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우리 일상 인생이 별거 아닌데 하는걸, 이게 뭔가 하는걸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고난의 가치를 이해하라. 고난의 신비를 사는게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부르는 방식이다

nazunzaro 2020. 8. 8. 19:59
어떤 도전이 와서, 그리고 그 도전이 나를 이렇게 절망시키거나 스스로 자책에 빠뜨리는 실패로 찾아오는 것 때문에, 내가 그동안 안심하고 있던 테두리를 벗어나게 된다.

그게 없었으면 여기에 현상에 안주하고 말았을것이다. 그로 인해 내가 신앙의 현실로 들어오고, 고민이고, 불평이고, 절망이고까지 와야, 드디어 그 영역을 벗어난다.

우리의 일상, 우리의 인생이 별거 아닌데라고 생각하는 그게, '이게 뭔가'라고 생각하는 그게 굉장히 그 긍정적인 거다 그런 생각을 해야 된다.

고난에 관한 가치를 이렇게 이해를 해야 된다.

십자가 죽음 앞에서 예수님의 반응이 희한하다; '내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이렇게 말한다. 저들이 메시아를 확인하러 왔는데, 여태껏 일어났던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행하신 기적들의 연장선장에서 보면, 여기는 앞보다 더 큰 일이 일어나야 되는 거다. 그런데 그것을 '영광'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런데 그게 "십자가" 란 말이다.
`십자가`라는 것은 단지 죽는 게 아니고, 그 죽음에 대한 어떤 치열함이나 장열함도 아니고, 아주 수치스럽고 아주 말이 안 되는 오해, 왜곡, 배신, 그런 거다.

우린 십자가라면 무슨 부활이 이렇게 묶여 있으니까, 그 부활로 가기 위한 디딤돌로 쓰고 있지만, 원래 이 디딤돌은 이리 갈 수 없는, 모든 것을 막아버린 사건인데, 예수님께서는 이걸 '영광'이라고 얘기한단 말이다.

그래서 우리 앞에서 함께 확인하듯이, `하나님 왜 이런 것을 주셨어요?`라는 얘기는, 왜 내 인생을 이렇게 하셨어요?`라는 얘기는 `창조의 하나님, 부활의 하나님`이라는 성경의 증언에 비추어 볼 때, 따지고 보면 우리가 너무 믿음이 없는 거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창조와 부활의 하나님이다. ​창조는 우리가 금방 이해하는데, 부활은 뭐냐?
부활이란; 죽어도 산다, 죽음이 더 큰 일을 한다, 죽음이 더 큰 일을 하게 할 수 있다는 거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이건 아니다'가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반전을 만들어 내는 거, 이게 부활이다.
우리가 이런 말들을 너무 이해를 소홀히 하는 것 같다.

고린도교회가 바울에 대해서 시비를 건다. 가장 큰 시비가 뭐냐 하면, '네가 정말 유일신의, 전지전능한 신의 사자라면 최소한의 영광이라도 있어야 될 것 아니냐? 네가 볼 만한 데가 있냐, 뭐 맨날 쫄쫄 굶고 다니고 온갖 박해 속에 쫓겨다니는 주제에, 네가 무슨 신의 사자냐?'
그리고 이제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주욱 `내가 얼마나 고난을 받았는가`를 얘기함으로써 역습을 가한다; '너희들이 얘기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그건 더 아니다. 그러나 이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그리고 12장에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내가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다`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런 고생 속에 있는데, 하나님이 여기다 대고 사단의 사자라고 할만한 것까지 나한테 주셨으니 내가 무슨 수로 견디겠습니까?` 그러자, "너 이 일로 나한테 기도하지 마라.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이게 부활이다.

■ 부활이라는 게 '죽어도 살아~`, 이건 너무 간단하게 감으로써, 오늘 죽을 것 같은 것이 하는 일을 우리가 기대를 안 한다. 매일 죽을 것 같은데.. 우리의 위로는 사실은 순전히 세상적인 위로다. '하나님은 알아 주실거야'도 너무 소극적이다.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는 거다.

모세가 이제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그를 보낸다고 하고,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라 하고, 그러니 모세가 화가 나서 대꾸를 한다; `아니, 당신은 누구입니까? 무슨 일을 이렇게 하십니까? 사십 년 전에 내가 하자고 할 때는 뭐하고 있다가 이제야 나타나셔서 이제 하자고 하십니까?`
그러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한 적이 없는 하나님이란다. 네 사십 년은 내가 아무 일도 안 했던 것이 아니란다. 난 열심히 했고 그렇게 앞으로도 할 것이고 너를 데리고 와서 그 일을 할 것이고.."
그러니까 모세가 보는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건이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 앞에 항복을 하게되는 사건이라는 거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며, 이렇게 굉장한 분이다.
모세는 열 가지 재앙 내내 좋은 소리 안하다가, 홍해 앞에 서서야 항복을 한다. 백성들의 원망을 들으면서. `너희는 가만히 서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일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보라` 이렇게 기특한 소리를 처음 한다.

●그렇게, 이러면서, 배우는 거다. 그러니까 그 배우는 일의 가장 큰 그 배역이 누구냐 하면, 바로다. 바로가 회개하면 이걸 못한다. 바로가 계속 우겨야 된다. 바로가 끝없이 우겨서 하나님은 끝없이.. 하나님은 일을 이렇게 번거롭게 한다.
●출애굽 사건에서 바로는 그냥 죽이고, 그 나라는 싹 쓸어버리고 이스라엘은 거기서 만들어 버리면 제일 쉽다. 하나님은 그런데 그렇게 안 한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납득시키려고 그러신다. 결과를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납득시키려고.
왜?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를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인격적 관계라는 것.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단어는 믿음과 사랑이다.
믿음도 동등한 인격이 아니면 나눌 수 없고, 사랑도 동등한 인격이 아니면 나눌 수가 없다.
사랑의 반대말은 동정이다. 동정. 하나님은 우리를 동정하지 않으신다. 쌀쌀하게 굴지 않는다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이렇게 대등한 수준으로 요구를 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고단한 거다. 우리를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것은 이렇게 만사형통한 자리가 아니라, 이런 고뇌 속에서, 인간이 인간의 한계에 부닥치는 절망과 후회와 자책을 뚫어내는 일들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게 얼마나 굉장한 요구인지를 배우게 한. 그게 십자가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가 여기서 나온다.
그러니까 씨를 심을 걸 먹으려면 우습지 않은가? 지금 먹을 수 있는 걸 갖다 버려야 되려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게 싹이 나면 열매를 맺으면 몇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 아닌가?
그러니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씨를 심을 때, '땅이 씨를 삼켰다' 그러면 맞지만,
`죽음이 우리를 삼켰다. 죽음이 우리를 끝냈다` 그러는 것으로 마치 `땅은 삼켰다` 그랬으나 `사실은 내가 심은 거니라` 이렇게 되는 게 죽음이다. 그러니까 기가 막히는거다.

그러니 다시 성경을 보면, 아담이 잘못했을 때 죽여버리고 새로 만들면 되지 않는가?
노아 홍수 때 다 죽여버리고 새로 하면 되잖은가? 새로 안하시고 우리의 선택들, 우리의 결정들 속에서 일을 하신다. 우리의 배신과 외면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걸 놓고 일을 하신다.

우리가 영화를 보면, 영화의 모든 절정은, 절정이 일어나려면 긴장이 있어야 된다.
●긴장이란 형통하지 않은 거다. 그럴 수밖에 없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답이 없는 데서 답이 나온다. 그래서 갑자기 어떤 것이 이렇게 두 배가 되는. 이렇게 뒤집음으로써 크게 비약이 되는, 그런 일들을 우리가 드라마틱하다 그러고, 반전이 있다 그러고, 성경에서는 부활이라고 그런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들 때에 가졌던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결코 취소될 수도, 약화될 수도, 타협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셨다.
그러면 예수 모르고, 안 믿고 악하게 살다가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데? 그건 우리는 모른다.
그런 건 우린 모르고, 우린 이런 걸 아는 자리로 왔음으로써 이런 일에 더욱더 매진하여 더 가야 된다.
저들은 몰라서 못 간 데를 우리는 왔으니까, 여기를 오면 더 어디까지 가야 되냐 하면, 더 가야 된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불렀다는 것은 이런 모든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증언하는 이것이 영광이라고 증언하는 모든 것들을 합치면, 우리 한테 약속되어 있는 것은 이미 필설로 설명할 수가 없는 거다.
바울이 자기가 삼층천에 올라갔다 왔는데 사람이 가히 이럴 수 없는 말을 듣고 보고 온 것이다. 설명할 길이 없는, 그런 데를 우리가 부름을 받고 있고, 도움을 받고 있다

이 이해의 필요는, 이분법에 의한 비난, 소극적 부정적 가치에 불과한 확인, 그것으로 만족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만족하다고 우기고 그 만족을 유지하기 위해서 비난하고 정죄하는 이런 습관이랄까 잘못된 세계에서 나오란 말이다. 거기서 나오라고 부르는 거다.

●지금 코로나가 옴으로써 다 그렇게 하는 것 아닌가? 부자가 소용이 없다. 모두 소용이 없다. 모두. 그저 살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이제 무슨 생각을 하게 됐는가? 그때가 좋았지.. 어느 때? 교회 바글바글 모였을 때 그때 좋았지.. 국수 한 그릇 나눠 먹을 때 좋았지.. 그걸 다시, 세상이 우리를 속이고, 대강 넘어가고, 그냥 이렇게 마취시켜서 죽이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와서 깨웠다 이렇게 이해하는 거다.
"깨웠다. 자, 이제 어떻게 할래?"
그래서 지금 대형교회라는 게 의미가 없다. 대형교회가 교인 수가 많은 걸로 확인을 했는데, 이제는 무슨 수로 많나? 많이 들어올 수가 없는데..
이제는 누구를 비난해서 자기를 확인하는 게 아니라, 더 갈 수 있는 게 뭐냐에 대해서 집중해야 되는 때다.

●그래서 이제 십자가가 등장을 한다. 그리고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나의 마음이 괴로워.." 그것을 어느 번역에서 이렇게 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무슨 말을 하리요."
■그렇게 괴로워 하라. 그게 고통이다. 고통.
그러나 이 고통과, 이 맞고 틀리는 문제하고는 다른 거다. 내가 올바르면 고통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같이 말이 안 되는 건 없다.
땀은 속이지 않는다. 그렇다. 땀 없이, 노력 없이, 훈련 없이 되는 일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이런 어떤 명분을 되뇌이는 것으로 때운다. 그러지 말라는 거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면 실제적으로 우리 교인들 한테 요구하는 실천 방안은 이거였다;
■​`웃어라. 인사해라. 왜 기도원만 갔다 오면 얼굴이 시퍼렇게 되어갖고 오냐?`
그게 가장 중요하다. `반갑습니다`를 해야 되다. `안녕하셨어요?`그게 첫 길이다.
그런데 그 `안녕하셨어요?`를 하면,
`너는 지금 한가하게 인사를 할 여유가 있냐? 지금 나라를 위해서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해갖고 베려버렸다.

■누가 내 마음에 안 드는 얘기를 했을 때 잘 들어야 된다. `맞습니다`만 안하면 된다. 그냥 `그렇군요` 그러면 된다.
그런데 `넌 말이야, 학교 다닐 때도 그랬어~`
그런 말 왜 하는 건가, 도대체가? 원한을 극대화하려고?
왜 그렇게 되었나? 적극적인 삶의 훈련을 우리가 못 보고 못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때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 웃으면서 `야, 너는 예나 지금이나 정열이 있다. 그지?`

뭘 맞고 틀리고를 따지는가?
그런데 못 보면 그렇게 된다. 못 보면 못한다. 말을 배우는 것은 다 보고 하는 거다.
이걸 컵이라고 그러는 거다. `컵이 뭐야?` `컵은 말이야~' 그렇게 보여주 않으면서 설명만 해 갖고는 아무렇게도 안된다.

그러니까 하라.
우린 다 겁주는 사람 밑에서 배웠다. 그때는 그것밖에 할 게 없었다.

예수님의 마지막 장면에서, 죽음이 뒤에 나오지만 말하자면 여기까지로 이렇게 뭘 하셨냐 보라. 모든 기적을 이뤘다. 모든 기적을.
그리고 아버지 앞에 기도도 한다;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비켜주옵소서"
우리는 이 자리를 가야 된다.
이건 무언가? 왜 보이는 건가? 이것보다 이게 큰 거다. 그러나 이걸 보임으로써 인간들에게 뭐라고 얘기한 거냐 하면,
●`죽음이 최종 권세가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주와 구원주로서 너희의 인생에 복과 승리를 약속하시고 실제로 행하고 계시다`의 실제로 증거들이다. 이것들이.
그냥 엮으면 사실은 십자가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니 이 십자가라는 것이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즉, 우리 모두에게 얘기하는 거다; '네 실패와 네 절망이 절대 쓸데없는 것 아니다. 네가 잘한 것 아니지만, 욕먹고 끝나는 게 아니고, 그보다 훨씬 큰 거다. 그게 너한테 유익하게 굴어라' 그렇게 말을 한다. 거기가 은혜고 복음인 거다.

우리는 거기를 못한다. 그리고 후회한다. 그리고 낱낱이 까발려. 그게 우린 그렇게 됐다.
거기서 나오라. 예수님이 와서 뭘 보이고 뭘 했나 보라. 왜 공생애를 사셔야 된다 왜? 그 콘텍스트이다.
뒤에 가면 13장부터는 이제 말씀이다. 이런 것들은 자칫 잘못하면 실제적인 그릇에 안담기고 명분이 되고 만다. 좋은 얘기고 되고 만다.
그런데 그걸 다 앞에서 다 공생애를 사심으로써 뒷얘기가 다 그가 이런 일을 행하시고 이런 자들과 함께하고 마태와 함께 하고 나사로와 함께 하고,라는 콘텍스트에 우리를 끌어당기는 거다. 이게 없다. 이건 없고, 이 성육신은 없고, 십자가와 부활만 있게 되면, 이게 자꾸 추상화된다 추상화가 되어서 콘텍스트에 담지 못하는 얘기가 되면 소통이 안된다.

이게 무슨 얘기냐? 사람들이 와서 이제 하소연하는 때가 많다. 동창들 만나면,`나 요새 이만저만한 일로.. 허리도 아프고 뭐..` 거기에 다짜고짜로 `늙어서 그래` 이런단 말이다. 누가 몰라? `나 요새 눈도 잘 안 보이고..` `목사님 면역력이 떨어져서..` 그렇게 말을 하면 안 된다.
`목사님 얼마나 힘드세요?`, `목사님 어디 가실 일 있으면 절 부르세요. 제가 옆에 다 따라다니면서 제가 눈이 되고 발이 되어 드릴게요` 그래야 될 것 아닌가?
이런 것 없이 정답을 얘기하는 걸 `설교한다` 그런다. 일반 사람들이 `설교하네~`정황도 없고 동정심도 없이 정답만 아무 데나 남발하는 것을 `너 기관총 쏘냐?` 그러는 거다.

그러니까 자기 인생을 그렇게 안 살아봐서 못하는 것 아닌가? 자기가 자기 인생을 그렇게 살았으면 말할 때 그렇게 추상명사를 나열할 순 없다. 그런데 본 게 있어야지. 그리고 실제로 내가 살면서 겪은 의심과 고난과 불평과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그걸 어떻게 재료로 써야 되는지를 모른다. 나물을 먹으면 상추도 그렇고 쓴 게 맛있는 것 아닌가? 달면 못 먹는다 써야 맛있다. 희한하지 않은가? 쓴 건 원래 약이잖은가?

●기독교라는 건 훨씬 큰 거다. 우린 부활이 있다. 잘못해도 된다. 이 말을 무책임으로 끌고 가는 것은 실력이 없어서 그런거다. 얼마나 여기가, 기독교 신앙이 넉넉한지, 회전반경이 넓은 길을 가르쳐 주는 거다.
요즘 나이드니까 제일 못하는 게 주차를 못하겠어요. 주차장에 나올 때 긁는다. 삐~ 이렇게 옆에서 이렇게 삐~. 이건 무슨 소리야? 그냥 나와. 반응이 안돼. 정말 웃긴다.
그것도 감수해야 한다. 그런 걸 감수한다는 게 그게 실력이다. 얼마나 용량이 크냐? 얼마나 짐을 지고 갈 수 있냐? 이렇게 커진다.

해설하고 심판 보지 않는다. 운동장에서 뛰는 애들이 다 내 자식인거다. 그러니까 응원을 하고, 음료수 준비하고 끝나면 데려와서 목욕시키는 부모가 되는 거다.
젊었을 때는 선수로 뛰어야 한다. 선수로, 심판이나 중계나 해설하지 마라. 선수로 뛰라, 크라.
모든 운동이 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정신을 키운다.
죠크비치가 재작년쯤에 페드로 하고 결승해서 마지막 세트에서 12대 12까지 갔다. 그래서 타이브레이크를 가고 거기서 페드로가 졌자. 페드로가 매치포인트를 세 번이나 땄다가 놓쳤거다. 그래서 끝나고 그 죠크비치한테 한마디 하라고 마이크를 갖다 댔어요. 죠크비치가 뭐라고 했냐 하면, "이런 위대한 경기를 승패로 나누는 건 비극 아닙니까?" 그렇게 말을 하더라고. 이겨서 기쁜 거에서 훨씬 나가 있는 거다. 훨씬.
져 보고, 진 자리를 체념이나 비극으로 끝내지 않은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얘기다.​
`결국 극복했잖아` 이렇게 쉽게 얘기하지 말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뭘 넓히냐 하면, "너희 인생과 존재와 너희가 만나는 어떤 경우도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그를 십자가를 매단, 무덤에다가 만든 부활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건 없다" 그렇게 얘기하는 거다.
대강 봐주는 정도가 아니다. 나는 최선으로 최고의 명령으로 네 편이다. 네가 죽으면 내가 거기까지 좇아들어갈 거다 지옥에 같이 가자는 거다.
그게 기독교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거다.

우리가 보통 얘기할 때는 기독교가 복음이 아니다. 유교다;
`너 이 새끼, 교만하지? 너 게으르지?` 이렇게 꾸중이나 했지, `얼마나 고생이 많냐?` 이렇게 얘기 안한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께서 이런 길을 가셔서 이제 복음서를 보면 눈이 하나 넓어진 게 뭐냐 하면, 그 앞에 이제 전부 무슨 얘기가 나오느냐 하면, 반대자들이 나온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와 반대하는 자들이 늘 이렇게 있다. 그래 갖고, 심지어 이제 예수님 보고 귀신이 들렸다 하기도 하고, `저 요셉의 아들인 주제에 무슨 하늘에서 왔다고 하냐?`하기도 하고 이제 나중에는 덮어 씌우는 거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백성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소리칠 때만 해도 그들이 기대는 당연히 권력이었다.
그런데 죽는다. 그러니까 뭐라 그러나? `바라바를 놓아주고 그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세요.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십시요!
` 그런다. 그렇게 분노한다. 왜? 속았으니까 그들 생각에는 속았다. 너무 너무 배신감을 느낀 거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하면 교인들에게 찾아오는 제일 큰 시험이 뭔가? 배신감이다. 내가 열심히 살고, 지고 살았는데, 아무 보상이 없잖아? 그런데 왜 그 얘기들을 안 해줘? 뭐가 겁이 나서?
중간에 복음서 공부하다가도, '이놈들 보라고요. 이 예수 안 믿는 것들 보라고요'. 말을 이따위로 한다.
●그러지 말라고 이 앞의 모든 이에게 그걸 다 감싸 안아서 죽으시는 거다. 편든 자들도 편들었고, 반대하는 자들도 몰라서 그랬다. 편들든 뭐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들이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라고 그러는 거다
그걸 다 끌어안아서 뭐라 그러나? "아버지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왜 그걸 모르나? 아무래도 좋다고 말하는 얘기가 아니라, 알고는 있어야 된다
그래서 복음서가 그런 이 끝의 이 반전을 위해서 앞의 공생애 속에 예수님께서 이런저런 어떤 그런 그 정황에 말려있고, 편드는 자와 반대하는 자의 뭐 이런 갈등 속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것같이 사는 그 모든 것들이, 이 마지막에 의해서 이렇게 다 화해가 되고 전복이 되고 그런다는 사실을 알면 '이런 인생을 살아야 되고 지금 하나님이 이 일, 그 아들에게서 하신 일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인생이다'를 우리가 이해해야 된다"

이게 빌립보 3장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게 바울의 고백이다.

■당연히 고난의 신비를 살아야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부르는 하나님의 권능이다. 그렇게 기꺼이 죽는 거다.

옛날 그 시대는 순교가 최고의 자리였다.
지금은 더 나아 왔다. 그게 지금 우리가 아는 고난을 짊어지고 오해와 왜곡과 부당함 속을 걸어가야 된다. 한번 죽고 마는 것은 쉽다.
쇼스타코비치라는 소련의 위대한 작곡가가 있어요. 소련이 그에게 공산당 이념을 옹호하는 작품을 쓰라고 해요. 그 쇼스타코비치가 거부해요. `자기는 음악인이다` 이렇게 하다가 호되게 당해요. 가족 모두가 인질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없이 공산당 찬양을 해요. 그런 작품도 쓰고,,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한 글을 누가 썼다. 거기에 이렇게 되어 있다; '공산당국가 아닌 데서 사는 사람들이 공산당을 호의적으로 평하는 것은 쉽지. 살아보지도 않았으니까.. 그는 왜 변절자가 되었는가? 한 번에 순교는 쉽지, 한 번이면 되니까.. ●그러나 그 안에서 몸부림치면서 사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그런 글을 썼다.

●예수를 믿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힘들다.
나중에 믿고 금방 죽어서 천국가는 게 제일 좋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생각을 한다.
지금이 기회이다. 연예인들은 작품에 나올 때 제일 걱정을 하는 게 뭐냐? 무슨 역을 맡았는가는 사치스러운 걱정이고, 거기에 배역이 없어지면 끝인 거다. 제일 겁내는 게 뭐냐 하면, 군대 가거나 유학을 가거나 이민을 가거나 죽으면 큰일인거다. 역에서 계속 나와야 되는 거다. 계속 나와야 작품을 한다.
우리가 그렇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하나님이 내 인생과 나를 쓰신다` 그런 자부심과 그런 책임감을 느끼고 그리고 실제로 그 일을 해야 된다. 실제로 해야 된다. 작은 만남 작은 일에서.

톰 라이트, 볼트 브루그만이 '이런 어려움을 겁을 주는데 쓰지 말고, 예수 안 믿어서 그렇다 이렇게 갖다 쓰지 마라' 그런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애통해 하고,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빌고, 속히 끝내주시기를 빌어라. 그리고 겸손하고 무릎 꿇어 하나님의 일하심과 일하는 때는 아무도 모른다. 결과가 나야 안다. 서두르지 마라`그런다.
월트 브루그만은 ●`그런 도전과 고난이 없으면 그건 가짜다` 그렇게 말하는 거다.

우리의 현실이, 각각의 정황이 어떤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싹 숨 쉴 기간을 줬다가, 적당해지면 또 도전해 오신다.
우리를 부르시고, 그러면 또 한 단계씩 올라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