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라는 성경의 증언을 따라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알고 품어야 한다. 이것이 인생이다. 고생 자체가 없어서는 안될 과정이다
nazunzaro
2020. 7. 28. 06:36
하나님이 놀라운 권세로 하려는 일들은, 예수가 보였듯 십자가 곧 죽음이라는 방식으로, 세상이 보기에는 가장 절망적이고 비극적이고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방식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흔히 신앙을 잘잘못이 전부인 윤리, 혹은 치성이나 각오의 문제로 인식한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방식도 대개 '지극함'이라는 시각에서 이해한다. 정성의 지극함, 각오의 지극함을 내세워 하나님이 태초부터 정한 예수 안에서의 구원의 완성, 창조의 완성 같은 것들을 너무 쉽게 설명한다.
그래서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의 눈물 피 노력 절망 고통을 통해 일하는 것으로, 실체화되지 못한다.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요, 예수를 보낸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 나를 보낸 하나님으로 실체화되지 않는다.
예수 안에서 일어난 일이 우리 생애 속에서 반복되어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체화되는 것을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은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다시 체험되고 확인되어 우리 삶의 결론을 만드는 것인데 말이다.
예수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한다:
'내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크다.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같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너무 쉽게 겸손, 헌신, 봉사와 같은 구호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말이 실체화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예수의 이 말을 두고두고 생각해 봐야 한다. 창조주가 피조물 속에 들어와 세상의 정황, 세상의 권력 아래 묶인다.
주인이신 분이 세상에 들어와 기꺼이 묶였다. 예수 자신이 이런 현장, 이런 세상, 이런 오해와 왜곡과 부패 속에 당신을 묶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제자들의 삶 또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도 더는 도망갈 수 없는 자리, 바로 사망이다. 사망의 자리에 들어가자 아무도 그 밖으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거기서 예수가 온 인류의 운명을 끌어 안는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을 아는 자로 특별히 부름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고난의 정황을 허락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며 정한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고난으로 어떤 유익을 얻느냐, 고난이 무엇을 맏드느냐는 이차적인 문제이다. 고난이야 말로 하나님이 정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환난은 하나님과의 화평, 하나님이 주실 영광을 바라는 즐거움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다.
●오히려 환난이야말로 예수 믿는 자에게 주어진 실감나는 정황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뒤집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지 않고 이 죄악된 세상, 하나님을 거부한 역사와 인생 속에 당신의 아들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구원이 실현되도록 우리 역시 환난 속에 밀어 넣고 있다.
환난이 무엇인지 여기서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는데 이 세상 질서와 체제는 그대로 둔 채 일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구원을 이루는 싸움을 어떤 조건 속에서 하겠다는 것인가? 사탄을 멸망시키거나 없애 버리지 않는다. '나는 네게 절하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 왔다. 너는 네 권세를 갖고 일해라.'
●이것이 예수의 방법이자, 그가 겪었으며 우리도 겪는 환난이다.
예수를 믿고 나서 보니까 가장 의아한 게 무엇인가?
내가 회개했는데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는 것이 여전히 고달프다. 그렇게 울고 감격했는데도 내 마음이 현실을 이기지 못한다. 각오가 며칠 못 간다.
하나님이 무대를, 정황을, 컨텍스트를 바꿔 주지도 않고, 우리의 실력도 바꿔 주지 않는다.
분명히 감동이 있었고 소원도 있었고 각오도 했고 결단도 했으나 나는 변한게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현실을 살라고 한다.
환난은 왜 주셨을까?
환난이 인내를 만들기 때문이다. 인내가 무엇인가? 견디는 것이다. 견디다니, 무슨 말인가?
시간이 연장된다는 뜻이다.
환난은 경험을 만든다. 즉 인내는 경험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어떤 경험을 갖게 될까? 내가 누구인가. 세상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경험을 갖게 된다.
신앙생활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펼쳐진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는 공간만 있는게 아니라 시간도 있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른데, 그 속에서 온갓 일을 겪는다.
시간 속에서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이 외면할 수 없는 우리 삶의 현실이고 진실이다. 우리는 마음대로 죽을 수조차 없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닌데 죽을 수도 없다.
기독교 신앙이 이 자리까지 밀고 내려와 깊이와 무게를 만들지 못하면 다 거짓말이 될 것이다. 실제 텍스트가, 그 내용과 무게와 깊이가 제대로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그것을 담으라고 요구하신다. 환난이 그것을 담아내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반대하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기만과 폭력과 분노의 컨텍스트 속에서 신자로 살아보라고 한다. 환장할 일이다.
자기 인생을 살아서 울고 감동하고 각오하고 샐패하고 자폭하고 원망하고 후회하는 과정을
실제로 걸어오지 않고 바깥 어느 자리에 머물러 다른 사람들만 조종하고 있으면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강하게 우리를 밀고 나가신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인내는 무엇을 만드나?
연단을 만든다. 연단이 무엇일까? 알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알게 될까? 인생이 무엇인지,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Arthur Kleinman이라는 하버드大 인류학자는 'What Really Matters'라는 책에서,
인간은 물질이나 기계가 아니고, 인간의 마음에는 관념 같은 것으로 간단히 묶을 수 없는, 고뇌하는 어떤 양심, 인격, 정신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위대한 인생을 이룩하지 못할지라도 인간이 가치를 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인생의 고통스러운 과정에서 아서 클라인만이 희망의 단서라고 끄집어낸 것들이, 신자에게는 어떻게 이해될까?
인간은 환난을 당해서 죽음과 같은 고난 앞에 서야 비로소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슨 가치가 있는가?라는 중대한 질문 앞에서 서게 된다.
이것이 연단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 일은 무엇 때문에 겪어야 합니까?' 묻는 그때 하나님이 우리로 자신의 민낯을 직면하게 하신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봐, 인간의 실력이 어디까지인가 맞닥뜨려 봐'
'인생은 하나님이 주는 것으로 채우지 않는 한, 잘 살고 못 살고의 기준이 무의미하다'라고 고백하는 자리까지 가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기까지 몰아대신다.
실수하고 안하고, 욕먹고 안먹고, 비겁하고 안하고, 잘하고 못하고를 뛰어넘어서 '인간은 왜 살아야 하나? 살아서 당하는 이 모든 일이 무엇을 만드는 것인가? 나라는 존재는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고 묻고 물어야 한다.
그렇게 묻고 물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지는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텍스트를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갈등과 버거움과 고통과 비명을 통해 우리 안에 담아 나가고 있다. 이것이 인생이다.
어떤 대가를 얻기 위해 별 수 없이 고생하는 것이 아니다. 고생 자체가 없어서는 안될 과정이 된다. 이 과정이 없으면 마치 건물 중간에 어느 층이 없는 것같이 된다.
우리 인생은 잘했고 못했고, 옳고 그르고, 유능하고 무능하고, 자랑스럽고 부끄럽고와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는 성경의 증언을 따라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알고 품어야 한다.
환난은 인간에게 질문을 한다.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서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너는 누구냐? 너는 왜 사냐? 무슨 힘으로 버티냐?'라고 묻는다
그렇게 우리의 민낯을 마주하고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왜 하시는 가를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현실을 살지 않게 된다. 현실을 살지 않고 언제나 상상속에 숨어 버린다. 하루 24시간 동안 우리가 겪는 모든 경우가 다 담겨있는 삶을 살아내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먼저 일상을 살아야 한다.
일상의 특징은 무엇인가? 잘 모르는데 사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모르는 길을 간다. 우리는 다 모르고 산다.
이런 일상을 살아야 한다. 원수를 갚지 마라. 셍사에서 정의와 평화를 만들어 내려고 하지마라. 그때까지는 악한 일들은 계속 있을 것이다. 핑계대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라.
우리는 선한 역할을 맡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자, 예수를 믿는 자,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하고 있다.
악역은 저들대로 있으라고 놔두고, 악이 세력을 갖고 있는 세상 속에서 에수 믿는 자로 존재하라.
●약삭빠른 자가 이기고 거짓말하는 자가 이기는 이 세상에서 손해보고 살아가라.
손해보고 살기란 어렵다. 그래도 우리는 이 세상을 그렇게 살아내야 한다.
●주님이 다시 오실때까지 무엇을 하라고 하나? 지금 여기서는 주의 죽으심을 따라 살라는 것이다. 죽는 길을 가라고 한다.
●악역을 미워하지 마라. 인생을 억울하게 만든 악당 메살라가 죽는다고 해서 벤허의 인생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중요하다. 누구를 제거한다고 우리의 책임이 완수되는 것이 아니다.
●악당이 악역을 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역할, 선한 역을 하고 있어야 한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 말은 선이 더 커져야 한다, 악을 감동시켜라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네 자리를 지켜라.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라는 말이다. 각각 자기 역할을 해야 한다.
그때 메살라를 죽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속이 시원했을까? 그 순간은 통쾌했을지 몰라도
벤허영화는 의도된 결말에 이르지 못하고 끝이 났을 것이다.
컨텍스트가 없으면 텍스트를 담을 수 없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도전, 이런 정황을 하나님이 다 쥐고 있다. 이 세상에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그를 죽이는 세상 권세가 있으나 하나님이 모든 운명과 모든 결론을 쥐고 있다.
반역과 사망이라는, 세상이 가진 무기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의지와 지혜와 성실하심이 우리를 붙잡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기독교 신앙의 대 전제이다.
이것을 놓치면 아무도 자기 인생을, 자기 현실을, 지금을, 납득할 수도 확인할 수도 견딜 수도 없다.
우리 각자의 인생은 그 누구의 인생보다 기가 막힌다. 그만큼이나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이루신 바로 그 승리를 지금 우리의 인생 속에 구체적이고도 성실하게 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 성경의 증언,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대전제를 기억하라.
///////
우리는 선한 역할을 맡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자, 예수를 믿는 자,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하고 있다. 악역은 저들대로 있으라고 놔두고, 악이 세력을 갖고 있는 세상 속에서 예수를 믿는 자로 존재하라.
사람들은 흔히 신앙을 잘잘못이 전부인 윤리, 혹은 치성이나 각오의 문제로 인식한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방식도 대개 '지극함'이라는 시각에서 이해한다. 정성의 지극함, 각오의 지극함을 내세워 하나님이 태초부터 정한 예수 안에서의 구원의 완성, 창조의 완성 같은 것들을 너무 쉽게 설명한다.
그래서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의 눈물 피 노력 절망 고통을 통해 일하는 것으로, 실체화되지 못한다.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요, 예수를 보낸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 나를 보낸 하나님으로 실체화되지 않는다.
예수 안에서 일어난 일이 우리 생애 속에서 반복되어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체화되는 것을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은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다시 체험되고 확인되어 우리 삶의 결론을 만드는 것인데 말이다.
예수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한다:
'내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크다.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같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너무 쉽게 겸손, 헌신, 봉사와 같은 구호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말이 실체화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예수의 이 말을 두고두고 생각해 봐야 한다. 창조주가 피조물 속에 들어와 세상의 정황, 세상의 권력 아래 묶인다.
주인이신 분이 세상에 들어와 기꺼이 묶였다. 예수 자신이 이런 현장, 이런 세상, 이런 오해와 왜곡과 부패 속에 당신을 묶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제자들의 삶 또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도 더는 도망갈 수 없는 자리, 바로 사망이다. 사망의 자리에 들어가자 아무도 그 밖으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거기서 예수가 온 인류의 운명을 끌어 안는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을 아는 자로 특별히 부름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고난의 정황을 허락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며 정한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고난으로 어떤 유익을 얻느냐, 고난이 무엇을 맏드느냐는 이차적인 문제이다. 고난이야 말로 하나님이 정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환난은 하나님과의 화평, 하나님이 주실 영광을 바라는 즐거움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다.
●오히려 환난이야말로 예수 믿는 자에게 주어진 실감나는 정황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뒤집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지 않고 이 죄악된 세상, 하나님을 거부한 역사와 인생 속에 당신의 아들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구원이 실현되도록 우리 역시 환난 속에 밀어 넣고 있다.
환난이 무엇인지 여기서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는데 이 세상 질서와 체제는 그대로 둔 채 일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구원을 이루는 싸움을 어떤 조건 속에서 하겠다는 것인가? 사탄을 멸망시키거나 없애 버리지 않는다. '나는 네게 절하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 왔다. 너는 네 권세를 갖고 일해라.'
●이것이 예수의 방법이자, 그가 겪었으며 우리도 겪는 환난이다.
예수를 믿고 나서 보니까 가장 의아한 게 무엇인가?
내가 회개했는데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는 것이 여전히 고달프다. 그렇게 울고 감격했는데도 내 마음이 현실을 이기지 못한다. 각오가 며칠 못 간다.
하나님이 무대를, 정황을, 컨텍스트를 바꿔 주지도 않고, 우리의 실력도 바꿔 주지 않는다.
분명히 감동이 있었고 소원도 있었고 각오도 했고 결단도 했으나 나는 변한게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현실을 살라고 한다.
환난은 왜 주셨을까?
환난이 인내를 만들기 때문이다. 인내가 무엇인가? 견디는 것이다. 견디다니, 무슨 말인가?
시간이 연장된다는 뜻이다.
환난은 경험을 만든다. 즉 인내는 경험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어떤 경험을 갖게 될까? 내가 누구인가. 세상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경험을 갖게 된다.
신앙생활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펼쳐진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는 공간만 있는게 아니라 시간도 있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른데, 그 속에서 온갓 일을 겪는다.
시간 속에서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이 외면할 수 없는 우리 삶의 현실이고 진실이다. 우리는 마음대로 죽을 수조차 없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닌데 죽을 수도 없다.
기독교 신앙이 이 자리까지 밀고 내려와 깊이와 무게를 만들지 못하면 다 거짓말이 될 것이다. 실제 텍스트가, 그 내용과 무게와 깊이가 제대로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그것을 담으라고 요구하신다. 환난이 그것을 담아내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반대하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기만과 폭력과 분노의 컨텍스트 속에서 신자로 살아보라고 한다. 환장할 일이다.
자기 인생을 살아서 울고 감동하고 각오하고 샐패하고 자폭하고 원망하고 후회하는 과정을
실제로 걸어오지 않고 바깥 어느 자리에 머물러 다른 사람들만 조종하고 있으면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강하게 우리를 밀고 나가신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인내는 무엇을 만드나?
연단을 만든다. 연단이 무엇일까? 알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알게 될까? 인생이 무엇인지,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Arthur Kleinman이라는 하버드大 인류학자는 'What Really Matters'라는 책에서,
인간은 물질이나 기계가 아니고, 인간의 마음에는 관념 같은 것으로 간단히 묶을 수 없는, 고뇌하는 어떤 양심, 인격, 정신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위대한 인생을 이룩하지 못할지라도 인간이 가치를 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인생의 고통스러운 과정에서 아서 클라인만이 희망의 단서라고 끄집어낸 것들이, 신자에게는 어떻게 이해될까?
인간은 환난을 당해서 죽음과 같은 고난 앞에 서야 비로소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슨 가치가 있는가?라는 중대한 질문 앞에서 서게 된다.
이것이 연단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 일은 무엇 때문에 겪어야 합니까?' 묻는 그때 하나님이 우리로 자신의 민낯을 직면하게 하신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봐, 인간의 실력이 어디까지인가 맞닥뜨려 봐'
'인생은 하나님이 주는 것으로 채우지 않는 한, 잘 살고 못 살고의 기준이 무의미하다'라고 고백하는 자리까지 가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기까지 몰아대신다.
실수하고 안하고, 욕먹고 안먹고, 비겁하고 안하고, 잘하고 못하고를 뛰어넘어서 '인간은 왜 살아야 하나? 살아서 당하는 이 모든 일이 무엇을 만드는 것인가? 나라는 존재는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고 묻고 물어야 한다.
그렇게 묻고 물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지는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텍스트를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갈등과 버거움과 고통과 비명을 통해 우리 안에 담아 나가고 있다. 이것이 인생이다.
어떤 대가를 얻기 위해 별 수 없이 고생하는 것이 아니다. 고생 자체가 없어서는 안될 과정이 된다. 이 과정이 없으면 마치 건물 중간에 어느 층이 없는 것같이 된다.
우리 인생은 잘했고 못했고, 옳고 그르고, 유능하고 무능하고, 자랑스럽고 부끄럽고와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는 성경의 증언을 따라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알고 품어야 한다.
환난은 인간에게 질문을 한다.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서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너는 누구냐? 너는 왜 사냐? 무슨 힘으로 버티냐?'라고 묻는다
그렇게 우리의 민낯을 마주하고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왜 하시는 가를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현실을 살지 않게 된다. 현실을 살지 않고 언제나 상상속에 숨어 버린다. 하루 24시간 동안 우리가 겪는 모든 경우가 다 담겨있는 삶을 살아내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먼저 일상을 살아야 한다.
일상의 특징은 무엇인가? 잘 모르는데 사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모르는 길을 간다. 우리는 다 모르고 산다.
이런 일상을 살아야 한다. 원수를 갚지 마라. 셍사에서 정의와 평화를 만들어 내려고 하지마라. 그때까지는 악한 일들은 계속 있을 것이다. 핑계대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라.
우리는 선한 역할을 맡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자, 예수를 믿는 자,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하고 있다.
악역은 저들대로 있으라고 놔두고, 악이 세력을 갖고 있는 세상 속에서 에수 믿는 자로 존재하라.
●약삭빠른 자가 이기고 거짓말하는 자가 이기는 이 세상에서 손해보고 살아가라.
손해보고 살기란 어렵다. 그래도 우리는 이 세상을 그렇게 살아내야 한다.
●주님이 다시 오실때까지 무엇을 하라고 하나? 지금 여기서는 주의 죽으심을 따라 살라는 것이다. 죽는 길을 가라고 한다.
●악역을 미워하지 마라. 인생을 억울하게 만든 악당 메살라가 죽는다고 해서 벤허의 인생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중요하다. 누구를 제거한다고 우리의 책임이 완수되는 것이 아니다.
●악당이 악역을 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역할, 선한 역을 하고 있어야 한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 말은 선이 더 커져야 한다, 악을 감동시켜라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네 자리를 지켜라.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라는 말이다. 각각 자기 역할을 해야 한다.
그때 메살라를 죽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속이 시원했을까? 그 순간은 통쾌했을지 몰라도
벤허영화는 의도된 결말에 이르지 못하고 끝이 났을 것이다.
컨텍스트가 없으면 텍스트를 담을 수 없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도전, 이런 정황을 하나님이 다 쥐고 있다. 이 세상에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그를 죽이는 세상 권세가 있으나 하나님이 모든 운명과 모든 결론을 쥐고 있다.
반역과 사망이라는, 세상이 가진 무기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의지와 지혜와 성실하심이 우리를 붙잡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기독교 신앙의 대 전제이다.
이것을 놓치면 아무도 자기 인생을, 자기 현실을, 지금을, 납득할 수도 확인할 수도 견딜 수도 없다.
우리 각자의 인생은 그 누구의 인생보다 기가 막힌다. 그만큼이나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이루신 바로 그 승리를 지금 우리의 인생 속에 구체적이고도 성실하게 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 성경의 증언,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대전제를 기억하라.
///////
우리는 선한 역할을 맡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자, 예수를 믿는 자,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하고 있다. 악역은 저들대로 있으라고 놔두고, 악이 세력을 갖고 있는 세상 속에서 예수를 믿는 자로 존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