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요21_우리의 보상은 완전히 녹아든, 어떤 형태를 가질수 없는, 어떤 물의 충만함 같이, 하늘의 뭉게구름 같이 그렇게 우리를 완전히 잠기게 한다

nazunzaro 2020. 6. 9. 12:52
- 주께서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마음에 원한을 가지거나 못난 것들에 대하여 분해하지 않는다. 나뿐 아니라 저들을 구하러 온 것이다.
- 예수믿는 자들의 보상은 완전히 녹아든, 어떤 형태를 가질수 없는, 어떤 물의 충만함 같이, 하늘의 뭉게구름 같이 그렇게 우리를 완전히 이렇게 잠기게 한다.

(요한복음 10:1 -18)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나의 양떼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려고 하는 나는 의롭고 목숨까지 바치는 너희들의 목자다.`이렇게 선언하시는 장입니다.

앞에 있었던 요한복음 1장에서 9장까지의 내용을 하나의 배경으로 보면 이 선언은 매우 놀랍습니다. 그 앞의 장들이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잔치에 가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따뜻이 위로하시고, 삼십팔 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또 행음한 여인에게 용서를 선언하시고, 그리고 소경의 눈을 뜨시고,, 하는 기적들을 계속하고 계시지만,
☆ 그 모든 일들로 호의를 받거나 어떤 진지한 반응은 하나도 얻어내지 못하고, 살의와 분노에 찬 적대자들만 만들어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복음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다` 이렇게 얘기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너희들은 다 나쁜 놈들이었다`라는 것이 이렇게 따라 들어오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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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는 수많은 초자연적 기적들이 등장한다. 그건 엄청 대단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기적과 이사가 최고가 아니지 않은가?
기적의 의미나 가치는 사실 의외로 제한적이다. 기적이란 흔하게 발생뒤지도 않을뿐 아니라, 홍해가 갈라지고 만나가 내리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들을 겪은 당사자들에게 그걸로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게 아니었다.
기적 이후의 삶은 여전히 일반적인 상황으로 계속이 된다. 즉, 되살아난 나사로, 일어나 걷게된 후, 다시보게된 후, 홍해를 건너고 만나를 먹은 후의 삶은 다시 평상으로 돌아가서 지속된다. 기적 이후에 우리가 당면하는 문제는 다시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의 정체성은 뭔가 하는 문제이다.
로또에 당첨되고, 무병장수 만사형통으로 사는게 다가 아니라, 삶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게 우리라는 존재요 우리 인생이다.
만약에 우리에게 초자연적 일들이 사람들의 소원과 기도 등으로 쉽게 이루어 지는 그런 인생이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그런 인생에 어떠한 의미, 가치! 거룩, 영광이 있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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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초자연적 기적을 행하기까지 하는 자신을 반대하고 거부하는 사람들까지에 대해서도,)
요한복음 1장에서 이미 서두에서 못을 박아놓은 것같이,`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고', 그 주인이 세상에 왔으나 세상이 영접하지않는 그 조건, 그 현실에서 믿는 자를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를 만드시는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릴 수 있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모든 왜곡과 증오와 폭력 앞에서 보복의 고함을 지르는 것도 아니고, 권력을 세워 저들을 심판하는 것도 아닌,

●무지와 절망 밖에 없는 것에, 정말 놀라운 하나의 소망을, 그리고 하늘 아버지의 복되신, 우리를 향한 사랑과 구원을 선포하시는 아름답고 놀랍고 그리고 너무나 큰 선언을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 그 논쟁 속에서 예수님을 공격하는 자들을 향해서 "나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가 나를 보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를 믿지 않으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런 말씀으로 계속 그를 반대하는 당시의 반대자들을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까지 온 거죠.

●우리들의 마음에도 복음이라는 것이,
우리로서는 상상이 가지않는, 기대하지 못하는 기이한 그런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그에게 순응하고 길을 열고 믿음을 가진 자들을 향하여 온 것이 아니라,

우리 다 알아듣지 못하고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고, 오히려 우리 마음에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싶은 그런 놀라운 이 하나님의 찾아오심, 약속, 권능, 영광, 생명, 이런 단어들이, 한 인격 속에서 한 역사의 현장에 지금 이 선언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너는 믿었으니까 천당가고 너는 안 믿었으니까 지옥 가고,`같은 간단한 이분법은 좀 더 내려놔야 됩니다.
하나님은 모두를 구원하기를 기뻐하시고 그 중에 누구는 이미 믿고 누구는 아직 안 믿고 가 있는데,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믿은 것은 은혜의 결과이지, 우리가 더 나은 것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이 하고 싶은 것은 `은혜를 받았으면 받은 자답게 구별되라` 입니다.
`은혜를 받은 것이 은혜를 받지 못한 자를 향한 우월감이나 비난이나 심판이 되지 말아라` 그게 성경의 전체 줄거리인데,
우리는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것이 우리가 어떤 자격과 남다른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생각을 해서, 기독교 신앙은 뜻 밖에 예수를 믿고 난 다음이 재미가 없습니다.

●믿었으면 믿기 전에는 볼 수도 없었고 알 수도 없었고 할 수도 없었던 것들이,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러 와서 너희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릴 수 있다`하는 자리를 따라 와야 되는 것인데,

비난과 분노 같은 것들이 훨씬 거룩한 이름으로 명분으로 자행되고 있음으로 `우리 인생에 보상이 없다`하는 분노로 자주 변합니다.

욕할 사람은 있지만, 스스로가 믿은 하나님, 스스로가 가진 신앙의 보상은 적극적으로는 없기 때문에, 그저 비난하고 화를 내고 하는 것으로는 만족되지 않는 인간된 정체성, 그 하루하루 일상이 가지는 의미와 거기에서의 어떤 확인들이 우리에게 너무 가난합니다.

그래서 한번 이런 걸 보십시요;
시편 23편은 여러분들 다 외우시는 거니까 한번 우리 눈을 마주 보면서 외워 봅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라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내 머리에 기름을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전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기는 어떤 분노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폭발적인 보상, 폭발적이라는 건, 우리 축구 골을 넣거나 무슨 결정타를 먹으면 이렇게 ~ 하잖아요.

●■예수 믿는 자들의 보상은 바로 이렇게 주먹을 쥐고 안면을 경직시키는 표정으로 안 나옵니다. 그건 완전히 녹아든 어떤 형태를 가질 수 없는, 어떤 물의 충만함 같이, 하늘의 뭉게구름 같이 그렇게 우리 모두를 완전히 이렇게 잠기게 합니다.

왜 이 시편 23편을 여기서 하나의 증거로 인용하느냐 하면, 예수께서 오셔서 이렇게 전하는 것이 말하자면 이렇게 폭력이 되고 고함이 되고 큰 소리를 쳐서 가지는 결론, 승리와는 다르다는 거죠.

●■주께서 이 앞의 모든 일들에 대하여 마음에 원한을 가지거나 못난 것들에 대하여 분해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을 구하러 온 것이고 우리는 그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 넓이와 깊이를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우리는 성경적으로 미쳐 이해 못하고 세상적인`다 빼앗아 갖는 것, 누군가와 경쟁을 해서 이기는 것, 누구를 해쳐야 내 몫이 생기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런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고 선언을 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이 시편 23편을 다시 찾아보시면, 24편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23편이 있고 24편이 나오는데, 24편이 묘하십니다;

"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우리는 이 구절들이 다 조건을 가진 어떤 약속으로 읽힙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냐?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냐?`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 이렇게 된 것이 조건으로 들리고 여기에 갈 수 있는 자격은 이 조건을 만족시켜야 되는 것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시작이 이렇게 되어 있죠;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상과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입니다.
그러니까 이 앞에 나오는 `누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거룩한 자리에 오를 수 있는가?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정직하고,` 이렇게 도덕성이나 어떤 종교성으로 조건으로 하여 요구하는 것은 우리 익숙한 성경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을 듣고 순종하고 성실히 행하는 자는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그 뜻을 거스르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는 나가도 저주를 받고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그러나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뭐냐 하면, `복이란 여호와를 아는 것이다. 기쁨이란 여호와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려고 하는 것이지, 이렇게 하면 복을 받고 저렇게 하면 벌을 받는다로 나누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지금 이 많은 적대자들의 왜곡과 거짓과 또 폭력으로 맞서서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는,
요한복음 9장에 나왔던 맹인을 고치는 사건에서 그 눈 고침을 받은 맹인이 이렇게 말하죠.
"어찌 창세로부터 장님의 눈을 뜨게 했다는 소리는 내가 들은 적이 없습니다. 내가 눈을 뜨게 했으니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듭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이 알아들은 장님만이 아니라, 그 일을 보고도 모르는 자, 모를 뿐만 아니라, 그렇게 행한 예수를 증오하고 폭력으로 제압하려는 자들을 향하여 가장 따뜻하게,
"복이란 나로부터 끊어지면 안 되는 것이란다. 내게 귀속되어야 복이라는 것이 있고, 나로부터 분리되면 그것 자체가 곧 저주고 파멸이란다" 성경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이런 식의 성경의 이해는 약간 불만인 것이, 그렇다면 우리 인생이 왜 고달픈가? 하는 것이죠.
우리 전부 그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 따 먹을 때, 왜 하나님이 말리지 않으셨나? 그 질문은 그대로 이어져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를 지시는 방법을 택하셨을까? 와서 이렇게 고개 한번 돌리고 '이놈!" 그랬으면 악당들이 싹 녹아서 없어지고, 그의 백성들만 천사처럼 변하게 할 수 없었을까?`

거기가 가장 중요한 성경이 나누고 싶은 본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러셨을까? 왜 우리는 예수를 잘 믿었고 잘 믿고 싶고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모든 데를 참여하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가? 내가 뭘 잘못했을까? 하나님은 왜 이런 식으로 일을 할까?`

로마서 11장에 가 봅시다;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신 이유는 긍휼을 베풀려 함이고 이런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방법은 우리로서는 측량할 수 없는 깊은 하나님의 지혜요 권능이었다`라는 뎁니다.

우린 이렇게 얘기할 수 있죠.
하나님이 어차피 모든 것의 원인이고 과정이고 방법이고 목적이고 결과를 내시는 권력이시라면 왜 우리에게 이 고단함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하십니까?
32절에 있는 바와 같이 불순종을 허락하기 위해서입니다.

불순종을 허락했다는 게 뭐죠?
아담이 불순종했고 예수 시대에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를 반대한 그것을 하나님이 허락한 그 길을 고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도 불만으로 여기는 우리 신앙 현실의 고단함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우리는 예정론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예정론이란 하나님이 생각이 있으시다` 그런 뜻입니다.
일이 되는 걸 보고 그 다음에 또 그 잘못된 것을 고치고 새로운 방법을 만들고, 하는 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과 끝을 가지고 계시는, 시작을 할 때 목적과 결과를 계획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어코 이루시는 성실하신 분이다` 이게 예정론입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결정론으로 들립니다.
결정론은 `어찌 됐든지 간에 그 결론이 나고야 만다` 이런 식의 결정론이죠. 결정론과 예정론의 차이는 뭐냐 하면, 결정론에서는 우리의 역할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잘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운명은 고정되어 있다 정도죠.
●그러나 예정론이 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섭리가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반대하고 이해하지 못해서 분노하고 도망가고 하는 것들이, 하나님이 그걸 허락했다. 잘못하도록 예정했다, 그런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는 동안 인간이 반응하는 역할을 허락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자유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 자유. 선택의 자유.



그러나 그런 단어들로 개념들로 묶지 말고 실제적으로 이렇게 이해해 보십시요.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드라마와 로맨스가 있습니다. 드라마와 로맨스라는 것은 논문을 쓰는 게 아닙니다. 이야기가 진행되고 그 이야기 속에 서로 상대역이 있으며, 다른 뜻과 관심을 가진 여러명의 등장인물들에 의해서 어떤 내용들이 풍성해지고 우여곡절을 겪고 그리고 결론을 향하여 나가는 것을 드라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드라마와 나머지 이야기의 차이가 뭐냐?
드라마는 말장난같이 드라마틱하죠. 드라마틱하다는 것은 순탄하게 정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로맨스는 뭐죠? 말이 안 되는 어떤 아름다움, 어떤 사랑, 어떤 기쁨 같은 것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우리가 로맨스라 합니다.
드라마나 로맨스나 그 절정을 가지려면, 그것이 성립하려면 긴장이 있어야 됩니다.
그 결론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있고 그 장애물을 넘어서는 과정이 이 드라마틱한 것이죠.

그러니 성경을 읽을 때, 문학적 실력 정도도 없으면 성경을 읽을 재주가 없는 겁니다.
문학이 뭘 하는 건데요? 인생이 가지는 드라마를 말하는 것이 문학 아닌가요?
인문학에서 문학이 인간의 뭘 얘기하고 다루나요? 인간의 소망을 다루죠. 의미 있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용감하고 싶고 멋있고 싶습니다.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지면 문학이 아니죠.방해를 받죠. 외적 조건에서만이 아니라 내적 조건에서 방해를 받죠.
실력 없는 것들, 생각은 있으나 그걸 유지하지 못하는 의지와 지성과 감성의 변덕, 조그만 장애물에도 걸려 넘어지는 현실.
인문학 문사철에서 역사라는 것, 역사가 가지는 그 지위가 뭡니까?`아무리 좋은 말을 지껄여 봤자, 사실은 이래` 그게 역사죠.
인간이 뛰어나니, 인간의 가능성이 무한하니, 암만 그래 봤자 장담할 수 없는 이유가 인류 역사 내내 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무서움이죠.
성경이 우리에게 이런 문학을 넘어서는, 신화가 아닌, 신화는 신 자기 혼자 다해서 쉬운 거죠, 신학 속에, 성경 속에 녹아난 신과 인간이 긴장과 갈등 속에서 본문을 만들고 결론을 만들고 절정을 만드는 대화합과 함께 감격과 찬송으로 간다는 이 내용을 따라와 보십시오.

뭐가 있습니까? 창세기 28장에 야곱이 외삼촌 집으로 피난 가다가 돌베개 하고 자죠.
꿈에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인 겁니다. 하늘이 열리고.
우리 시편 24편을 찾은 이유, 쭈욱 돌아와서,
하늘이 열리고 온 세상의 모든 것이, 모든 운명이, 모든 내용이 여호와의 손안에 있다. 그러니 시편 24편 7절,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나는 선한 목자다. 너희가 하늘이 열리고 인자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것이다. 하늘이 문을 열었다 너희 마음 문을 열어라 고개를 들어라. 내가 왔다 하나님이 너희를 찾는다. 그 강하고 편 팔로 너희를 찾아오셨다. 이 영광을 받아라 누려라. 참여해라.

그런데 거부하죠. 그 씨름을 하는 겁니다.
창세기 28장에 다시 돌아가서 뭐라 그랬어요?
하늘이 열리고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까지 닿았고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데 하나님이 이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아니하리라" 이게 야곱에게 준 약속입니다.

그리고 20년 동안 가서 고생고생해서 거부가 되어 돌아옵니다. 32장, 얍복나루에 섰을 때,
그는 다 앞서 보내고 홀몸으로 자신의 생애에 절망을 비극을 홀로 곱씹고 있고,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이 이기지 못하더리니까요. 그 씨름을 보세요^^ 그 거북, 그 고집,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하시죠.
씨름하시고, 그 반전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마침내 야곱은 항복합니다.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시면 보낼 수 없습니다` 너 이제야 알겠느냐? 너 이제 향복했느냐? 그런 답 필요치 않습니다. " 네 이름이 뭐냐?" `야곱입니다`
"넌 이제껏 가난하게 살았다. 나 없이 살았다. 네 맘대로 살았다. 거기는 분노와 저주와 폭력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아니다. 네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이렇게 되죠.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어 이긴 사람.

우리는 우리 인생 내내 이 자유를 허락받습니다. `하나님 그건 안됩니다. 그건 아닙니다` "그래, 좋다, 더 가보자. 그래, 좋다, 더 가보자"

실존주의자들이 이런 표현을 씁니다. 굉장히 놀라운 표현인데, 하나님 없이 쓰는 것만 문제이고, 내용은 성경이 다루는 내용의 굉장히 충실한 증언을 합니다; '인간의 지성이 자신을 넘어서는 부조리한 현실과 부둥켜안고 대결하는 광경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삼삼하죠. 답이 없지만 끝까지 놓지 않는 거죠. 인간된 자존심을, 인간된 어떤 오기를 놓지 않는 것. 답이 없는 게 문제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걸 주십니다; "네가 찾고 네가 고민하고 네가 갈증을 내는 모든 곳에서 얻은 답이 무어냐?" 이렇게 물어오십니다. "내가 제사하는 것보다 그게 낫냐? 뭐가 낫냐? 네가 홀로 온 우주와 인생의 네가 주인이 된 것과 내 품 안에 있는 것과 어느 게 더 나으냐?
그게 더 좋으냐? 그래? 그래 더 해 봐라. 그럼 다음에 보자" 이게 역사고 인생입니다.

쉽게 믿고 쉽게 답할 수 있는 것, 그것도 복입니다. '무자식이 상팔자다' 하는 식으로 '무지한 복' 최고의 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자리로 가는 데에는 이런 긴장과 갈등과 이런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성경이 가장 중요한 본문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이 도전이 매일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매번 얘기한 대로 악당을 물리치면 선한 세상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그 아들을 주신 이유는 인간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려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더 크고 놀라운 약속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 속에서 내가 항복할 시간을 열어주는 것이죠. '내가 항복할 시간'

우리는 이 진정한 싸움에서 물러서면 남는 것은 비난밖에 없습니다
누구를 비난하고 원망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게 전부인데, 그런 신앙의 자리에 만족하시면 안 됩니다.
하니님이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전을 받으시고 우리가 만들 수 없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감격과 명예와 승리에 참여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부르심을 무겁게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여러분의 생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