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일목22_우리가 얼마나 억울하고 힘이 드냐?는 아무리 얘기해 봤자 소용이 없는 일이다.우리가 맡은 명예가 있고, 우리가 짊어지는 영광의 인생이, 사명이 있다. 그것을 즐겨야 된다
nazunzaro
2020. 6. 5. 18:44
바쁘고 힘드시고, 그러지 않아도 힘든 현실 속에서, 기도 많이 하시고 땀 흘리시고 고민 많으신 우리 동료 전우 여러분, 힘내시고 오늘 특별히 고린도후서 바울의 고백을 통하여 함께 바울의 명예를 나누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후11:16-33)
사도바울이 이제 어지간히 화가 나기도 했고 그 한 인간의 어떤 한계의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멋있다. 언제나 완벽할 수 없는 노릇이고, 분노도 한번씩 터뜨려야 하고 도망도 가야 하고 하는 게 우리의 실력인데, 현실은 우리가 소원하는 것만큼 우리가 기도한 것만큼 보상이 되지 않고. 한계를 벗어나게 도전과 시험이 있다.
그래서 가끔 우리도 이렇게 도를 넘을 때가 있는데, 오늘 이 말씀 보고 위로받으시길 바란다.
예전에 잘못한 일 같은 것으로 너무 마음에 두고 그게 트라우마가 되는 일 없길 바란다.
여기도 표현한 대로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이런 표현은 정말 바울이 화가 날 대로 난 것을 보여준다.
나도 너희한테 가서 거짓말하고 진짜 사도라고 우기고 있는 사람들보다 모자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너희는 그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왜 나는 외면했느냐? 그들이 너희에게 (여기식으로 말하면)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했다 그런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와서 자신의 지위를 권력화한 것 같다.
●권력과 권위는 다르다.
권력은 힘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을 권력이라 하고, 권위란 진리로 모두를 섬기는 것을 권위라 한다. 권위는 섬긴다. 권력은 지배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해서 권력에 대하여 무릎을 꿇지 권위에 대하여 무릎을 꿇지 않는다.
이것이 모두에게나 어쩌면 제일 어려운 시험일 것이다.
우리들이 일을 잘하고 싶은 것이 권력지향적이지 않아야 한다. 모두가 한방에 감동하고 무릎 꿇는 일이 생기기기를 바라는 그런 건 잘하는 일이라 그러지 않는다.
일을 잘하는 거란 매일 한끼 밥을 먹는 것과 같다. 기억나지 않는 메뉴가 제대로 한 일이다.
자식들 한테 `너희 평생에 제일 맛있었던 게 뭐야?` `외식에서 불고기 먹은 것 무슨 요리 먹은 거지 , 집에서 무슨 매일 반복해서 먹은 걸 누가 기억하겠는가? 그러나 자식들이 큰 건 매일 해먹인 그 밥에 그 나물이지, 기억나는 요리가 아니다.
요리야 물론 맛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특별한 기억, 특별한 경우고, 잘하는 일이란 끊임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자식을 길러내는 이런 수고들이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고,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 광야, 바다,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한 이 모든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면 못 견딘다.
그렇다면 이것을 이렇게 열거해 보면. 이런 고생을 안 한 해가 없었던 것 같다. 매년 뭔가 늘 뭔가를 당했는데,
모세를 생각할 때 모세가 사십 세 때 그, 분연히 일어나 동족을 위하여 헌신했던 그 장면이 많은 불면의 밤과 갈등 속에서 결론에 이르렀던, 그래서 일어났던 것이었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었던 사건처럼, 그리고 그 후에 미디안에 도망가서 사십년을 그저 밟히고 잊히고 부서지고, 모든 생각도 고민도 분노도 없어진, 무슨 기대와 원망마저 없어진 시점에 다시 부름을 받는 것같이, 그 사이사이를 어떻게 견뎠냐 이거다.
모세는 어떻게 견뎠나?
물론 당연히 갈등하고 분노하고 원망하고 그렇게 견뎠다.
그럼 여기 고린도후서에 있는 말들을 보자. 사십에 하나 감한 매, 서른아홉 대짜리 이 매는 유대인 법에 서른아홉 대 때리는 것은 최고의 형이다. 왜 사십 대는 못 때리냐 하면 그럼 죽는다 이거다. 죽게 때릴 거면 그냥 사형을 시키라는 거다. 사형을 시키지 않는 최고의 형벌, 서른아홉 대를 치는, 우리로 얘기하면 곤장을 때리는 것과 같겠다. 이런 한번 맞으면 육개월에서 일년은 몸조리를 해야 걸어 다닐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 태장으로 맞고. 아마 이게 우리로 말하면 곤장에 해당할까. 한번 돌로 맞아서 죽은 줄 알고 내다 버렸었다. 그리고 세번 파선하고. 강, 바다, 파선, 강도, 사기꾼, 이방인, 이 모든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여러 고난들 사이사이는 뭘로 견뎠을까?
무얼로 견뎠기 때문에 다음 일을 당한 것 아닌가? 이걸 그냥 한꺼번에 열거하지 말고, 그 한가지 일을 당했는데 간신히 원망과 절망과 뭐 어떤 견딜 수 없었던 자리에서 간신히 회복되면, 다음 일이 또 닥치고, 간신히 일어서면, 또 다음 일이 또 닥치고.. 하는 생애를 살았던 것이다.
우리는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이 옥에 갇혀서 쓴 편지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가장 잘 상상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있다. 빌립보서 1장에서는 `내가 옥에 갇혔다고 해서 너희 걱정하지 마라. 내가 옥에 갇히니까 다른 사람들이 내가 옥에 갇혀서 복음이 끊일까봐 자기가 열심내지 않던 것을 열심내서 복음을 전하더라. 또 어떤 이들은 나를 시기해서 내가 옥에 갇히니까 `거 봐라, 저 바울은 거짓 사도고 내가 진짜다` 하고 일어서서 설치더라, 아무러면 어떠냐?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 아니냐?`그렇게 외친다. 굉장하다.
그는 또 이렇게 얘기한다; `이 감옥에서 내가 살아나갈지 죽어나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걸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으면 예수께서 부르신 길을 가야 하는데, 예수께서 이제 됐다 하고 부르신다면 그것 또 기쁜 일 아니냐? 그러니 내가 산 들, 죽은 들 뭐가 나한테 답답한 일이 있겠느냐? 그러나 나보고 선택을 하라면 내가 살겠다. 왜? 살아서 너희를 위하여 고생도 하겠다.`
굉장하다. 죽는 게 더 좋다. 죽는 게 더 편하다. 솔직히 얘기한다; `죽어서 주와 함께 있는 게 더 좋으나, 너희를 위하여 너희 자랑을 위하여 내가 살기를 원한다`
그리고 2장에 가면 뭐가 나오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영광의 본체시나 그 자리를 비우고 사람의 몸으로 내려와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것을 하나님의 가장 큰 영광으로 삼았다` 굉장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명령을 따르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는 아들의 모습으로 자신의 영광을 증명하기를 기뻐하신다고 한다.
어떤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은 폭력이 요구하는 굴복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분이다. 우리를 위하여 지실 수 있고 죽을 수 있고 기다릴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울 수 있는 하나님이다.
`그 아들을 보내어 우리에게 살아있는 인생으로 이 사실을 증명해 냈다`
여러분, 더 건강했으면 좋겠는가? 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으면 좋겠는가? 더 좋은 의지할만한 재정이 있으면 좋겠는가? 그런 것은 다 배설물 같다고 말한다. 굉장하다.
바울의 인생에 기가막힌 곡절은 이거다; 그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그는 율법사이고 그는 랍비고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대적했다. 기가 막히지 않은가?
그를 하나님이 모태 중에 택한 하나님의 사도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스데반을 죽이는 자리까지 가도록 놓아두고 그 다음에야 부는다.
이 반전은 뭘 의미하나?
우리가 그토록 갖고 싶은 어떤 조건들, 하나님이 그것 다 필요 없다고 한다.
출애굽 사건을 볼 때마다 가장 놀라운 게,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거다.
돌에서는 물이 나오면 안되는 거다. 땅에서 물이 나오면 말이 되지만, 돌에서는 물이 나올 수 없다.
복음이란 그런 것이다. 바윗돌에서 물이 나오는 거다. 물이 나올 수가 없는데서 물이 나온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릇을 탓하지 않는다.
그러니 여러분 믿음을 갖고 일해야 된다.
●믿음이란 뭐냐?
부르심에 '순종'하는 거다. 순종할 때, 순종의 실제 내용은 뭐냐? 막막한 거다. 막막한 것.
여러분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예수가 무얼 하셨는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아셨다면 충분하다.
더이상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얘기한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거다.
●죽은 자란 뭔가?
예수를 몰라 본 자리, 예수를 못 박은 거기서부터,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는 무덤을 거쳐 예수의 부활에 부름을 받아 예수를 대적하고 그를 친히 못 박고 자기 죄 때문에 죽은 무덤에 장사된 자리에서 부름을 받은 자리로 나아가는 인생을 살기로 한다.
자기가 그랬고, 자기가 전할 복음의 대상들이 이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그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을 시도 때도 없이 외쳐가지고, 이 과정, 대적하는 것 무지 속에서 고집 부르는 것, 말도 안되는 폭력을 쓰는 것 이런 시간들을 참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과 함께 죽어야 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부활에 참여하는 일을 하셔야 된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우린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디까지 일을 하실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오늘 내가 살아있고 오늘 내가 만나는 나의 양떼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가 누구신지를 전하고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예수를 믿어서 알게 된 차별화 된 성도의 삶이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는 것만 안다.
●완벽을 요구하지 않는다. 한걸음 나아가자고, 하루만큼 가자고 얘기하는 거다.
그래서 4장에 가면;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 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놀라운 고백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을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말라. 내가 예수 안에 있고 내가 믿는 예수가 나의 인생과 나의 사역을 지키고 계신다는 사실 안에서 `나는 무슨 일이라도 당할 수 있다` 그런 뜻이다.
지금 뭘 당했는데?
오해받고 핍박받고 억울하게 잡혀있다. 이거 당할 수 있다.
내가 감옥에 갇힌 걸 보고 빌립보 교회가 위로하러 왔다. 위문품도 가지고 왔다.
`내가 부족한 것을 가지고 와서 고맙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동참한 것으로 인하여 내가 기뻐하노라 나는 궁핍과 풍부에도 모든 일체의 비결을 가진 자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못할 것이 없다` 그런 고백이다.
그러니 다시 고린도후서 11장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런 모든 나열들이 넋두리도 아니요, 분노에서 내뱉는 어떤 반증으로서의 공격도 아니요,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앞의 고생들을 나열하는 끝마무리. 그리고 그다음 잇는 말을 보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잘 난 척하는 것이 아니다. `넌 왜 이렇게 해? 왜 넌 못해?` 이런 말 하는 것 아니다.
동참하는, 동등한 차원에서의 공감.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기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바울은, 이미 부활을 알고 있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고난의 과정을 거쳐 부활의 결과를 가야 된다는 그 과정을 기꺼이 살고 있다.
정답을 아는 자의 그 쓸데없는 해설은 없다. 동참을 한다. 눈물에 동참하고, 분노에 동참하고, 기쁨에 동참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자라나는 일에 기쁨으로 기대를 걸고 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훌륭하냐,라는 얘기하려는 것 아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부름 받고 있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우리가 얼마나 억울하고 힘이 드냐?는 아무리 얘기해 봤자 소용이 없는 일이다.
우리가 맡은 명예가 있고, 우리가 짊어지는 영광의 인생이, 사명이 있다. 그것을 즐겨야 된다.
아무도 부르지 않으시고 나를, 바로 나를 하나님이 부르셨다. 스데반을 죽이고 부름을 받은 바울같이, 우리 각각이 부름을 받았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과 성실하심과 권능을 믿고, 오늘 하루도 승리하시는 우리가 돼야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우리를 고난으로 데려가고,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며,
우리의 하루가 섬김과 비명의 하루로 연결된다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이걸 믿어야 한다.
우리가 약할 때 강하고,
강한 것이 해결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며, 인내와 섬김과 순종이 우리의 매일에 최고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한다.
(*일목22)
(고후11:16-33)
사도바울이 이제 어지간히 화가 나기도 했고 그 한 인간의 어떤 한계의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멋있다. 언제나 완벽할 수 없는 노릇이고, 분노도 한번씩 터뜨려야 하고 도망도 가야 하고 하는 게 우리의 실력인데, 현실은 우리가 소원하는 것만큼 우리가 기도한 것만큼 보상이 되지 않고. 한계를 벗어나게 도전과 시험이 있다.
그래서 가끔 우리도 이렇게 도를 넘을 때가 있는데, 오늘 이 말씀 보고 위로받으시길 바란다.
예전에 잘못한 일 같은 것으로 너무 마음에 두고 그게 트라우마가 되는 일 없길 바란다.
여기도 표현한 대로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이런 표현은 정말 바울이 화가 날 대로 난 것을 보여준다.
나도 너희한테 가서 거짓말하고 진짜 사도라고 우기고 있는 사람들보다 모자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너희는 그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왜 나는 외면했느냐? 그들이 너희에게 (여기식으로 말하면)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했다 그런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와서 자신의 지위를 권력화한 것 같다.
●권력과 권위는 다르다.
권력은 힘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을 권력이라 하고, 권위란 진리로 모두를 섬기는 것을 권위라 한다. 권위는 섬긴다. 권력은 지배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해서 권력에 대하여 무릎을 꿇지 권위에 대하여 무릎을 꿇지 않는다.
이것이 모두에게나 어쩌면 제일 어려운 시험일 것이다.
우리들이 일을 잘하고 싶은 것이 권력지향적이지 않아야 한다. 모두가 한방에 감동하고 무릎 꿇는 일이 생기기기를 바라는 그런 건 잘하는 일이라 그러지 않는다.
일을 잘하는 거란 매일 한끼 밥을 먹는 것과 같다. 기억나지 않는 메뉴가 제대로 한 일이다.
자식들 한테 `너희 평생에 제일 맛있었던 게 뭐야?` `외식에서 불고기 먹은 것 무슨 요리 먹은 거지 , 집에서 무슨 매일 반복해서 먹은 걸 누가 기억하겠는가? 그러나 자식들이 큰 건 매일 해먹인 그 밥에 그 나물이지, 기억나는 요리가 아니다.
요리야 물론 맛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특별한 기억, 특별한 경우고, 잘하는 일이란 끊임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자식을 길러내는 이런 수고들이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고,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 광야, 바다,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한 이 모든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면 못 견딘다.
그렇다면 이것을 이렇게 열거해 보면. 이런 고생을 안 한 해가 없었던 것 같다. 매년 뭔가 늘 뭔가를 당했는데,
모세를 생각할 때 모세가 사십 세 때 그, 분연히 일어나 동족을 위하여 헌신했던 그 장면이 많은 불면의 밤과 갈등 속에서 결론에 이르렀던, 그래서 일어났던 것이었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었던 사건처럼, 그리고 그 후에 미디안에 도망가서 사십년을 그저 밟히고 잊히고 부서지고, 모든 생각도 고민도 분노도 없어진, 무슨 기대와 원망마저 없어진 시점에 다시 부름을 받는 것같이, 그 사이사이를 어떻게 견뎠냐 이거다.
모세는 어떻게 견뎠나?
물론 당연히 갈등하고 분노하고 원망하고 그렇게 견뎠다.
그럼 여기 고린도후서에 있는 말들을 보자. 사십에 하나 감한 매, 서른아홉 대짜리 이 매는 유대인 법에 서른아홉 대 때리는 것은 최고의 형이다. 왜 사십 대는 못 때리냐 하면 그럼 죽는다 이거다. 죽게 때릴 거면 그냥 사형을 시키라는 거다. 사형을 시키지 않는 최고의 형벌, 서른아홉 대를 치는, 우리로 얘기하면 곤장을 때리는 것과 같겠다. 이런 한번 맞으면 육개월에서 일년은 몸조리를 해야 걸어 다닐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 태장으로 맞고. 아마 이게 우리로 말하면 곤장에 해당할까. 한번 돌로 맞아서 죽은 줄 알고 내다 버렸었다. 그리고 세번 파선하고. 강, 바다, 파선, 강도, 사기꾼, 이방인, 이 모든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여러 고난들 사이사이는 뭘로 견뎠을까?
무얼로 견뎠기 때문에 다음 일을 당한 것 아닌가? 이걸 그냥 한꺼번에 열거하지 말고, 그 한가지 일을 당했는데 간신히 원망과 절망과 뭐 어떤 견딜 수 없었던 자리에서 간신히 회복되면, 다음 일이 또 닥치고, 간신히 일어서면, 또 다음 일이 또 닥치고.. 하는 생애를 살았던 것이다.
우리는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이 옥에 갇혀서 쓴 편지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가장 잘 상상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있다. 빌립보서 1장에서는 `내가 옥에 갇혔다고 해서 너희 걱정하지 마라. 내가 옥에 갇히니까 다른 사람들이 내가 옥에 갇혀서 복음이 끊일까봐 자기가 열심내지 않던 것을 열심내서 복음을 전하더라. 또 어떤 이들은 나를 시기해서 내가 옥에 갇히니까 `거 봐라, 저 바울은 거짓 사도고 내가 진짜다` 하고 일어서서 설치더라, 아무러면 어떠냐?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 아니냐?`그렇게 외친다. 굉장하다.
그는 또 이렇게 얘기한다; `이 감옥에서 내가 살아나갈지 죽어나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걸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으면 예수께서 부르신 길을 가야 하는데, 예수께서 이제 됐다 하고 부르신다면 그것 또 기쁜 일 아니냐? 그러니 내가 산 들, 죽은 들 뭐가 나한테 답답한 일이 있겠느냐? 그러나 나보고 선택을 하라면 내가 살겠다. 왜? 살아서 너희를 위하여 고생도 하겠다.`
굉장하다. 죽는 게 더 좋다. 죽는 게 더 편하다. 솔직히 얘기한다; `죽어서 주와 함께 있는 게 더 좋으나, 너희를 위하여 너희 자랑을 위하여 내가 살기를 원한다`
그리고 2장에 가면 뭐가 나오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영광의 본체시나 그 자리를 비우고 사람의 몸으로 내려와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것을 하나님의 가장 큰 영광으로 삼았다` 굉장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명령을 따르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는 아들의 모습으로 자신의 영광을 증명하기를 기뻐하신다고 한다.
어떤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은 폭력이 요구하는 굴복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분이다. 우리를 위하여 지실 수 있고 죽을 수 있고 기다릴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울 수 있는 하나님이다.
`그 아들을 보내어 우리에게 살아있는 인생으로 이 사실을 증명해 냈다`
여러분, 더 건강했으면 좋겠는가? 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으면 좋겠는가? 더 좋은 의지할만한 재정이 있으면 좋겠는가? 그런 것은 다 배설물 같다고 말한다. 굉장하다.
바울의 인생에 기가막힌 곡절은 이거다; 그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그는 율법사이고 그는 랍비고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대적했다. 기가 막히지 않은가?
그를 하나님이 모태 중에 택한 하나님의 사도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스데반을 죽이는 자리까지 가도록 놓아두고 그 다음에야 부는다.
이 반전은 뭘 의미하나?
우리가 그토록 갖고 싶은 어떤 조건들, 하나님이 그것 다 필요 없다고 한다.
출애굽 사건을 볼 때마다 가장 놀라운 게,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거다.
돌에서는 물이 나오면 안되는 거다. 땅에서 물이 나오면 말이 되지만, 돌에서는 물이 나올 수 없다.
복음이란 그런 것이다. 바윗돌에서 물이 나오는 거다. 물이 나올 수가 없는데서 물이 나온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릇을 탓하지 않는다.
그러니 여러분 믿음을 갖고 일해야 된다.
●믿음이란 뭐냐?
부르심에 '순종'하는 거다. 순종할 때, 순종의 실제 내용은 뭐냐? 막막한 거다. 막막한 것.
여러분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예수가 무얼 하셨는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아셨다면 충분하다.
더이상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얘기한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거다.
●죽은 자란 뭔가?
예수를 몰라 본 자리, 예수를 못 박은 거기서부터,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는 무덤을 거쳐 예수의 부활에 부름을 받아 예수를 대적하고 그를 친히 못 박고 자기 죄 때문에 죽은 무덤에 장사된 자리에서 부름을 받은 자리로 나아가는 인생을 살기로 한다.
자기가 그랬고, 자기가 전할 복음의 대상들이 이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그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을 시도 때도 없이 외쳐가지고, 이 과정, 대적하는 것 무지 속에서 고집 부르는 것, 말도 안되는 폭력을 쓰는 것 이런 시간들을 참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과 함께 죽어야 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부활에 참여하는 일을 하셔야 된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우린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디까지 일을 하실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오늘 내가 살아있고 오늘 내가 만나는 나의 양떼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가 누구신지를 전하고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예수를 믿어서 알게 된 차별화 된 성도의 삶이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는 것만 안다.
●완벽을 요구하지 않는다. 한걸음 나아가자고, 하루만큼 가자고 얘기하는 거다.
그래서 4장에 가면;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 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놀라운 고백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을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말라. 내가 예수 안에 있고 내가 믿는 예수가 나의 인생과 나의 사역을 지키고 계신다는 사실 안에서 `나는 무슨 일이라도 당할 수 있다` 그런 뜻이다.
지금 뭘 당했는데?
오해받고 핍박받고 억울하게 잡혀있다. 이거 당할 수 있다.
내가 감옥에 갇힌 걸 보고 빌립보 교회가 위로하러 왔다. 위문품도 가지고 왔다.
`내가 부족한 것을 가지고 와서 고맙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동참한 것으로 인하여 내가 기뻐하노라 나는 궁핍과 풍부에도 모든 일체의 비결을 가진 자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못할 것이 없다` 그런 고백이다.
그러니 다시 고린도후서 11장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런 모든 나열들이 넋두리도 아니요, 분노에서 내뱉는 어떤 반증으로서의 공격도 아니요,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앞의 고생들을 나열하는 끝마무리. 그리고 그다음 잇는 말을 보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잘 난 척하는 것이 아니다. `넌 왜 이렇게 해? 왜 넌 못해?` 이런 말 하는 것 아니다.
동참하는, 동등한 차원에서의 공감.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기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바울은, 이미 부활을 알고 있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고난의 과정을 거쳐 부활의 결과를 가야 된다는 그 과정을 기꺼이 살고 있다.
정답을 아는 자의 그 쓸데없는 해설은 없다. 동참을 한다. 눈물에 동참하고, 분노에 동참하고, 기쁨에 동참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자라나는 일에 기쁨으로 기대를 걸고 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훌륭하냐,라는 얘기하려는 것 아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부름 받고 있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우리가 얼마나 억울하고 힘이 드냐?는 아무리 얘기해 봤자 소용이 없는 일이다.
우리가 맡은 명예가 있고, 우리가 짊어지는 영광의 인생이, 사명이 있다. 그것을 즐겨야 된다.
아무도 부르지 않으시고 나를, 바로 나를 하나님이 부르셨다. 스데반을 죽이고 부름을 받은 바울같이, 우리 각각이 부름을 받았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과 성실하심과 권능을 믿고, 오늘 하루도 승리하시는 우리가 돼야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우리를 고난으로 데려가고,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며,
우리의 하루가 섬김과 비명의 하루로 연결된다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이걸 믿어야 한다.
우리가 약할 때 강하고,
강한 것이 해결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며, 인내와 섬김과 순종이 우리의 매일에 최고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한다.
(*일목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