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일목25_우리가 살면서 매일 반복적으로 만나는 일이 참아야 되는 일 아닌가
nazunzaro
2020. 5. 26. 23:04
(고후 13:1-13)
●예수를 믿는 일은 예수를 아는 일이고, 예수가 구원을 이루시는 방법을 따라가는 것이고, 예수가 목적하신 영생과 영광의 자리에 가는 것입니다.
다 아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예수님이 폭력으로 행사하시지 않았다 하는 것이죠. 그것은 권력이 아니고, 진리와 생명이라는 다만 명분적인 것도 아니고,
<몸소 보이신 지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다만 당신을 내어주어 우리의 손에 맡겨 어리석고 못나고 악한 우리들의 모든 악행을 참으셨습니다>.
참으셨다는 말이 또 하나의 명분이 되지말고 <우리가 살면서 매일 반복적으로 만나는 일이 참아야 되는 일 아닌가요? 참아야 됩니다. 지셔야 됩니다. 섬겨야 됩니다>.
야곱의 얍복나루 사건을 다루면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는 그 문제를 늘 고심했는데, 늦게 확인한 장면은 이것이었습니다;
끝까지 거부하고 반항하는 야곱을 그 환도뼈를 치고 떠나가시는 하나님을 야곱이 붙잡죠. '하나님 축복하시지 않으면 보낼 수 없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야곱입니다' "다시는 네 이름을 야곱이라 부르지 마라. 앞으로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그런데 여기가 상당히 자연스러운 결론이 안 나오거든요. 야곱이라는 이름에서 일종의 축복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이름을 주는 것이 그럼 이름이 뭔가? `야곱의 고집이 통했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그가 붙들고 늘어져서 복을 주었다는 말인가?` 이 사이에서 우리가 사실 좀 혼란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해석이 보다 자연스럽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자식 이기는 아버지 봤냐?"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이 고린도교회가 그들의 신앙이 어떤 우월함이나 지식적으로든 은사적으로든 경쟁적으로든 힘으로 가지려고 해서 일으킨 모든 교회 안에서의 어려움들을 이 문제로 저들에게 답을 제시하죠;
●'기독교 신앙은 섬기는 거란다, 기독교 신앙은 지는 거란다.`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경우도 없이 늘 져야 된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보통 시비가 걸리고 문제가 되는 것은 작은 이해의 관계나 자존심의 문제인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성품적으로 그리고 인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며, 어떠한 존재로 사는가에 관한 이해가 우리로 하여금 나중에는 큰 싸움이 되지만, 사실 시작은 별거 아니었던 모든 시비의 그 시작을 막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걸 이기는 것이 신앙의 승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인 중요한 표를 첫째를 말씀, 둘째를 성례, 셋째를 징계로 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교회의 표지라고 말할 만큼 중요한 책임인데, 징계를 행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렵습니다.
사사건건 징계를 할 수도 없고 또 이 징계에 순응하지 않으면 징계 조처를 취한 것보다 더 부작용이 많은 것이 이 징계입니다.
징계는 분명히 있어야 됩니다. 큰 것들은 쉽죠. 이단이 들어온다든가 무슨 폭력이 있다든가 하는 것들이야 분명히 징계해야 될 문제지만, 그 징계하는 목적을 이해하시면 징계가 벌을 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켜보는 모든 교우들에게 하나의 경각심을 일으키는 방향을 분명하게 하는 그리고 게을러졌던 마음을 다잡는 그런 효과를 가져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범인을 찾아내고 그 범인에게 벌을 주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큰 혼란을 야기할 때에 교회가 이 일을 알고 있고 방향을 제시하고 자세를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 징계를 행하십시오.
누가 그랬느냐, 정말 그랬느냐, 이런 사실 확인은 가장 엄중한 잘못일 때만 그리하시고, 환부를 도려내야 하는 수술을 행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하시면 되는데, 보통 그런 일들은 이렇게 분명해지면 교회를 떠납니다.
그러니까 빨리빨리 범인을 색출하거나 잘못을 시정하는 것이 그런 방법적 결과적인 성과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질서와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어른들이 적어도 장로님들과 교역자들이 이 진정성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징계입니다.
●징계가 이루어지는 그 과정도 그래서 절차가 신속하지 말고 절차가 많게 하십시오.
징계 사안이 당회에 올려지고 의논을 하고 결정을 하고 징계 위원회를 구성하고, 징계위원회들과 함께 어떻게 할 것인가를 또 의논하고 하는 절차들을 길게 가는 동안 어지간한 문제들은 다 자리가 잡힙니다.
그러니까 더 이런 일들은 결과까지 안 가도 되는 경우가 많고, 더더욱 징계라는 말을 정식으로 그 절차를 밟는 징계를 시행하는 일은 그저 할지 모른다 정도에서 교회를 안정시켜야 맞습니다.
사도바울이 여기서 하는 고린도 후서 13장에서 매우 엄중하게 내가 이번에 가면 내가 증인들을 불러서 다 사실들을 확인하고 엄중히 처벌하겠다 하는 말은 떨어져서 편지로 하는 얘기이기 때문에 그리한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그럴 마음은 없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잘못된 신앙을 전하는 것이라면 그는 색출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바울이 마음에 걱정하는 것은 거짓교사들이 아니라 그들로 인하여 잠시 혼란에 빠진 고린도 교회 교인들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을 겁을 줄 마음이 없습니다. 바울을 그들을 안심시키고 그들을 회복시킬 마음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교회에서 우리들이 가져야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부모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어떤 우위, 그의 지위를 확인하려고 이렇게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실제로 신앙의 진전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바라는 게 뭡니까? 자식 잘되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가 자식을 혹 꾸중하고 매질을 하면 자식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애정이지, 부모가 자기의 성질을 이렇게 풀어버리는 것일 수 없습니다.
9절에서도,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세우려고 세웠죠.
우리는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을 비난하거나 믿음이 약한 자들을 비난하도록 심판자로 부름을 받지 않고, 예수를 몰랐던 자들에게 예수를 믿게 하고 예수를 믿은 자들로 건강하고 성숙하고 선과 진리와 생명에서 풍성하게 되는 것을 위하여 세움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서의 그 약속이 여기 바울에게서 다시 확인되고 있죠. 선지자라는 이름이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부모가 공포스러우면 안 되는 것같이 우리는 공포스러우면 안 됩니다.
모든 일의 그 말미가 이렇게 은혜를 나누고 서로 사랑을 나누고 서로 축복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앞의 공포와 고함이 되면 뒤에 이 아름답고 은혜되는 말을 결론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교회 안에 큰 사건은 아니지만, 뭐 징계 위원회를 만들 필요는 없지만 소소한 시비나 또 어려움, 혼란이 생기는 법이죠.
해결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어떤 두 사람 중에 다툼이 일어나면 두고 봅니다. 그래서 한쪽이 '나는 그래서 교회 안 나가' 그러고 교회 떠나면, 남아있는 사람이 그냥 자라는 것으로 취급을 합니다.
또 어느 두 그룹이거나 두 사람이거나 시비가 생기면 보다 신앙이 나은 사람에게 지라고 그럽니다. "내가 알아줄 테니 당신이 참으라 당신이 져라"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잘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존심, 체면이 상하는 것이 제일 분하죠.
●따지고 보면 예수님은 이걸 이기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 이것을 이깁니다.
어려운 요구입니다. 그러나 그리해야 됩니다.
힘내시고 시험과 유혹을 이기시고 망하는 것 같지만 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여러분을 승리케 하는 날까지 믿음 지키시고 인내하시고 큰소리로 찬송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우리의 연약한 것을 들어 쓰셔서 우리가 신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할 수 없는 고집 세고 주장이 강하고 말 안 듣는 영혼들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약속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절망에 부딪힐 때마다 시험 앞에 휘둘릴 때마다 주의 말씀을 기억하게 주옵소서.
주께서 나를 세우셨으니 또한 나를 통하여 저들을 구원하시며 기쁨을 나누게 하시며 승리하시리라 마음 깊이 믿고 오늘 하루도 승리하는 우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일병25)
●예수를 믿는 일은 예수를 아는 일이고, 예수가 구원을 이루시는 방법을 따라가는 것이고, 예수가 목적하신 영생과 영광의 자리에 가는 것입니다.
다 아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예수님이 폭력으로 행사하시지 않았다 하는 것이죠. 그것은 권력이 아니고, 진리와 생명이라는 다만 명분적인 것도 아니고,
<몸소 보이신 지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다만 당신을 내어주어 우리의 손에 맡겨 어리석고 못나고 악한 우리들의 모든 악행을 참으셨습니다>.
참으셨다는 말이 또 하나의 명분이 되지말고 <우리가 살면서 매일 반복적으로 만나는 일이 참아야 되는 일 아닌가요? 참아야 됩니다. 지셔야 됩니다. 섬겨야 됩니다>.
야곱의 얍복나루 사건을 다루면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는 그 문제를 늘 고심했는데, 늦게 확인한 장면은 이것이었습니다;
끝까지 거부하고 반항하는 야곱을 그 환도뼈를 치고 떠나가시는 하나님을 야곱이 붙잡죠. '하나님 축복하시지 않으면 보낼 수 없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야곱입니다' "다시는 네 이름을 야곱이라 부르지 마라. 앞으로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그런데 여기가 상당히 자연스러운 결론이 안 나오거든요. 야곱이라는 이름에서 일종의 축복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이름을 주는 것이 그럼 이름이 뭔가? `야곱의 고집이 통했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그가 붙들고 늘어져서 복을 주었다는 말인가?` 이 사이에서 우리가 사실 좀 혼란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해석이 보다 자연스럽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자식 이기는 아버지 봤냐?"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이 고린도교회가 그들의 신앙이 어떤 우월함이나 지식적으로든 은사적으로든 경쟁적으로든 힘으로 가지려고 해서 일으킨 모든 교회 안에서의 어려움들을 이 문제로 저들에게 답을 제시하죠;
●'기독교 신앙은 섬기는 거란다, 기독교 신앙은 지는 거란다.`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경우도 없이 늘 져야 된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보통 시비가 걸리고 문제가 되는 것은 작은 이해의 관계나 자존심의 문제인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성품적으로 그리고 인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며, 어떠한 존재로 사는가에 관한 이해가 우리로 하여금 나중에는 큰 싸움이 되지만, 사실 시작은 별거 아니었던 모든 시비의 그 시작을 막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걸 이기는 것이 신앙의 승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인 중요한 표를 첫째를 말씀, 둘째를 성례, 셋째를 징계로 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교회의 표지라고 말할 만큼 중요한 책임인데, 징계를 행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렵습니다.
사사건건 징계를 할 수도 없고 또 이 징계에 순응하지 않으면 징계 조처를 취한 것보다 더 부작용이 많은 것이 이 징계입니다.
징계는 분명히 있어야 됩니다. 큰 것들은 쉽죠. 이단이 들어온다든가 무슨 폭력이 있다든가 하는 것들이야 분명히 징계해야 될 문제지만, 그 징계하는 목적을 이해하시면 징계가 벌을 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켜보는 모든 교우들에게 하나의 경각심을 일으키는 방향을 분명하게 하는 그리고 게을러졌던 마음을 다잡는 그런 효과를 가져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범인을 찾아내고 그 범인에게 벌을 주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큰 혼란을 야기할 때에 교회가 이 일을 알고 있고 방향을 제시하고 자세를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 징계를 행하십시오.
누가 그랬느냐, 정말 그랬느냐, 이런 사실 확인은 가장 엄중한 잘못일 때만 그리하시고, 환부를 도려내야 하는 수술을 행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하시면 되는데, 보통 그런 일들은 이렇게 분명해지면 교회를 떠납니다.
그러니까 빨리빨리 범인을 색출하거나 잘못을 시정하는 것이 그런 방법적 결과적인 성과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질서와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어른들이 적어도 장로님들과 교역자들이 이 진정성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징계입니다.
●징계가 이루어지는 그 과정도 그래서 절차가 신속하지 말고 절차가 많게 하십시오.
징계 사안이 당회에 올려지고 의논을 하고 결정을 하고 징계 위원회를 구성하고, 징계위원회들과 함께 어떻게 할 것인가를 또 의논하고 하는 절차들을 길게 가는 동안 어지간한 문제들은 다 자리가 잡힙니다.
그러니까 더 이런 일들은 결과까지 안 가도 되는 경우가 많고, 더더욱 징계라는 말을 정식으로 그 절차를 밟는 징계를 시행하는 일은 그저 할지 모른다 정도에서 교회를 안정시켜야 맞습니다.
사도바울이 여기서 하는 고린도 후서 13장에서 매우 엄중하게 내가 이번에 가면 내가 증인들을 불러서 다 사실들을 확인하고 엄중히 처벌하겠다 하는 말은 떨어져서 편지로 하는 얘기이기 때문에 그리한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그럴 마음은 없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잘못된 신앙을 전하는 것이라면 그는 색출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바울이 마음에 걱정하는 것은 거짓교사들이 아니라 그들로 인하여 잠시 혼란에 빠진 고린도 교회 교인들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을 겁을 줄 마음이 없습니다. 바울을 그들을 안심시키고 그들을 회복시킬 마음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교회에서 우리들이 가져야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부모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어떤 우위, 그의 지위를 확인하려고 이렇게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실제로 신앙의 진전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바라는 게 뭡니까? 자식 잘되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가 자식을 혹 꾸중하고 매질을 하면 자식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애정이지, 부모가 자기의 성질을 이렇게 풀어버리는 것일 수 없습니다.
9절에서도,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세우려고 세웠죠.
우리는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을 비난하거나 믿음이 약한 자들을 비난하도록 심판자로 부름을 받지 않고, 예수를 몰랐던 자들에게 예수를 믿게 하고 예수를 믿은 자들로 건강하고 성숙하고 선과 진리와 생명에서 풍성하게 되는 것을 위하여 세움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서의 그 약속이 여기 바울에게서 다시 확인되고 있죠. 선지자라는 이름이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부모가 공포스러우면 안 되는 것같이 우리는 공포스러우면 안 됩니다.
모든 일의 그 말미가 이렇게 은혜를 나누고 서로 사랑을 나누고 서로 축복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앞의 공포와 고함이 되면 뒤에 이 아름답고 은혜되는 말을 결론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교회 안에 큰 사건은 아니지만, 뭐 징계 위원회를 만들 필요는 없지만 소소한 시비나 또 어려움, 혼란이 생기는 법이죠.
해결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어떤 두 사람 중에 다툼이 일어나면 두고 봅니다. 그래서 한쪽이 '나는 그래서 교회 안 나가' 그러고 교회 떠나면, 남아있는 사람이 그냥 자라는 것으로 취급을 합니다.
또 어느 두 그룹이거나 두 사람이거나 시비가 생기면 보다 신앙이 나은 사람에게 지라고 그럽니다. "내가 알아줄 테니 당신이 참으라 당신이 져라"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잘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존심, 체면이 상하는 것이 제일 분하죠.
●따지고 보면 예수님은 이걸 이기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 이것을 이깁니다.
어려운 요구입니다. 그러나 그리해야 됩니다.
힘내시고 시험과 유혹을 이기시고 망하는 것 같지만 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여러분을 승리케 하는 날까지 믿음 지키시고 인내하시고 큰소리로 찬송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우리의 연약한 것을 들어 쓰셔서 우리가 신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할 수 없는 고집 세고 주장이 강하고 말 안 듣는 영혼들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약속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절망에 부딪힐 때마다 시험 앞에 휘둘릴 때마다 주의 말씀을 기억하게 주옵소서.
주께서 나를 세우셨으니 또한 나를 통하여 저들을 구원하시며 기쁨을 나누게 하시며 승리하시리라 마음 깊이 믿고 오늘 하루도 승리하는 우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일병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