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예수를 믿으면 무엇이 주어지는가? 기적, 기사, 표적,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다

nazunzaro 2020. 6. 15. 15:36
성경이 얘기하는 것은 그런 일을 행한 자가 누구냐? 그 기적이 무슨 증거냐? 이렇게 묻는 거다. `예수가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 그가 누구이기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나는가를 봐라` 이게 표적이다.
그러니 사도행전에서도 계속 계속 사도들이 행한 모든 기적들은 표적과 기사로 되어있다. 기적, 기사.
그런데 그 표적, 예수로 인하여 결과된 중요한 내용의 증거로 그 기적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니까 이 표적은 다 뭐라고?
이들이 전하는 것이 어떻게 신적인 것인가?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그의 뜻을 이루시는 그 증언이며, 실체며, 얼마나 구체적인 약속들인가에 증거들로써 이 기적들이 주어지고 있지, 기적이 목적인 것은 아니다 이 얘기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오라`이다.
그러니까 우리 유대인들에게 얘기할 때는 하나님을 알고는 있지만,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에 대하여 아직도 분명치 않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예수로 말미암은 그의 약속의 진실성, 구체성이 드러났다.
그게 뭔가?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 보고 당신의 자녀로 우리를 부르시고 있다고 예수로 그 증거로 삼으신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른다는 걸 다른 이름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죄사함을 받았다` 이러는 것이다.

오늘 본문 식으로 얘기하면, 하나님 모르고 딴 데가서 절하지 말고, 다른 것으로 힘을 삼지 말고, 다른 것으로 소원을 삼지 말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그의 뜻에 순종하며, 그의 축복 속에 살아야 한다 이 얘기다.
그것을 우리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는 기본 위에서 이제 더 분명하게 예수를 믿는다는 뜻을 확인해야 한다.

예수는 화목제물로 오신다. 우리 다 아는 이야기이다.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사 하나님의 희생양이 되신다. 우리 다 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을 가장 중심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게 뭐냐는 건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다.
도덕적인 죄를 씻는 것이거나 종교적인 죄를 씻는 것이거나 어떤 소원을 이루는 어떤 수단과 특권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하나님 외면하고 살던 자리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오라는 이야기이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게 구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 우리의 영광의 찬송은 누구인가? 우리 자식이다. 모든 부모가 아는 사실이다. 자식과 경쟁하는 부모는 없다. 안 그런가? 자식이 잘 되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은 부모에게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려고 그 아들을 보내셨는데, 그 아들을 뭘로 보냈다고? 속량으로, 속죄제물로 보내신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꾸 무얼 잘못을 씻는 것, 잘못을 고치는 것이라는 도덕적 종교적 어떤 죄책감으로만 이 문제를 끌고 가는데, 그것이 도덕성, 윤리성, 종교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관계에 관한 것이라니까.
하나님과 어긋난 우리를 하나님이 그의 아들로 다시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내 얘기한 것같이,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지라` 그 약속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게 예수를 믿는다는 뜻이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 안에서 통일된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과 역사의 일부분으로써 그러나 그 중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써,
그걸 믿으면 나머지가 잘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큰 테두리이고, 우리가 말하는 무슨, 제일 많이 나오는 경제, 건강, 정치, 무슨 이런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성이 제일 큰 틀이고, 그 안에 행복, 만족, 안심, 무슨 가치, 성취, 자랑은 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게 밖에 있고, 예수 믿는 것이 그 안에 들어가 있어서, 모두가 추구하는 어떤 안심과 만족을 우리는 예수를 믿어서 세상 사람들은 가지지 못하는 어떤 특권을 가지는 사람에 불과한 식으로 기독교를 자꾸 축소시키고 폄하한다. 그렇지 않다.

(>>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소원 안심 형통 안전 행복 평안 복락 기쁨을 얻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관계, 그 지위 자리를 구하고 누리는 거다. 그 자리는 예수처럼 모든 고난 정황 여건을 감수하고 사랑 관용 인내로 견디는 자리다. 이게 기독교 신앙이다)

이 얘기가 미친 말 같으니까 이것 찾아봐야 된다. 고린도후서 5장13절;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 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5:13-19)

이게 무슨 말인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든 것의 관건이다. 정신이 정상인가? 지능이 정상인가?를 알아볼 때, 목욕탕에 수도꼭지를 틀어서 방에 물이 넘쳐나게 한단다. 그 방에 들어가서 물을 치우라고 하면, 정상인 사람은 당연히 수도꼭지를 잠근단다. 비정상이면 물을 퍼 낸단다. 금방 알아들을거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자꾸 뭐라 그러느냐 하면, "펌프를 주세요" "물 위의 방수침대보를 주셔서 물침대로 쓰게 해 주세요" 우린 그렇게 써 먹는다 말이다. 수도꼭지를 잠근다는 사실을 모른다.
예수께서 뭘 하셨는 지를 모른다. 세상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불의를 처단하는 수 밖에는 없다. 물을 퍼낸다.
도덕을 자기증명을 위하여 쓰지, 상대방을 용서하는데 도덕은 힘을 쓰지 못한다.
그건 용서하는 힘이 안 되고, 고치는 힘이 되지 않는다. 교육을 하면 사람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다. 교육을 했더니, 약삭 빨라졌다. 그건 역사가 증명하는 진실이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짐으로 생긴 것이다.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을 이어받을 수 없게 되자, 세상은 죄가 들어와 버렸다. 생명과 거룩함과 복된 것을 받을 그 관계가 깨어졌다. 상하는 것과 해하는 것이 들어왔다.

●그러면 무엇을 고쳐야 되는 건가? 관계를 정상화해야 된다. 살인을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어 생명이 흘러넘쳐야 되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고통은 무엇으로 오나?
내 자리를 만들려면, 누구를 밀어내야 내 자리가 생긴다는 사실 아닌가?
하나님의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자, 그 아들을 죽여버릴 수 밖에 없었던, 가장 잘 믿는다는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의를 증명하기 위하여 예수를 죽여서 밖에는 자신들의 의를 증명하는 다른 어떤 방법을 갖지 못했는데, 하나님은 그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없는 자리, 망한 자리, 저주받은 자리에 부활생명을 만들어 내신다
둘의 차이가 금방 보이지 않는가?
준 것 갖고 서로 싸워 모두 죽이는 땅에, 우리가 죽인 무덤에 꽃피운 부활생명과 영생이라는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것이며, 우리에게 약속한 것에의 실제적 증거다. 역사적 증거이다. 그것이 예수다.

고린도전서 1장에는 모든 것을 이렇게 함축하여 결론을 내고 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무슨 뜻이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관계란 그런 것이 아니다. 관계란 다른 것이다.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이 안에서는 누가 더 유능하냐, 누가 더 똑똑하냐의 싸움이 아니고,
30절;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가 우리의 모든 것이다.

예수가 모든 것이라는 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오신 분, 죽음 위에, 사망 위에 부활생명을 만들어 내시는 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르시고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 하나님의 회복,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의 지극하심의 실체적 증거다. 그 예수 안에 모든 것이 있는 거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거든. 자녀는 무시무시한 거다. 케네디 대통령이 회의를 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면서 뛰어들어 오는 건, 애들 뿐이란다. 다 웃는 단다. 누가 거기다 대고 인상을 쓰겠나? 생각을 해 보라.

부모와 자식이라는 거는 그건 무슨 권력도 무슨 무슨 조건도 다른 무엇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특권이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있는 자녀와 뭘 그 사양하고 아끼는 것은 없다. 로마서 식으로 얘기하면, `그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어찌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 이 말이 그래서 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놓친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크기를 모르니까 예수를 들먹여 뭘 달라 그런다. 뭘 달라 그러나? 도덕성을 달라 그런다. 죄책감을 없애게 해달라는 거다.
죄책감을 없애는 게 기독교의 전부가 아니다.
성공을 달라고 그런다. 예수와 성공을 바꿔 달라고 그러고, 예수로 안심을 하게 해 달라고 그러고, 예수로 자존심을 지키게 해 달라고 그러고, 예수로 고개 숙이지 않게 해 달라고 그런다.
그렇게 시작은 할 수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게 뭔지, 하나님이 예수를 보냈다는 게 뭔지를 아는 일에 우리는 실존적인 문제를 갖고 부딪힐 수 밖에 없을 거다. 아파서, 억울해서, 괴로워서 문을 두드리기 시작을 해서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가 누군지 배울 것이다.
그러다 배우면 우리가 달라는 것의 더 근본적이고 더 크고 비교할 수 없는 큰 하나님의 부르심과 만나는 것이다.

●`여러분 형제들이여 이 일 하지 말라고 우리를 보낸 겁니다` 이렇게 바나바와 바울의 울부짖음이고 비명이었던 것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으로 부르고 있다.

그 인생이 되라. 그 앞에 가서 은혜를 구하고 복을 받고, 행복한 운명을 맞이하라. 그게 사도들이 한 증언이다.
그러니 예수를 예수를 값싸게 믿지 마라.
예수를 믿는 가치를 더 깊이 생각을 해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세상 모든 경우가, 예수 안에 감싸여 있다는 것을 확인해서 늠름한 인생을 사는, 예수 믿는 그 힘을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기도)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진실하심과 능력과 지극하심을 힘입은 자들이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으니 다른 것이 필요 없다.
우리는 넉넉함을 알고, 세상을 이기고, 믿음으로 우리의 우리 된 것을 우리 살아 생전에 우리와 우리 이웃들 앞에 자랑하는 영광된 인생되어 살아가야 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 만나는 모든 삶의 정황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신 줄 아는 기쁨과 기적을 누려야 된다.

(*다시보는 사도행전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