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어떤 환경과 조건도 감수할 수 있지 않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아직도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능력을 아직도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nazunzaro
2020. 6. 10. 15:17
현실을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보고 있느냐?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사회의 기본는 지유 평등/평화, 정의인데, 정의와 평화는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는 게 역사의 증언이다.
자유는 각 개인의 권리인데, 그 권리가 순수한 권리인 적은 없다. 이 권리는 언제나 이기심에 묶여 있다. 그렇지 않은가?
다른 대립되는 의견들은 어떡하느냐? 사회적으로 풀어야 된다는 것이 답이다. 사회적으로 푼다는 게 뭔가? 사회에서 다른 의견들을 수용하고 주장케 하고 듣고 대화하고 풀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된 적은 없습니다. 말은 쉬운데 안된다. 정의를 구현할려면, 각각이 정의로운 사회에 합의하기 위해서 각각이 권리를, 혹은 각각의 주장을 어느만큼씩 양보해야 되는데,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 암담한 역사, 인류의 현실 앞에 바로 그 사회적 타협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실체로 기독교가 서 있다, 그것이다.
도덕은 어떤가? 그건 자발성이 아니고는 도덕은 행사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그리 하겠다고 나 스스로를 내가 붙들고 나 스스로를 희생시키지 않는 이상, 도덕을 지킬 방법은 없다. 법은 도덕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거기 유일하게 희생과 사랑이라는 내용을 들고 서 있는 존재가 있다. 그게 기독교이다.
그렇게 하면 사회가 다 괜찮아 질텐데 그런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유일한 답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걸 바로 국가라는 권력을 쥐듯이 힘이 되어 상대방들을 압제하여 이 복음, 우리의 믿는 것을 전하라고 하나님이 하시지 않고, 그 쳐준 울타리 속에서 사회적 기능을 하라는 거다.
권력을 가지려고 하지 말고, 동등한 조건, 환경, 위치에서 사회에서 한 목소리를 내라고 한다.
★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자리를 하나님이 어떤 힘으로 면제시켜줘야 한다라는 발상은 성경(사도행전)에 없다.
*'기독교가 아무래도 좋은 환경 속에서 자기 임무를 해야 된다고? 이 분은 현실을 모르시구나..'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가?
'우리가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라는 게 기독교가 오해되는 중요한 본질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 못한다.
★ 하나님이신데 천지를 창조하셨고 궁극적 심판자이신데, 인류와 역사의 주인이신데, 그가 왜 세상 권세 아래 계실까? 우리가 이걸 납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이 가지지 못한 목적을 갖고 있다고 얘기를 한다.
예수는 자살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손에 죽습니다.
★ 그를 우리에게 내어 주어, 하나님 당신의 정의와 당신의 평화를 제안한 그 아들을 죽이는 그 희생, 그 기다림, 그 낮추심. 그걸 우리에게 뒤따라 오라고 한다.
★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는가?
아무도 양보하지 않는 사회에, 오직 이기심과 경쟁 밖에 없는, 어떤 정의도 어떤 평화도 만들어낼 수 없는 인류에게 예수가 오신 것같이,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된 자들로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 희생, 양보, 억울함을 지라는 거다.
이것이 힘을 가지려는 방법으로 쓰여지지 않기 때문에, 조건이 나쁠 수록 좋다.
그리 각오하겠는가?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장)
철저히 뭐가 나뉘고 있는가? 세상 권력으로 쓸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준 것이 없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진리와 믿음과 소망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과 조건을 개선시켜 주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세상이 요구하는 것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가져서 손해보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권력, 이기심 말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빼앗길 수 있는 것을 갖고 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 말이다. 뺏아 가라는 거다. 뺏아가서 누리라는 거다.
우리 시대를, 하나님이 나에게 명한 인생을, 그리 살아야 된다.
* 기독교인이 됐다는 것,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환경과 조건도 감수할 수 있지 않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아직도 충분히 알 지 못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능력을 아직도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 말고, 이 명예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께 영광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같이 빼앗는 것, 가지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놀라운 선언이다.
예수를 믿어 이 자리에 오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죽은 다음에 밖에는 쓸 수가 없게 된다. 현실에서는 쓸 수가 없게 된다. 그리하지 말고, 지금 써먹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감사와 자랑이 있는 인생을 우리 스스로 확인하여 가슴을 펴고 살게 해야 한다.
이 나라 이 사회가 좀 더 평화롭고 좀 더 따뜻하고 좀 더 정의롭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는 거기에 있지만은 않다.
우리는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 부름을 받든 우리가 과연 세상의 빛인 것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하나님만이 정의와 평화와 자유를 주신다, 인간에게 진정한 축복이시다, 그리고 그 약속이 우리를 변화시켰고, 그래서 나는 질 수 있다, 나는 양보할 수 있다, 나 너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 그렇게 살아가는 위대한 신앙들이 되어야 한다.
(다시보는 사도행전 18강해 중에서)
사회의 기본는 지유 평등/평화, 정의인데, 정의와 평화는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는 게 역사의 증언이다.
자유는 각 개인의 권리인데, 그 권리가 순수한 권리인 적은 없다. 이 권리는 언제나 이기심에 묶여 있다. 그렇지 않은가?
다른 대립되는 의견들은 어떡하느냐? 사회적으로 풀어야 된다는 것이 답이다. 사회적으로 푼다는 게 뭔가? 사회에서 다른 의견들을 수용하고 주장케 하고 듣고 대화하고 풀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된 적은 없습니다. 말은 쉬운데 안된다. 정의를 구현할려면, 각각이 정의로운 사회에 합의하기 위해서 각각이 권리를, 혹은 각각의 주장을 어느만큼씩 양보해야 되는데,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 암담한 역사, 인류의 현실 앞에 바로 그 사회적 타협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실체로 기독교가 서 있다, 그것이다.
도덕은 어떤가? 그건 자발성이 아니고는 도덕은 행사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그리 하겠다고 나 스스로를 내가 붙들고 나 스스로를 희생시키지 않는 이상, 도덕을 지킬 방법은 없다. 법은 도덕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거기 유일하게 희생과 사랑이라는 내용을 들고 서 있는 존재가 있다. 그게 기독교이다.
그렇게 하면 사회가 다 괜찮아 질텐데 그런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유일한 답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걸 바로 국가라는 권력을 쥐듯이 힘이 되어 상대방들을 압제하여 이 복음, 우리의 믿는 것을 전하라고 하나님이 하시지 않고, 그 쳐준 울타리 속에서 사회적 기능을 하라는 거다.
권력을 가지려고 하지 말고, 동등한 조건, 환경, 위치에서 사회에서 한 목소리를 내라고 한다.
★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자리를 하나님이 어떤 힘으로 면제시켜줘야 한다라는 발상은 성경(사도행전)에 없다.
*'기독교가 아무래도 좋은 환경 속에서 자기 임무를 해야 된다고? 이 분은 현실을 모르시구나..'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가?
'우리가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라는 게 기독교가 오해되는 중요한 본질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 못한다.
★ 하나님이신데 천지를 창조하셨고 궁극적 심판자이신데, 인류와 역사의 주인이신데, 그가 왜 세상 권세 아래 계실까? 우리가 이걸 납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이 가지지 못한 목적을 갖고 있다고 얘기를 한다.
예수는 자살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손에 죽습니다.
★ 그를 우리에게 내어 주어, 하나님 당신의 정의와 당신의 평화를 제안한 그 아들을 죽이는 그 희생, 그 기다림, 그 낮추심. 그걸 우리에게 뒤따라 오라고 한다.
★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는가?
아무도 양보하지 않는 사회에, 오직 이기심과 경쟁 밖에 없는, 어떤 정의도 어떤 평화도 만들어낼 수 없는 인류에게 예수가 오신 것같이,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된 자들로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 희생, 양보, 억울함을 지라는 거다.
이것이 힘을 가지려는 방법으로 쓰여지지 않기 때문에, 조건이 나쁠 수록 좋다.
그리 각오하겠는가?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장)
철저히 뭐가 나뉘고 있는가? 세상 권력으로 쓸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준 것이 없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진리와 믿음과 소망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과 조건을 개선시켜 주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세상이 요구하는 것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가져서 손해보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권력, 이기심 말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빼앗길 수 있는 것을 갖고 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 말이다. 뺏아 가라는 거다. 뺏아가서 누리라는 거다.
우리 시대를, 하나님이 나에게 명한 인생을, 그리 살아야 된다.
* 기독교인이 됐다는 것,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환경과 조건도 감수할 수 있지 않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아직도 충분히 알 지 못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능력을 아직도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 말고, 이 명예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께 영광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같이 빼앗는 것, 가지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놀라운 선언이다.
예수를 믿어 이 자리에 오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죽은 다음에 밖에는 쓸 수가 없게 된다. 현실에서는 쓸 수가 없게 된다. 그리하지 말고, 지금 써먹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감사와 자랑이 있는 인생을 우리 스스로 확인하여 가슴을 펴고 살게 해야 한다.
이 나라 이 사회가 좀 더 평화롭고 좀 더 따뜻하고 좀 더 정의롭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는 거기에 있지만은 않다.
우리는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 부름을 받든 우리가 과연 세상의 빛인 것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하나님만이 정의와 평화와 자유를 주신다, 인간에게 진정한 축복이시다, 그리고 그 약속이 우리를 변화시켰고, 그래서 나는 질 수 있다, 나는 양보할 수 있다, 나 너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 그렇게 살아가는 위대한 신앙들이 되어야 한다.
(다시보는 사도행전 18강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