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나'라는 보잘 것 없는 존재, 실존, 자리가 하나님 은혜 넘치는, 기적의 하나님이 일하시는 자리이다. 십자가만 자랑하겠다는 건 '나 이제 억울할 수 있다' 그런 얘기이다

nazunzaro 2020. 6. 22. 22:21
죄의 분명한 현상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이 최선을 다해서 하는 모든 가장 고급한 가치들, 어떤 대의, 어떤 헌신, 어떤 희생, 어떤 진심이라도,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이 해 주시는 것이 아닌 것으로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에게 각각 자존심이 있지마는 우리 대부분은 각각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하나 더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사실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 아무것도 없는 자를 불러 하나님이 당신이 하시는 일을 자랑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그 아무 것도 아닌 건 굉장히 센 거다. 그렇지 않은가?

이 아무 것도 아닌 자를 세운 이유가 뭐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
내가 해서 종교를 확보하고 그 내용을 가짐으로써 그렇지 않은 자와 나를 차별화 할 실력이 없는 자들이다,를 확인하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은혜 안에 있는 것과 자랑 안에 있는 두 세계가 결코 타협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십자가를 건너지 않고는 세상은 진리와 생명에 대하여 알 도리가 없다. 그건 죽어야 넘어오는 자리이다.
그러니까 이쪽 은혜를 입은 자들이 세상에 나갈 때는 십자가 없이 설명을 해서 자기 자신의 내용을 증거할 다른 어떤 수단도 가지지 못했다, 그 뜻이다.

십자가란 뭐냐? 세상이 '거짓이다' 해서 죽인,
그것은 '진리도 아니고 당신은 메시아도 아니고 하나님은 없다' 라고 세상이 내린 판결 그게 십자가이다.
●그길로 나가야 된다. 그러니까 십자가만 자랑하겠다는 건, '나 이제 억울할 수 있다' 그런 얘기이다.

억울할 수 있다가 뭐냐? 억울할 수 밖에 없다..
자랑할 것이 있는데, 먹히지 않으면 생기는 억울함이 우리는 다 이해하는 억울함이다.
은혜 안에 들어오면, 그 억울함은 예수 안에서 다 해결돼 버렸다.
●그 억울함으로 하나님이 부활을 만들어 냈으니, 우리는 억울함을 사람들한테 풀거나 사람들한테 해결을 요구하거나 그 댓가를 요구할 필요없이, 십자가 안에서 짊어지는 거다.

은혜를 구한다는 것은, 우리의 억울함은 예수 안에서 얼마든지 보상을 받았다,라는 만족과 속깊은 자랑으로써의 신자의 자세이며 내용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갈라디사서 6장에 나오는 '나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라는 말을 이해할 할 도리가 없다.

빌립이 왜 예수님 보고 아버지를 보여달라 그랬겠나? 예수님 갖고는 모자랐거든.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는 큰 힘과 영광의 존재인데, 예수님은 너무 평범하잖은가. 평범 이하잖은가. 아무런 권력도 아무런 힘도 없고, 그래서 불만이다.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다고? '내가 이렇게 너희와 오래 있었는데..' 
굉장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우리의 형편에 동참해서 동거동락하시며 어려움을 함께 감수하고 짐을 나누고 계시는데, 아버지를 아직도 못 봤냐? 그러는 거다.

예수 믿는다는 게 뭐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으로 우리의 시대를 살아야 된다.
하나님이 이렇게 오래도록 모두에게 베푸시는 구원을 위하여 우리를 보내 살게 했다.
그러니 같이 고생하고 거기서 살으라.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는데? 빌립에게 한 이 대답을 하셨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 아직도 아버지를 못 봤단 말이냐?' 그 답을 갖고 다니셔야 된다.
상대방이 언제 알아볼 지 모르는 거다. 그 가장 중요한 일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 다 된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예수의 이름만 붙이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무서운 이름이다. 그는 육신으로 오시고, 고난 받으시고, 외면 받으시고, 수모 겪으시고, 폭력에 의하여 죽음의 자리에 가 그 가장 치욕스러운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할려면, 그 억울함을 넘어서지 않고는 기도할 수 없는 거다.
주님의 죽으심을 믿고 감사하고 그 길로만 모든 결정을 모든 행보를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라는 조건 하에서만 기도가 가능하다 그러는 것이다.
 
우리가 믿은 예수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구체화 하셨듯이,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지와 그의 전능하신 능력이 우리 각자라는 한 존재와 생애 속에 동참하고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쉬운 것으로 확인할려고 그러지 말라. 남보다 잘 된 것으로 확인하는 기독교는 없다. 예수라는 이름으로 말미암는 것만 있다. 그 안에는 모든 것이 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의와 진리와 능력과 자랑과 기적이 되었다.
우리가 사는 우리라는 보잘 것 없는 존재와 실존이, 기적의 자리, 은혜가 넘치는 자리, 하나님이 일하시는 자리가 되었다.
그것이 바울의 이 마지막 여정이다.
억울해 하지 않으며 얻어 맞고 욕먹고 붙잡혀 로마로 간다.
우리 모두의 생애가 동일한 하나님이 일하시는, 기적의 손길인 것을 기억하는 명예와 믿음과 순종과 진정한 자랑이 있기를 바란다.
 
(기도)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동거동락하시며 동행하시며 붙들고 계시고 이기게 하신다는 사실 앞에 감사드린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답하신 것같이, 우리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인생살아야 한다.

(*다보행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