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고난은 필수다. 적대적 상황 자리에 들어가야 되니까. 그 고난속에서 뭘하는가? 하나님의 자비 긍휼 용서 기적을 이루는 그뜻에 순종하여 죽으라. 하루하루 세상의 거짓된 위협과 싸우라.
nazunzaro
2020. 6. 28. 21:52
고난은 필수적인 것이다. 고난의 자리, 적대적 상황, 자리에 뛰어들어가야 되는 것이니까. 고난은 당연한 것이다.
그 고난 속에서 무얼 하는건가?
하나님의 자비 긍휼 용서 기적을 이루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속에서 죽는거다.
예수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인생이다.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인가, 세상의 거짓된 위협에 굴복할 것인가? 이것이 하루하루이다.
//////
바울의 사역을 보면, 또 사도행전의 저자가 보는 바울의 행적을, 또는 기독교의 전파를 보면, 기독교 신앙을 어떤 자기 성취의 어떤 여건로 삼고있지 않는 것을 그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예수를 믿으면 무슨 행복해 지거나 무슨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바울에게서 보듯이, 또는 여러분의 실제적인 신앙생활에서 보듯이, 예수를 믿어서 문제가 풀리는게 아니라, 모두에게 있어서 예수를 만나서 문제가 생긴다. 그걸 벗어버릴 수가 없다.
사도바울은 이 고난의 인생에 대하여 그것이 자신의 신앙이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어느 시대나 교회에서는 교회사 내내 예수를 믿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는데, 그 때 말하는 모든 문제는 긍극적인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그 하나님의 목적과 연결되어 있지, 고단한 현실에 대해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 약속은 없다.
빌립보서 3장에 가면 사도바울의 복음, 신앙 이해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 < 죽은 자 가운데서 >가 현실이다. 믿음의 시작이며, 믿음의 여정이다.
예수께서 < 고난을 받고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야 한다, 고난을 필수다 >라고 얘기하신다.
실제로 성경에 예언된 모든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은 고난의 종으로 메시야를 그리고 있다.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이런 죄악된 세상 속에서는 인간의 참된 권리와 명예를 외면하는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그게 고난이다.
예수께서 오셨으나, 세상이 가졌던 힘, 하나님을 거부하는 힘으로 예수를 배척하고 저들이 가진 힘으로 그를 억압했다. 죽였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권세에 정면으로 대항한다. 모르고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만이 가지시는 우리를 향한 뜻, 이런 것과 무관한, 뭐가 뭔지 모르는 오직 욕심에 휘둘린 죄악된 인생길을 걷는 그 세상의 포악이 역사 내내 하나님의 뜻에 반대와 불순종과 그 무지로 얼룩지고 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맨처음 해야했던 일은 무엇이었냐 하면, 이 두 길, 하나님을 거역하는 권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하는 순종 사이에서, 당신의 사역을, 신분을, 자리를, 책임을, 공포하셔야 했다
이 세상에서 사단이 왕인 것이다.
계속적으로 무엇이라고 시험을 하나?
하나님을 찾지말라는 것이다.
' 내가 줄 수 있는 것 나 한테 요구하면 내가 다 채워줄 것이라, 하나님은 찾지 말라 '
결론이 난다 '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길지니라 '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다.
그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선택이냐 하면 고난으로 묘사하는 거다. 왜?
아담의 선택은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다.
아무런 위협도 아무런 어려움도 없는 곳에서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 일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거역한 시대, 거역한 인류, 거역한 바로 그자리에 그 아들을 보내사, 어떻게 할지 아직 결정이 되지 않은 상태가 아닌, 거역한 세상, 거역한 이 인류 앞에 그를 보냄으로써 위협과 반대와 거부와 왜곡과 무지 속에서 하나님 편을 들어, 이 죄악된 세상, 하나님을 거절한 이 인류의 한복판, 죽음의 자리에서 새로운 반전을 이루시는 거다. 그러니 고난이다.
누구를 구하러 오시는 건가?
반대하는 자들을 구하러, 반대하는 자들에게 와서 그 반대가 어디까지였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까지의 반대의 자리에 와, 그들을 구원해야 하는 순종으로 인하여, 세상의 반대와 하나님이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를 보내신 하나님 순종의 길이 맞물려, 우리가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십자가 구원이라는 걸 만드는 것이다.
복음이 어디서 누구를 위하여 만들어졌는지를 아는 것이다. 적국에 들어가야 되고,
적군 속에 들어가 내가 누구인지를 밝혀,
그들의 칼을 받고, 그들의 총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고난은 필수적인 것이다 고난의 자리에 들어가야 되니까, 적대적 상황, 자리에 뛰어들어가야 되는 것이니까, 고난은 당연한 것이다.
●그 고난 속에서 무얼 하는 건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용서와 기적을 이루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속에서 죽는거다.
예수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인생이다.
여러분의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인가, 세상의 거짓된 위협에 굴복할 것인가?
이것이 하루하루이다. 하루하루.
거의 늘 실패한다. '거의' 자는 저를 위해서 붙인 거다. 여러분은 그냥 무조건 실패한다. ㅎ
그 실패 속에서 무슨 희망이 있는 거냐?
하나님이 여러분을 놓지않고 있다는 것 여러분이 안다. 안그런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고백한 신앙고백이 무엇인지, 그게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데 오래 걸린다
처음에는 세상과 하나님의 그 사이를 전혀 모른다. 세상이 다 안다.
주일날 교회오면 신자이고
예배보고 나가면 세상사람이고.. 아무런 갈등도 아무런 차이도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다.
조금씩 알게 된다. 왜냐하면 세상이 거짓되기 때문에 알기 시작한다.
'이 친구들, 이 웬수들은 늘 속이는구나.. 늘 속이는구나..
세상에서의 성공은 성공이 아니구나..' 라고 자꾸 알게 된다.
그래서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과 성경의 약속의 값이 무엇인가를 하나씩 새삼스럽게 배우게 된다.
언제쯤 용감해 질까?
육십은 넘어야 된다.ㅎ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깊이가 너무 커서 그렇게 쉽사리 이겨내지 못한다.
어느 한 가지 명분이나 어떤 하나의 사명에서 승리하는 적은 있지만,
자기 자신의 존재와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기를 이렇게 맡기는 데에는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것이 사도행전 28장이 하고 싶은 결론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완성, 완벽함을 무엇으로 설명하나?
'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
고난은 어떤 의미라고?
자리. 어떤 자리? 우리가 있는 자리. 반역하고 도망간 자리.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자리에 찾아오셔서, 거기서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아버지의 일하심, 용서, 끌어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그는 우리 모두의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면 잡아주겠다 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도망간 우리들을 좇아들어와 죽음의 자리에 앉은 우리에게 부활의 문을 열어 끌고 들어가는 것, 그게 구원이다.
뭐가 고난이라고?
우리의 실상,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고난을 야기시킬 수 밖에 없는 곳이다.
거기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예수 안에서 받아, 예수께서 열어놓은 부활의 길로 들어서는 일이,
예수로 인하여 우리를 붙잡아, 매일매일 하나님이 부활의 길로 우리를 넘기시며 붙들어 부활의 완성으로 인도하시는 줄 아는 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이다.
복음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과 승리이다.
그게 복음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가 가지는, < 예수가 누구신가? >를 아는 그 고백이 여러분의 인생에 작용해야 한다.
이 나라와 이 땅과 이 시대, 우리민족, 그런 것 갖다 붙이지 말고, 여러분이 우선 먼저 잘 살으라.
체념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잘난 것으로 확인할려고 그러지 말고, 병신같이 잘 살으라.
예수 믿는 그 기쁨과 자랑이 그 당사자에게 있지 않는다면 힘을 쓸 다른 방법이 없다
무슨 길로 가든지, 어떤 형편에 처했든지,
주와 함께 하는 줄 아는 깊은 믿음과 순종으로,
우리가 서 있고, 보내졌고, 맡았고, 품은
우리 믿음의 주인이시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리와 인생을 충성으로 바치는 귀한 일들이 일어나,
예수를 믿는다는 축복과 영광이
우리를 지켜보는 이 세상과 저 어두움과 저 거스르는 세대 속에
빛을 발하고, 거기에 반전이 있고, 용서가 있고 구원이 있다
(다보행39)
그 고난 속에서 무얼 하는건가?
하나님의 자비 긍휼 용서 기적을 이루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속에서 죽는거다.
예수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인생이다.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인가, 세상의 거짓된 위협에 굴복할 것인가? 이것이 하루하루이다.
//////
바울의 사역을 보면, 또 사도행전의 저자가 보는 바울의 행적을, 또는 기독교의 전파를 보면, 기독교 신앙을 어떤 자기 성취의 어떤 여건로 삼고있지 않는 것을 그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예수를 믿으면 무슨 행복해 지거나 무슨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바울에게서 보듯이, 또는 여러분의 실제적인 신앙생활에서 보듯이, 예수를 믿어서 문제가 풀리는게 아니라, 모두에게 있어서 예수를 만나서 문제가 생긴다. 그걸 벗어버릴 수가 없다.
사도바울은 이 고난의 인생에 대하여 그것이 자신의 신앙이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어느 시대나 교회에서는 교회사 내내 예수를 믿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는데, 그 때 말하는 모든 문제는 긍극적인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그 하나님의 목적과 연결되어 있지, 고단한 현실에 대해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 약속은 없다.
빌립보서 3장에 가면 사도바울의 복음, 신앙 이해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 < 죽은 자 가운데서 >가 현실이다. 믿음의 시작이며, 믿음의 여정이다.
예수께서 < 고난을 받고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야 한다, 고난을 필수다 >라고 얘기하신다.
실제로 성경에 예언된 모든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은 고난의 종으로 메시야를 그리고 있다.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이런 죄악된 세상 속에서는 인간의 참된 권리와 명예를 외면하는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그게 고난이다.
예수께서 오셨으나, 세상이 가졌던 힘, 하나님을 거부하는 힘으로 예수를 배척하고 저들이 가진 힘으로 그를 억압했다. 죽였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권세에 정면으로 대항한다. 모르고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만이 가지시는 우리를 향한 뜻, 이런 것과 무관한, 뭐가 뭔지 모르는 오직 욕심에 휘둘린 죄악된 인생길을 걷는 그 세상의 포악이 역사 내내 하나님의 뜻에 반대와 불순종과 그 무지로 얼룩지고 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맨처음 해야했던 일은 무엇이었냐 하면, 이 두 길, 하나님을 거역하는 권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하는 순종 사이에서, 당신의 사역을, 신분을, 자리를, 책임을, 공포하셔야 했다
이 세상에서 사단이 왕인 것이다.
계속적으로 무엇이라고 시험을 하나?
하나님을 찾지말라는 것이다.
' 내가 줄 수 있는 것 나 한테 요구하면 내가 다 채워줄 것이라, 하나님은 찾지 말라 '
결론이 난다 '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길지니라 '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다.
그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선택이냐 하면 고난으로 묘사하는 거다. 왜?
아담의 선택은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다.
아무런 위협도 아무런 어려움도 없는 곳에서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 일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거역한 시대, 거역한 인류, 거역한 바로 그자리에 그 아들을 보내사, 어떻게 할지 아직 결정이 되지 않은 상태가 아닌, 거역한 세상, 거역한 이 인류 앞에 그를 보냄으로써 위협과 반대와 거부와 왜곡과 무지 속에서 하나님 편을 들어, 이 죄악된 세상, 하나님을 거절한 이 인류의 한복판, 죽음의 자리에서 새로운 반전을 이루시는 거다. 그러니 고난이다.
누구를 구하러 오시는 건가?
반대하는 자들을 구하러, 반대하는 자들에게 와서 그 반대가 어디까지였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까지의 반대의 자리에 와, 그들을 구원해야 하는 순종으로 인하여, 세상의 반대와 하나님이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를 보내신 하나님 순종의 길이 맞물려, 우리가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십자가 구원이라는 걸 만드는 것이다.
복음이 어디서 누구를 위하여 만들어졌는지를 아는 것이다. 적국에 들어가야 되고,
적군 속에 들어가 내가 누구인지를 밝혀,
그들의 칼을 받고, 그들의 총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고난은 필수적인 것이다 고난의 자리에 들어가야 되니까, 적대적 상황, 자리에 뛰어들어가야 되는 것이니까, 고난은 당연한 것이다.
●그 고난 속에서 무얼 하는 건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용서와 기적을 이루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속에서 죽는거다.
예수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인생이다.
여러분의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인가, 세상의 거짓된 위협에 굴복할 것인가?
이것이 하루하루이다. 하루하루.
거의 늘 실패한다. '거의' 자는 저를 위해서 붙인 거다. 여러분은 그냥 무조건 실패한다. ㅎ
그 실패 속에서 무슨 희망이 있는 거냐?
하나님이 여러분을 놓지않고 있다는 것 여러분이 안다. 안그런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고백한 신앙고백이 무엇인지, 그게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데 오래 걸린다
처음에는 세상과 하나님의 그 사이를 전혀 모른다. 세상이 다 안다.
주일날 교회오면 신자이고
예배보고 나가면 세상사람이고.. 아무런 갈등도 아무런 차이도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다.
조금씩 알게 된다. 왜냐하면 세상이 거짓되기 때문에 알기 시작한다.
'이 친구들, 이 웬수들은 늘 속이는구나.. 늘 속이는구나..
세상에서의 성공은 성공이 아니구나..' 라고 자꾸 알게 된다.
그래서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과 성경의 약속의 값이 무엇인가를 하나씩 새삼스럽게 배우게 된다.
언제쯤 용감해 질까?
육십은 넘어야 된다.ㅎ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깊이가 너무 커서 그렇게 쉽사리 이겨내지 못한다.
어느 한 가지 명분이나 어떤 하나의 사명에서 승리하는 적은 있지만,
자기 자신의 존재와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기를 이렇게 맡기는 데에는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것이 사도행전 28장이 하고 싶은 결론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완성, 완벽함을 무엇으로 설명하나?
'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
고난은 어떤 의미라고?
자리. 어떤 자리? 우리가 있는 자리. 반역하고 도망간 자리.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자리에 찾아오셔서, 거기서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아버지의 일하심, 용서, 끌어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그는 우리 모두의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면 잡아주겠다 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도망간 우리들을 좇아들어와 죽음의 자리에 앉은 우리에게 부활의 문을 열어 끌고 들어가는 것, 그게 구원이다.
뭐가 고난이라고?
우리의 실상,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고난을 야기시킬 수 밖에 없는 곳이다.
거기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예수 안에서 받아, 예수께서 열어놓은 부활의 길로 들어서는 일이,
예수로 인하여 우리를 붙잡아, 매일매일 하나님이 부활의 길로 우리를 넘기시며 붙들어 부활의 완성으로 인도하시는 줄 아는 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이다.
복음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과 승리이다.
그게 복음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가 가지는, < 예수가 누구신가? >를 아는 그 고백이 여러분의 인생에 작용해야 한다.
이 나라와 이 땅과 이 시대, 우리민족, 그런 것 갖다 붙이지 말고, 여러분이 우선 먼저 잘 살으라.
체념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잘난 것으로 확인할려고 그러지 말고, 병신같이 잘 살으라.
예수 믿는 그 기쁨과 자랑이 그 당사자에게 있지 않는다면 힘을 쓸 다른 방법이 없다
무슨 길로 가든지, 어떤 형편에 처했든지,
주와 함께 하는 줄 아는 깊은 믿음과 순종으로,
우리가 서 있고, 보내졌고, 맡았고, 품은
우리 믿음의 주인이시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리와 인생을 충성으로 바치는 귀한 일들이 일어나,
예수를 믿는다는 축복과 영광이
우리를 지켜보는 이 세상과 저 어두움과 저 거스르는 세대 속에
빛을 발하고, 거기에 반전이 있고, 용서가 있고 구원이 있다
(다보행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