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일목24_부모의 마음으로, 주 예수의 마음으로, 용서 기다림 긍휼 자비 사랑 섬김으로 내 자리를 감당하는
nazunzaro
2020. 6. 5. 12:17
사도바울은 억울합니다. 많은 고생과 많은 희생을 가지고 고린도 교회를 세웠고 힘을 다하여 가르쳤는데,
돌아온 것은 감사가 아니라 비난이고, 더더욱 가슴 아픈 일이 복음의 정수, 복음의 핵심을 떠나서 거짓 교사들의 권면의 유혹을 받아 자랑하는 것이 되고만 그들의 신앙 이해가 바울로서는 너무 속이 상합니다.
일상 세상살이에서 모든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가지는 가장 큰 시험은 누구를 의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의심은 밑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연연해서 그다음의 다른 행동들, 다른 일로 모여서 대화를 할 때,
어딘가 이상하게 마음에 그 날이 선 분노가 나에게 남아있게 됩니다.
그것을 잘 감추셔야 됩니다. 그걸 지워버릴 실력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이렇게 그냥 그날 몸 컨디션이 좀 나쁜 걸 잘 감당하듯이 이렇게 속이 잘 견디셔야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건강에 무슨 일이 있으세요? 얼굴이 좋지 않아 보여요` 그럴 때 `나 사실은 아파요`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됩니다.
부모 마음이 되셔야 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걱정을 끼치면 안 됩니다. `엄마 오늘 얼굴이 왜 그래?`
`아, 오늘 늦잠을 자서 그래, 부스스해서 그렇지, 엄마 세수하고 분 바르고 할게` 이렇게 얘기하듯이
신자인 우리는 늘 사람들에게 그 개인의 일로 걱정거리가 되거나 분노를 터뜨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이런 일로 인해서 여러분은 멋지게 잘 견디셔야 됩니다.
* 그래서 [현실을 살아간다 것은, 이웃들을 아주 중요하게, 그리고 자녀로 여겨야 합니다]. 자녀로.
* 믿음의 동지나 무슨 하나님 일의 동료거나 이런 것 다 아니고 가장 중요하게 자녀로 여겨야 됩니다.
* 우리 인간이 보상없이 희생을 할 수 있는 대상은 자녀밖에 없습니다.
자녀들에게는 억울해도 좋고 자녀가 못되게 놀아도 좋고, 자녀가 섭섭해도 좋습니다.
뭐만 되면 되죠? 자녀가 잘되기만 하면 됩니다.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마음이고 우리를 불러 거기에 동참시키는 하나님의 특별한 복입니다.
자녀가 크면 알죠. '아, 우리 엄마가 그때 그랬구나, 우리 아버지가 그때 그랬구나, 참 힘들었셨겠구나..' 그런 고백들을 다하게 되는데,
나중에 이렇게 후회하고 옛날에 좀 더 잘했을 걸, 이라는 생각이 꼭 여러분으로 하여금 `나이 먹어서는 더 잘해야 된다`라는 현실이 되게 해야 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노릇 잘해야 되고, 나이 든 값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지금 잘 해야 되는 것이, 나중에 나이가 붙어서 나이 든 사람이 되면 정말로 멋진 자리, 멋진 실력의 자리에 가게 된다고 믿고 살아내셔야 됩니다.
가정, 교회, 직장 등 사회공동체에서 위험한 일들이 생기고 시비를 가려야 되는 그런 일들이 생기면
신자된 우리도 속 얘기를 다하고 그 가지고 있는 억울함 들을 다 토로하는 예가 있는데, 잘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식들한테 부모가 얼마나 힘든가 얘기하는 것하고 똑같습니다. 그렇게 안 하는 겁니다.
내일 밥 지을 쌀이 없어도 자식들한테는 그 말하지 않습니다. 자식들 밥 먹이고 재워놓고 밤에 어디를 가서 얻어오든 무슨 수를 쓰던,
아니면 아침에 일어나서 정말 방법이 없어서, `얘들아, 글쎄 밤에 도둑이 와서 쌀독 채 집어 갔단다` 그렇게 말하는 법이지,
`내가 얼마나 애쓰고 노력했는데도 밥 먹을 것 없게 된 지 아냐? 너희들은 밤낮 때만 되면 밥만 달라냐?` 그러지 않는 겁니다.
그엠대한 [예수님의 모범]이 어디나 있죠;
`주여 오늘 낙원에 이를 때에 저를 기억하소서`라고 하니까, "임마,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아냐? 넌 네 잘못으로 죽는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하냐?" 그렇게 대꾸 안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렇게 말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와 보라. 네가 다른 사람은 죽은 사람은 살려냈는데 왜 너는 죽냐? 내려와 보라`라고 하니까,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하십니다.
불쌍히 여겼다, 용서했다, 이런 단어들 말고, 이 지위, 이 신분을 생각하라고요. [부모가 자식에게 가지는 마음]. 자식이 엄마 쌀 사려고 감추어놓은 돈 갖고 도망갔으면, 자식을 돈 갖고 간 것 때문에 찾아요? 가서 어디 사기나 당하고 허랑방탕하고 굶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 찾죠. 그렇지 않나요?
그게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이 걸으신 길, 그게 우리가 믿는 이 복음입니다.
이게 왜 복음이겠어요?
하나님이 부모로서 우리를 대하신다, 우리를 그 사랑하는 자식으로 대하셔서 `우리를 위해서라면 하나님이 뭐든지 양보하실 수 있고, 질 수 있다`라고 말하십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런 거야'라는 식의 훈계는 사실 성경엔 그렇게 자주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건 사람들이 하는 방법이고,
* [하나님은 애타 하시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잡아오는 걸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십니다.
제자들이 물었죠. `주님 우리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했을 때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해라"
*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많이 양보하시는 것은 하나님에게 무슨, 하나님에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문제를 고치고, 채우고, 자라게 하고, 영광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일들을 모두 고치고 다듬고 새로 채우고 하는 일들로 인하여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는 것이죠.
* 그래서 신자가 된다 그러면 우리는 정말 세상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같이 우리는 빛입니다. 우리만이 소망이 되는 겁니다.
[저 사람들은 무엇을 가졌길래 저렇게 넉넉할까? 저렇게 따뜻할까? 저렇게 모든 것을 견딜까? 보복하지 않고 분내지 않고 어떻게 어떻게 다 끌어안을 수 있을까? 그렇게 우리는 하나의 기적으로 증인으로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너무나 소중하죠. 우리를 보는 우리들 이웃 앞에 [우리는 정말 귀한,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로 천국을 만들겠다고 우리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있는 자리, 사람들을 만나는 모든 생활의 현장에서 여러분 가슴에 일어나는 어떤 무력감, 어떤 원망, 어떤 한계와 절망들이 있을 지라도,
부모는 그 모든 것을 자식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내가 진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은 그걸 십자가까지 지셨다, 그리고 십자가가 끝이 아니고, 부활하사, 우리를 보내셨다` 이런 믿음으로 이 인생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된 내가 잘 해야 이웃들이 살고, 그래야 모두가 빛이 나고, 영광이 되고,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모든 세상 앞에 빛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 인생살이가 (출세하고 성공하고 돈을 버는) 방법론이 되거나 이해관계가 되어 보상과 그 영광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부모로서 살게 하신, 그리하여 하나님 일하시는 일에 동역자로 부름을 받은, 이 세상에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귀한 삶을 맡고 있다는,
그 영광을 아시는 감사로 승리하시는 여러분의 신자 된 책임, 일상, 그리고 기적의 현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린 실력 없는 사람들입니다.
일희일비하고 분노하고 보복하고 원망하고 울며 불며 억울해하는 것이 전부인 실력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천국을 완성하며 그 백성들을 부르며 기르며 영광된 자리까지 완성하시겠다고 그렇게 우리를 세웠습니다.
주께서 못하실 일이 없으신데, 죽은 자도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있고 문둥병도 고치시고, 못할 것이 없으시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지신 것같이,
우리에게 못할 것이 없는 능력보다 더 큰 우리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귀한 신자된 자리를 주셨습니다.
*부모의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의 마음으로, 용서와 기다림과 긍휼과 자비와 무엇보다 사랑과 섬김으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자리를 감당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가 섬기는 가정과 일터와 이 사회와 이 세대에 놀랍게 놀랍게 높여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일목24에서)
돌아온 것은 감사가 아니라 비난이고, 더더욱 가슴 아픈 일이 복음의 정수, 복음의 핵심을 떠나서 거짓 교사들의 권면의 유혹을 받아 자랑하는 것이 되고만 그들의 신앙 이해가 바울로서는 너무 속이 상합니다.
일상 세상살이에서 모든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가지는 가장 큰 시험은 누구를 의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의심은 밑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연연해서 그다음의 다른 행동들, 다른 일로 모여서 대화를 할 때,
어딘가 이상하게 마음에 그 날이 선 분노가 나에게 남아있게 됩니다.
그것을 잘 감추셔야 됩니다. 그걸 지워버릴 실력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이렇게 그냥 그날 몸 컨디션이 좀 나쁜 걸 잘 감당하듯이 이렇게 속이 잘 견디셔야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건강에 무슨 일이 있으세요? 얼굴이 좋지 않아 보여요` 그럴 때 `나 사실은 아파요`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됩니다.
부모 마음이 되셔야 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걱정을 끼치면 안 됩니다. `엄마 오늘 얼굴이 왜 그래?`
`아, 오늘 늦잠을 자서 그래, 부스스해서 그렇지, 엄마 세수하고 분 바르고 할게` 이렇게 얘기하듯이
신자인 우리는 늘 사람들에게 그 개인의 일로 걱정거리가 되거나 분노를 터뜨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이런 일로 인해서 여러분은 멋지게 잘 견디셔야 됩니다.
* 그래서 [현실을 살아간다 것은, 이웃들을 아주 중요하게, 그리고 자녀로 여겨야 합니다]. 자녀로.
* 믿음의 동지나 무슨 하나님 일의 동료거나 이런 것 다 아니고 가장 중요하게 자녀로 여겨야 됩니다.
* 우리 인간이 보상없이 희생을 할 수 있는 대상은 자녀밖에 없습니다.
자녀들에게는 억울해도 좋고 자녀가 못되게 놀아도 좋고, 자녀가 섭섭해도 좋습니다.
뭐만 되면 되죠? 자녀가 잘되기만 하면 됩니다.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마음이고 우리를 불러 거기에 동참시키는 하나님의 특별한 복입니다.
자녀가 크면 알죠. '아, 우리 엄마가 그때 그랬구나, 우리 아버지가 그때 그랬구나, 참 힘들었셨겠구나..' 그런 고백들을 다하게 되는데,
나중에 이렇게 후회하고 옛날에 좀 더 잘했을 걸, 이라는 생각이 꼭 여러분으로 하여금 `나이 먹어서는 더 잘해야 된다`라는 현실이 되게 해야 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노릇 잘해야 되고, 나이 든 값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지금 잘 해야 되는 것이, 나중에 나이가 붙어서 나이 든 사람이 되면 정말로 멋진 자리, 멋진 실력의 자리에 가게 된다고 믿고 살아내셔야 됩니다.
가정, 교회, 직장 등 사회공동체에서 위험한 일들이 생기고 시비를 가려야 되는 그런 일들이 생기면
신자된 우리도 속 얘기를 다하고 그 가지고 있는 억울함 들을 다 토로하는 예가 있는데, 잘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식들한테 부모가 얼마나 힘든가 얘기하는 것하고 똑같습니다. 그렇게 안 하는 겁니다.
내일 밥 지을 쌀이 없어도 자식들한테는 그 말하지 않습니다. 자식들 밥 먹이고 재워놓고 밤에 어디를 가서 얻어오든 무슨 수를 쓰던,
아니면 아침에 일어나서 정말 방법이 없어서, `얘들아, 글쎄 밤에 도둑이 와서 쌀독 채 집어 갔단다` 그렇게 말하는 법이지,
`내가 얼마나 애쓰고 노력했는데도 밥 먹을 것 없게 된 지 아냐? 너희들은 밤낮 때만 되면 밥만 달라냐?` 그러지 않는 겁니다.
그엠대한 [예수님의 모범]이 어디나 있죠;
`주여 오늘 낙원에 이를 때에 저를 기억하소서`라고 하니까, "임마,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아냐? 넌 네 잘못으로 죽는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하냐?" 그렇게 대꾸 안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렇게 말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와 보라. 네가 다른 사람은 죽은 사람은 살려냈는데 왜 너는 죽냐? 내려와 보라`라고 하니까,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하십니다.
불쌍히 여겼다, 용서했다, 이런 단어들 말고, 이 지위, 이 신분을 생각하라고요. [부모가 자식에게 가지는 마음]. 자식이 엄마 쌀 사려고 감추어놓은 돈 갖고 도망갔으면, 자식을 돈 갖고 간 것 때문에 찾아요? 가서 어디 사기나 당하고 허랑방탕하고 굶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 찾죠. 그렇지 않나요?
그게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이 걸으신 길, 그게 우리가 믿는 이 복음입니다.
이게 왜 복음이겠어요?
하나님이 부모로서 우리를 대하신다, 우리를 그 사랑하는 자식으로 대하셔서 `우리를 위해서라면 하나님이 뭐든지 양보하실 수 있고, 질 수 있다`라고 말하십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런 거야'라는 식의 훈계는 사실 성경엔 그렇게 자주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건 사람들이 하는 방법이고,
* [하나님은 애타 하시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잡아오는 걸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십니다.
제자들이 물었죠. `주님 우리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했을 때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해라"
*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많이 양보하시는 것은 하나님에게 무슨, 하나님에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문제를 고치고, 채우고, 자라게 하고, 영광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일들을 모두 고치고 다듬고 새로 채우고 하는 일들로 인하여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는 것이죠.
* 그래서 신자가 된다 그러면 우리는 정말 세상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같이 우리는 빛입니다. 우리만이 소망이 되는 겁니다.
[저 사람들은 무엇을 가졌길래 저렇게 넉넉할까? 저렇게 따뜻할까? 저렇게 모든 것을 견딜까? 보복하지 않고 분내지 않고 어떻게 어떻게 다 끌어안을 수 있을까? 그렇게 우리는 하나의 기적으로 증인으로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너무나 소중하죠. 우리를 보는 우리들 이웃 앞에 [우리는 정말 귀한,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로 천국을 만들겠다고 우리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있는 자리, 사람들을 만나는 모든 생활의 현장에서 여러분 가슴에 일어나는 어떤 무력감, 어떤 원망, 어떤 한계와 절망들이 있을 지라도,
부모는 그 모든 것을 자식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내가 진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은 그걸 십자가까지 지셨다, 그리고 십자가가 끝이 아니고, 부활하사, 우리를 보내셨다` 이런 믿음으로 이 인생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된 내가 잘 해야 이웃들이 살고, 그래야 모두가 빛이 나고, 영광이 되고,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모든 세상 앞에 빛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 인생살이가 (출세하고 성공하고 돈을 버는) 방법론이 되거나 이해관계가 되어 보상과 그 영광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부모로서 살게 하신, 그리하여 하나님 일하시는 일에 동역자로 부름을 받은, 이 세상에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귀한 삶을 맡고 있다는,
그 영광을 아시는 감사로 승리하시는 여러분의 신자 된 책임, 일상, 그리고 기적의 현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린 실력 없는 사람들입니다.
일희일비하고 분노하고 보복하고 원망하고 울며 불며 억울해하는 것이 전부인 실력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천국을 완성하며 그 백성들을 부르며 기르며 영광된 자리까지 완성하시겠다고 그렇게 우리를 세웠습니다.
주께서 못하실 일이 없으신데, 죽은 자도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있고 문둥병도 고치시고, 못할 것이 없으시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지신 것같이,
우리에게 못할 것이 없는 능력보다 더 큰 우리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귀한 신자된 자리를 주셨습니다.
*부모의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의 마음으로, 용서와 기다림과 긍휼과 자비와 무엇보다 사랑과 섬김으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자리를 감당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가 섬기는 가정과 일터와 이 사회와 이 세대에 놀랍게 놀랍게 높여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일목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