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ㅇㅂ19_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있는 세상의 질서, 세상의 방식, 세상의 생각들과 전혀 다른 것이다
nazunzaro
2020. 6. 9. 20:08
(고린도후서 10:1-18)
"1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2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바울을 폄훼하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마음을 혼란시킨 거짓교사들의 대하여 내가 거친 마음을 가진 것같이 너희들과 거친 관계와 대면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뜻입니다)
"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이 6절까지 내용은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저들의 복음과 저들과 사도바울 자신과의 관계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의 정신, 본질로 이해를 교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있는 세상의 질서, 세상의 방식, 세상의 생각들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는 창조주시나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으셨고, 우리 있는데까지 내려오셨고, 우리가 알지 못하고 적대적인 모든 것을 감수하시고 우리 손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우리의 복이 되시고 운명이 되시고 구원이 되셨습니다.
●이런 일들은 이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논리나 교리나 이런 내용들에 대한 설명 이상으로 사도바울이 가진 굳건한 하나님의 종에 대한 깊은 이해의 그 표현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위대한 하나님의 종을 모세와 바울에게서 보는데, 그 모세와 바울의 공통점이며 위대한 종이라 이렇게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그 둘이 다 하나님의 보내심이 무엇을 뜻하는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출애굽 중에 시내산에 도착하여 하나님 앞에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사십일 동안 기다리고 있던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만들어서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막아서서, `저들을 진멸하시려면 내 이름도 생명 책에서 빼 주십시요` 라고 말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게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목자를 먼저 세우고 양떼를 주는 것이 아니라, 양떼를 준비하고 목자를 보낸다는 이 순서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느 공동체 믿음의 모임에 하나님께서 세우면 내가 저들 양떼들과 다른 특별한 지위와 사명이 있다하는 소명의식을 가지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말하자면 내가 없으면 당신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저들을 위해서 내가 부름을 받았다` 라는 순서, 그리스도와 십자가 앞에 모두를 무릎 꿇이는 성경의 정신을 기억해야 합니다. 심지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마저도 우리를 위하여 당신이 죽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고집이랄까, 우리의 무지를 다 수용하십니다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이 일을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고 모세에게 새로운 민족을 만들겠다 했을 때, 모세가 우리가 생각해도 참으로 위대한 반응을 보인 것은, 그가 위대한 사람이기 때문인 것이 확실하지만,
●그 위대함은 우월하거나 잘난 데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모세가 미디안 광야 사십 년에서 훈련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모세는 죽어났죠.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은 일에 대하여 처음에는 당연히 분노했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자책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얼마나 심히 절망하고 체념했는지 그의 아들 이름을 '게르솜, 이방 나그네'라 이렇게 이름을 지었는데, 우리나라 속된 표현 중에 '낙동강 오리알'이라는 뜻입니다. 낙동강 물결에 오리알이 쓸려내려가면 어미 품을 떠났기 때문에 그건 부화될 수도 없고 새끼가 부화가 되어봤자 금방 잡혀먹혀 죽을 것입니다. 오죽 그 절망이 컸으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야속함과 자신의 실력과 기대와 다른 현실에 대한 분노가 컸으면 자식의 이름을 그런 식으로 지었겠습니까? 이런 추측이 가능한 것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났을 때 모세가 끊질기게 항변하고 하나님의 부름을 거절합니다.
그것이 한 두해 겪은 것이 아니라, 사십년 미디안 광야가 그로하여금 별의별 생각을 다하게 했을 것입니다. 분노했다가 돌이켰다가 매달렸다가 울었다가, 하는 일들을 반복적으로 사십년을 했으니까, 그는 이제 희망이라는 것이나 낙관같은 것에 관하여는 철저히 마음이 닫혀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하나님의 모든 부르심과 하나님과 대면하여 명령을 받는 자리에서도 감히 끝까지 반대하죠. 마지막에는 화를 내셔서 할 수 없이 갑니다. 그는 바로 앞에 서지만 적극성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가 돌이키는 것은 홍해 앞에서 애굽군사는 뒤쫓아 오고 앞은 바다인 오갈 데 없는 자리에서 그래서 모든 백성이 울부짖으며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던 그때에 가서야 모세는 돌이킵니다. `열가지 재앙이 바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세를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모세가 회개를 하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 하나님의 능력과 일하심이 얼마나 신실하신가, 새상스럽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으러 올라가고 백성들이 금송아지 만들고 범죄했을때,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에 모세도 진노했습니다. 그가 십계명 돌판을 들고 내려오다가 던져서 깨뜨렸으니까요.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 `이 백성을 멸하려면 내 이름도 빼주십시요`라는 그 기도 속에는 저들이 저 못난 짓을 했어도 저보다 낫습니다` 그런
●자신의 인생에서 겪은 어떤 체념과 분노와 원망과 절망을 넘어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어떤 포용력, 용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도 기꺼이 응하시죠. `내가 누구를 생명책에서 빼던지 기록하든지 그것은 내 권리다 그러나 네 기도에 내가 함께 하여 이 백성을 용서하겠다` 해서 이제 긴 광야 사십 년이 시작되죠. 그런데 묘하게도 시편 106편에 가면 그 가데스바냐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절하고 하나님 앞에 정죄를 당하여 그 세대가 다 광야에서 죽게 되는 그 벌을 받고, 광야 길로 돌아서서 모두가 죽어나가는 사십년 광야생활을 시작하는 그 도중에 므리바 사건이 일어납니다. 시편 106편을 보면,
"32 그들이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그들 때문에 재난이 모세에게 이르렀나니
33 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이 사건은 좀 깊이 이해를 해야 되는 것이, 가데스바냐에서 정탐꾼을 보내고 `가나안에 못 들어가겠다` 했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들어가자 하고 그들은 그때 정죄받지 않습니다. 또 모세가 잘못한 일도 아니고 그때 하나님이 모세 보고 `너도 못 들어간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광야 사십 년 유랑길을 돌고, 그 세대가 다 죽어야 되는 이 노정에서 이 므리바 사건, 물이 없이 없어서 원망하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했을 때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치고, 물이 많이 나오고 백성들이 다 마셨지만, 하나님이 모세에게 노하시고 `너 백성들 앞에서 망령되이 굴었다, 너도 못 들어간다` 가 됩니다.
모세가 여기서 화를 낸 것이 또는 망령되이 행한 것이 `반석에게 명하라한 것을 반석을 쳤기 때문이다`이런 해석들을 들으면서 컸는데, 이제 신앙생활도 오래하고 인생도 살고 성경도 많이 읽고 하면서 이제 좀 이해가 깊어지고 보니까 이때 모세가 못 할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백성들에게 매우 심한 욕지거리를 한 것 같은데 하나님이 그 정도 갖고 모세를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은 약간 안 맞습니다. 모세는 여러가지 칭찬을 받을 만한 사람이거든요. 온유한 사람이고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한 사람이고, 그런데 왜 모세를 여기서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했느냐?
`너는 이 백성 광야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이 백성과 이 세대를 위하여 부름 받은 자니 너는 그들과 함께 죽어라` 그런 뜻입니다.
모세는 이 말을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시편 90편이 탄생을 하는데, 시편 90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못나게 굴었으며 인생이 얼마나 미련 한 불신앙 속에 지나가,며 하나님의 진노 속에 지나가는가 하는 한탄이거나 또는 경고의 시가 아니라, 인간이 이렇게 못났으니 하나님 그렇게 너무 화만 내지 마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런 시입니다.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는 모세는 자기가 이 가나안 입국을 거절한 믿음 없는 이 세대, 자기가 홍해를 데리고 건너온 출애굽을 해온 그 세대와 하나님이 함께 죽어라` 한 것을 명예와 영광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니 이 모든 목회자들은 자기가 맞게 된 양떼들 앞에서 속상하는 일 어려운 일이야 늘 있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이 이 사람들을 위하여 나를 세웠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과 함께 주 앞에 가지 않으면 나는 내 소명을 실패하는 것이다`이렇게 이해하셔야 됩니다.
모세를 보시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을 시키고 홍해를 건너오게 하고 만나를 먹인 종인데도 결국 이렇게 광야에서 끝끝이 영광될 것 없이 죽고 말거든요. 이게 하나님 일하시는 하나의 세상 방법과 다른 중요한 신비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걸러보면 알 듯이, 자식이 맘에 드냐 아니냐는 둘째 문제죠.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식은 자식이고 나는 그의 부모입니다. 자식을 놓고 떠날 수 있는 부모가 없듯이, 모든 목회자는 자기가 맡은 양떼와 지켜야 할 교회를 목숨을 다하여 지켜야 됩니다. 목숨을 다한다는 말은 우리가 쉽게 하는 얘기지만 그것은 정성과 모든 성의를 다해야 된다 라는 그런 명분 정도가 아니고, 실제로 그래야 됩니다.
속상하신 것 감수하셔야 되고 결과를 보지 못하는 눈물 계곡을 지나는 일들을 말합니다.
그것이 모세가 걸은 길이고 다음 시간에 또 예를 들겠습니다마는 바울이 걸은 길입니다. 그리고 이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이렇게 애를 써서 고린도 교회를 권면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같이 가자는 거죠.
고린도후서를 돌아와서 7장 2절을 보시면, 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3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이렇게 나는 지도자이고 너희는 내 지도를 받아야 하는 학생이다, 제자다, 따라오고 순종해야 될 사람들이다 이렇게 쉽게 구별을 하지 마시고, 목회자들이 가지는 그 마음속에 어떤 섭섭함이나 아쉬움이나 절망이나 또는 그 간절함 같은 것들이 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양떼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어떤 약속 소망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우리 살면서 가족끼리도 부모가 되어서 자식들을 `제게 내 웬수야, 저게 내 십자가야` 그렇게 말하는 것은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외면할 것이면 그런 말 안 하죠. 내일 아침에 놔두고 집 나갈 거면 뭘 화를 내겠습니까?
여러분 마음에 있는 불편함이나 안타까움 같은 것들은 어떤 부족함이나 잘못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책임을 교인들에게도 돌리지 마시고 특별히 목회자 자신에게도 돌리지 마십시요. 내가 뭐가 부족해서 내 사역이 이렇게 어려운가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그걸 해소할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더 많이 울고 더 많이 기도하여, 시편 90편을 기록한 모세의 마음, 그리고 여기 `함께 죽고 함께 살자`라는 그런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바울의 마음에 동참하는 하나님이 동일한 명예와 동일한 야속과 동일한 권능으로 우리를 세웠다는 것을 공감하셔서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의 소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새 아이를 태어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아직도 구원을 계속하고 계시기 때문이라 그랬습니다.
(*일병19)
"1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2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바울을 폄훼하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마음을 혼란시킨 거짓교사들의 대하여 내가 거친 마음을 가진 것같이 너희들과 거친 관계와 대면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뜻입니다)
"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이 6절까지 내용은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저들의 복음과 저들과 사도바울 자신과의 관계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의 정신, 본질로 이해를 교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있는 세상의 질서, 세상의 방식, 세상의 생각들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는 창조주시나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으셨고, 우리 있는데까지 내려오셨고, 우리가 알지 못하고 적대적인 모든 것을 감수하시고 우리 손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우리의 복이 되시고 운명이 되시고 구원이 되셨습니다.
●이런 일들은 이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논리나 교리나 이런 내용들에 대한 설명 이상으로 사도바울이 가진 굳건한 하나님의 종에 대한 깊은 이해의 그 표현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위대한 하나님의 종을 모세와 바울에게서 보는데, 그 모세와 바울의 공통점이며 위대한 종이라 이렇게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그 둘이 다 하나님의 보내심이 무엇을 뜻하는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출애굽 중에 시내산에 도착하여 하나님 앞에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사십일 동안 기다리고 있던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만들어서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막아서서, `저들을 진멸하시려면 내 이름도 생명 책에서 빼 주십시요` 라고 말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게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목자를 먼저 세우고 양떼를 주는 것이 아니라, 양떼를 준비하고 목자를 보낸다는 이 순서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느 공동체 믿음의 모임에 하나님께서 세우면 내가 저들 양떼들과 다른 특별한 지위와 사명이 있다하는 소명의식을 가지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말하자면 내가 없으면 당신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저들을 위해서 내가 부름을 받았다` 라는 순서, 그리스도와 십자가 앞에 모두를 무릎 꿇이는 성경의 정신을 기억해야 합니다. 심지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마저도 우리를 위하여 당신이 죽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고집이랄까, 우리의 무지를 다 수용하십니다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이 일을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고 모세에게 새로운 민족을 만들겠다 했을 때, 모세가 우리가 생각해도 참으로 위대한 반응을 보인 것은, 그가 위대한 사람이기 때문인 것이 확실하지만,
●그 위대함은 우월하거나 잘난 데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모세가 미디안 광야 사십 년에서 훈련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모세는 죽어났죠.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은 일에 대하여 처음에는 당연히 분노했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자책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얼마나 심히 절망하고 체념했는지 그의 아들 이름을 '게르솜, 이방 나그네'라 이렇게 이름을 지었는데, 우리나라 속된 표현 중에 '낙동강 오리알'이라는 뜻입니다. 낙동강 물결에 오리알이 쓸려내려가면 어미 품을 떠났기 때문에 그건 부화될 수도 없고 새끼가 부화가 되어봤자 금방 잡혀먹혀 죽을 것입니다. 오죽 그 절망이 컸으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야속함과 자신의 실력과 기대와 다른 현실에 대한 분노가 컸으면 자식의 이름을 그런 식으로 지었겠습니까? 이런 추측이 가능한 것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났을 때 모세가 끊질기게 항변하고 하나님의 부름을 거절합니다.
그것이 한 두해 겪은 것이 아니라, 사십년 미디안 광야가 그로하여금 별의별 생각을 다하게 했을 것입니다. 분노했다가 돌이켰다가 매달렸다가 울었다가, 하는 일들을 반복적으로 사십년을 했으니까, 그는 이제 희망이라는 것이나 낙관같은 것에 관하여는 철저히 마음이 닫혀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하나님의 모든 부르심과 하나님과 대면하여 명령을 받는 자리에서도 감히 끝까지 반대하죠. 마지막에는 화를 내셔서 할 수 없이 갑니다. 그는 바로 앞에 서지만 적극성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가 돌이키는 것은 홍해 앞에서 애굽군사는 뒤쫓아 오고 앞은 바다인 오갈 데 없는 자리에서 그래서 모든 백성이 울부짖으며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던 그때에 가서야 모세는 돌이킵니다. `열가지 재앙이 바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세를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모세가 회개를 하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 하나님의 능력과 일하심이 얼마나 신실하신가, 새상스럽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으러 올라가고 백성들이 금송아지 만들고 범죄했을때,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에 모세도 진노했습니다. 그가 십계명 돌판을 들고 내려오다가 던져서 깨뜨렸으니까요.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 `이 백성을 멸하려면 내 이름도 빼주십시요`라는 그 기도 속에는 저들이 저 못난 짓을 했어도 저보다 낫습니다` 그런
●자신의 인생에서 겪은 어떤 체념과 분노와 원망과 절망을 넘어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어떤 포용력, 용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도 기꺼이 응하시죠. `내가 누구를 생명책에서 빼던지 기록하든지 그것은 내 권리다 그러나 네 기도에 내가 함께 하여 이 백성을 용서하겠다` 해서 이제 긴 광야 사십 년이 시작되죠. 그런데 묘하게도 시편 106편에 가면 그 가데스바냐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절하고 하나님 앞에 정죄를 당하여 그 세대가 다 광야에서 죽게 되는 그 벌을 받고, 광야 길로 돌아서서 모두가 죽어나가는 사십년 광야생활을 시작하는 그 도중에 므리바 사건이 일어납니다. 시편 106편을 보면,
"32 그들이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그들 때문에 재난이 모세에게 이르렀나니
33 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이 사건은 좀 깊이 이해를 해야 되는 것이, 가데스바냐에서 정탐꾼을 보내고 `가나안에 못 들어가겠다` 했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들어가자 하고 그들은 그때 정죄받지 않습니다. 또 모세가 잘못한 일도 아니고 그때 하나님이 모세 보고 `너도 못 들어간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광야 사십 년 유랑길을 돌고, 그 세대가 다 죽어야 되는 이 노정에서 이 므리바 사건, 물이 없이 없어서 원망하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했을 때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치고, 물이 많이 나오고 백성들이 다 마셨지만, 하나님이 모세에게 노하시고 `너 백성들 앞에서 망령되이 굴었다, 너도 못 들어간다` 가 됩니다.
모세가 여기서 화를 낸 것이 또는 망령되이 행한 것이 `반석에게 명하라한 것을 반석을 쳤기 때문이다`이런 해석들을 들으면서 컸는데, 이제 신앙생활도 오래하고 인생도 살고 성경도 많이 읽고 하면서 이제 좀 이해가 깊어지고 보니까 이때 모세가 못 할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백성들에게 매우 심한 욕지거리를 한 것 같은데 하나님이 그 정도 갖고 모세를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은 약간 안 맞습니다. 모세는 여러가지 칭찬을 받을 만한 사람이거든요. 온유한 사람이고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한 사람이고, 그런데 왜 모세를 여기서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했느냐?
`너는 이 백성 광야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이 백성과 이 세대를 위하여 부름 받은 자니 너는 그들과 함께 죽어라` 그런 뜻입니다.
모세는 이 말을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시편 90편이 탄생을 하는데, 시편 90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못나게 굴었으며 인생이 얼마나 미련 한 불신앙 속에 지나가,며 하나님의 진노 속에 지나가는가 하는 한탄이거나 또는 경고의 시가 아니라, 인간이 이렇게 못났으니 하나님 그렇게 너무 화만 내지 마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런 시입니다.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는 모세는 자기가 이 가나안 입국을 거절한 믿음 없는 이 세대, 자기가 홍해를 데리고 건너온 출애굽을 해온 그 세대와 하나님이 함께 죽어라` 한 것을 명예와 영광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니 이 모든 목회자들은 자기가 맞게 된 양떼들 앞에서 속상하는 일 어려운 일이야 늘 있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이 이 사람들을 위하여 나를 세웠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과 함께 주 앞에 가지 않으면 나는 내 소명을 실패하는 것이다`이렇게 이해하셔야 됩니다.
모세를 보시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을 시키고 홍해를 건너오게 하고 만나를 먹인 종인데도 결국 이렇게 광야에서 끝끝이 영광될 것 없이 죽고 말거든요. 이게 하나님 일하시는 하나의 세상 방법과 다른 중요한 신비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걸러보면 알 듯이, 자식이 맘에 드냐 아니냐는 둘째 문제죠.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식은 자식이고 나는 그의 부모입니다. 자식을 놓고 떠날 수 있는 부모가 없듯이, 모든 목회자는 자기가 맡은 양떼와 지켜야 할 교회를 목숨을 다하여 지켜야 됩니다. 목숨을 다한다는 말은 우리가 쉽게 하는 얘기지만 그것은 정성과 모든 성의를 다해야 된다 라는 그런 명분 정도가 아니고, 실제로 그래야 됩니다.
속상하신 것 감수하셔야 되고 결과를 보지 못하는 눈물 계곡을 지나는 일들을 말합니다.
그것이 모세가 걸은 길이고 다음 시간에 또 예를 들겠습니다마는 바울이 걸은 길입니다. 그리고 이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이렇게 애를 써서 고린도 교회를 권면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같이 가자는 거죠.
고린도후서를 돌아와서 7장 2절을 보시면, 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3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이렇게 나는 지도자이고 너희는 내 지도를 받아야 하는 학생이다, 제자다, 따라오고 순종해야 될 사람들이다 이렇게 쉽게 구별을 하지 마시고, 목회자들이 가지는 그 마음속에 어떤 섭섭함이나 아쉬움이나 절망이나 또는 그 간절함 같은 것들이 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양떼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어떤 약속 소망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우리 살면서 가족끼리도 부모가 되어서 자식들을 `제게 내 웬수야, 저게 내 십자가야` 그렇게 말하는 것은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외면할 것이면 그런 말 안 하죠. 내일 아침에 놔두고 집 나갈 거면 뭘 화를 내겠습니까?
여러분 마음에 있는 불편함이나 안타까움 같은 것들은 어떤 부족함이나 잘못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책임을 교인들에게도 돌리지 마시고 특별히 목회자 자신에게도 돌리지 마십시요. 내가 뭐가 부족해서 내 사역이 이렇게 어려운가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그걸 해소할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더 많이 울고 더 많이 기도하여, 시편 90편을 기록한 모세의 마음, 그리고 여기 `함께 죽고 함께 살자`라는 그런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바울의 마음에 동참하는 하나님이 동일한 명예와 동일한 야속과 동일한 권능으로 우리를 세웠다는 것을 공감하셔서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의 소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새 아이를 태어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아직도 구원을 계속하고 계시기 때문이라 그랬습니다.
(*일병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