어버리면 그만 아니냐고, 우리를 부추긴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는 할 말이 있다. 우리는 주 앞에 서야 하고 영생을 약속 받았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으로서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 그것은 아무도 와서 뺏을 수 없으며 나도 절대 거기서 타협하지 않겠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다.
이 인생을 오늘 하루 살아내고 하루마다 더 충성하여 더 깊은 자리까지 하나님의 자녀의 충성에 자랑을 증언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