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2020. 03~04 소감

nazunzaro 2020. 5. 22. 03:43
우리가 지금 코로나 독감 앞에 서 있는데 모두가 가지는 불안은,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해야만 하는가 하는 공포다.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 그렇게 선언하는 거다.
그럼 왜 이렇게 곤란한 일 괴로운 일이 생기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만들고 나를 항복시키는데 필요한 과정이라는 거다.
어떤 과정? 나를 놓아 보내시는 과정이다.

《내가 겪는 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고난스런 인생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항복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정으로 삼고 있는 역사요 인생이다.》
2020.03.21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그 구원이 뭔가?
영원하도록 존속되고 우거지고 무성하고 풍성하고 넘치는 가치이다. 영광의 무성함, 그 끝없는 발휘, 이게 구원이다.

우리는 가난하고 고단하고 우리는 불만이다. 이게 우리의 현실인 까닭은?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한 가치에서 영광을 키워나가기 때문에 우리를 기르는 과정에서 고난이 생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가자는 거다. '더 가자'

우리 구원은 어떻게 되어 있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이다.
이게 왜 꼭 이렇게 설명이 되어야 할까?
생명과 성령은 우리에게 율법같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 주는 의지로,
예수로 말미암는 한 인격자의 뜻으로, 고집으로, 주장으로, 운명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이다.
2020.03.22

우리는 우리의 현실, 인생 속에서 여러 위기를 만난다.
그 위기들은 따지고 보면, 위기가 아니다. 한 계단 올라가는 것이요, 더 높은 곳으로, 더 충만한 자리로, 더 놀라운 자리로 인도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시는 이끄심이다.

우리의 불안과 우리의 걱정들은,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아는 안심 속에 숨어들겠다는 그런 어린아이의 비명이다.
하나님이 그걸 놓아두시지 않고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이, 예수를 믿는 자들이 자기의 인생과 현실을 이해하는 방법이요, 모든 위기에서도 넉넉한 마음을 유지하고 헤쳐나가는 인내가 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세상의 도전들, 위협과 불안들은,
결국 우리에게 자극이 되고 새로운 계기가 되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그런 기적이 될 것이다.
2020.03.23

모세의 미디안 광야 40년은 가장 막막한 인생이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징조도 암시도 말씀도 없었다. 버려둔 것같고, 외면당한 것같고,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은 버려진 상태였다. 장님된 세월이었다.

이렇게 막막한 버려진 것같음이, 외면당한 것같음이, 우리 모두에게 반복해서 일어나는 일이다.
하나님은 이 길로만 그의 백성을 인도하신다.

세상의 이 도전들, 이 위협과 불안들은,
우리에게 자극이 되고 새로운 계기가 되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그런 기적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요 섭리자요 심판자이기 때문이다.
2020.03.25

언제나 우리 앞에서 도전하고 위협하는 죽음과 죽음의 헛됨과 거짓말, 그래서 타협과 절망과 원망으로 가득찬 생애를, 이 현실 일상의 일들과 만남, 사건, 여건, 정황을, 그 문제를 해결하자 그러지 말고,
그걸 이제는 찬송과 기도와 믿음과 감격으로 살아내야 나이먹은 값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나이가 되어야 깨닫게 되는 말없는 증언, 움직이는 증언, 살아있는 기적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죽으면 천국 가는 것 말고, 아직도 살아있는 우리 인생 속에서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서 무얼 하시는지 우리가 증언해야 된다.
그것은 권력도 주술도 아니고, 그것은 기도이며 그것은 믿음이며 그것은 찬송이며 순종이며 감사여야 맞다.
2020.03.31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보니 다사다난 했다. 그러나 짧았다.
배운 게 뭔가? 세상에는 답이 없다는 걸 배웠다.
이대로 죽어버리고 마는 인생이라면 자랑할 것도, 낙심할 것도, 뭐 마음을 줄 것도 어디 있는가?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지금 우리의 나이, 우리의 형편에서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해 달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하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해 주십시오'이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죽음으로 위협받는 세상에서, 영생을 사는 예수님의 생애를 따라 사는 것이다. ●곧, 한숨 대신에 찬송을, 놀라움 대신에 기도를,
그리고 ●모두가 원망하는 이 세상에서 모두를 향하여 마음을 여는 이해와 영접과 섬김과 용서로,
하나님의 백성된 신자된 인생을 사는 것이다
2020.03.31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문제가 해결된다는 뜻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승리하시고 그의 은혜가 승리하실 것을 믿기 때문에, 오늘 당하는 나의 시험과 역부족으로 감수해야 되는 어떤 불만과 어떤 걱정들을 견딘다는 뜻이다.
그게 믿음이다
2020.03.31

교회의 정체성은, 예수 믿는 신자들이 개인적 경건과, 개인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어떤 지극한 경지로 가는 명상적 깊은 사고와 사색의 방법론에 가장 중요한 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상호간에 교제와, 여러 경우에 함께 대처하는, 그래서 짐을 나누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교제라는 차원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풍성하게 하시며 또 놀랍게 키우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가정, 직장, 사회 생활에서도 그렇다. 나 개인의 백프로 만족을 채우지 못하고, 타인에 대해 양보하고 타협하기 위해 어떤 아픔 시련의 세월을 보내야 하고,
구성원들이나 자녀들의 유약함과 병약함, 철이 없음 등으로 인하여 걱정하고 짐이 많고 하는 것들이,
말하자면 사랑의 가장 중요한 본질적 요소들을 형성한다.

교회, 직장, 사회의 여러 모임들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앞 서고 뒤 서고, 누구는 이런 특징이 있고 누구는 저런 특징이 있고, 누구는 이런 약점이 있고 누구는 저런 약점이 있고..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시끄럽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번잡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를 기르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 한 가운데를 그렇게 지나가게 하신다. 할렐루야
2020.03.31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왜 우리로 하여금 아직도 만족할 만한 신앙생활이 안되는 현실을 주었는가? 고난과 갈등과 절망의 시간이 왜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갈등을 놔 두고 있다는 거다. 우리를 죄의 법과 은혜의 법의 갈등 속에 놓아 두시는 거다.

우리는 성령의 약속과 임재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 인격과 한 존재를 하나님의 목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가지는 과정 속에서, 도전과 시험 앞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리고 이기고 만다. 그러니 모든 환란과 고난을 겁내지 마라는 거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하신 것처럼 많은 일을 양보해야 된다. 감수하고 걸어야 한다. 선한 일을 해야 된다.
●어려움을 당하면 당연한 길을 걷는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자리, 자신의 몫을 다하여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 기쁨에 동참해야 된다
2020.04.01

모세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고 했던 원망;
'지난 사십년 동안 그렇게 애타게 부르짖어도 아무 대꾸도 안하시고 내버려 두셔서 원망도 기억도 다 잊은 나이 팔십에 이제와서 뭘 하자구요? 그동안 뭐 하셨어요?'
"모세야, 나는 하나님이기를 한번도 중단하지 않은 하나님이란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이 몰라줬다, 안계신다, 외면하셨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라고 그러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는 '하나님 아버지' 라 부르는 권리는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

지금 우리는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 이건 우리의 짐이 되는게 사실이지만, 절망이 될 수가 없고 원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신자의 참된 자신감과 소망이 더욱 분명해지는 오늘 우리의 현실이 되어야 한다
2020.04.02

우리의 결론은 너무 조급하다. 어려움의 신속한 해결이 우선이고 최고의 가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론은 길고 깊고 입체적이다.
못난 자들을 기다리시고 항복의 과정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더더욱 진실하게 열심히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야속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일 못난 자를 구원하기까지
먼저 믿은 자들의 인내와 기다림과 기도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하나님이야 말로 정말 하나님 아닌가..

모세가 미디안 40년을 보낸 것은 그에게 다만 시간만 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못난 이스라엘 백성과 광야 40년을 떠돌 수 있는 실력을 만드는 시간이었다.

사도바울은 필설로 설명할 수 없는 고난과 해를 받는 길을,
기꺼이 예수의 영광을 이해하고 순종하는 길을 간다.
어려운 것을 감수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하는 이 어떤 처절하고 지극함이라는 이런 감성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해내는 믿음의 진지함, 하루를 하루씩 채워나가는 성실함으로 걸어간다

하나님은 세상을 운영하시는 데에, 일하시는 데에,
우리 눈에 마음에 들지 않는 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크고 웅대하고 굉장한 일에 우리를 동역자로 우리를, 우리의 삶을 쓰시는 것이다.
2020.04.03

우리가 지금 코로나 독감 앞에 서 있는데, 모두가 가지는 불안은 이거다.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해야만 하는가?` 하는 공포다.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 그렇게 선언하는 거다.

그럼 왜 이렇게 곤란한 일, 괴로운 일이 생기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만들고 나를 항복시키는데 필요한 과정이란다. 어떤 과정? 놓아 보내시는 과정.

바벨론 포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징벌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깨우침과 더 나아갈 신앙의 어떤 비약이 됐을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겪게 하는 인생이 하나님이 우리를 항복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정으로 삼고있는 역사요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표현이지만, 잘 된 일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모세에게 하신 약속;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하는 적이 없는 하나님이니라'
우리의 신자된 정체성과 운명과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실에 대한 이해가, 우리를 넉넉하고 담대하고 진지하고 집중하게 할 것이다. 아멘!
2020.04.03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는 말씀은 도덕이 아니라 시간에 대해서 말하는 거다.
성령께서는 매일 우리에게 어떻게 살거냐고 도전을 하신다.

☆우리는 매일 주어지는 하루를 다만 편안한 것을 목적으로 하는 안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큰 기회라 여겨야 된다.
그래서 책임있게 이 신자의 인생을 내 현실에 적용해야 된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되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나겠다고 해야 된다.

우리 각자의 인생을, 주어진 하루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제대로 살아내는 책임과 그 승리가 있어야 된다.
2020.04.09

신자된 자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자기 존재, 자기 일상 속에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담아놓은 생애를 사는 거다.

신자된 자는,
나이가 들면 나이 든 그 영광이 있는 거다.
더 익어가며, 더 성숙해져 가며, 더 깊어지는 길을 가는 것이다.
주를 만날 날이 가까워 오고, 하루하루는 더 귀해지며,
더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저 사람들이 나에게서 빛을 봐야 된다,
생명을 봐야 된다, 진리를 봐야 된다' 그런,
말년에만 가질 수 있는 진정성을 누리게 된다.

세상 사람들의 한숨과 후회에 말리지 말고,
그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면 우리들 얼굴에서 빛을 보고,
우리들의 말에서 소망을 보고,
우리들의 품에서 사랑을 보는
그런 귀한 존재라는 책임과 명예를 지켜내는
그런 귀한 말년의 자랑이 넘쳐야 된다
2020.04.09

인간의 진정한 영광이,
세상이 말하는 부귀영화냐?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냐?
여기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실의 어려움 앞에서,
세상은, 더 발악을 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라고, 오늘 하루를 하나님이 일하신다, 내 존재와 함께 하신다, 라고 믿음으로 감수하는 거다.

☆아무래도 좋다,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현실의 어려움을, 고난을, 부족을, 한계를 사는 거다.
그게 믿음이다.
2020.04.14

복음 자체가 그런 형태를 취한다, 그런 모양새를 취한다, 권력으로 폭력으로 이 복음이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으로, 품는 것으로, 용서하는 것으로, 다정한 방법으로 찾아 온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우리가 기대하는 폭력성이나 그런 권세에 있지 않고,
이런 섬김과 낮아지심으로 찾아오는 하나님의 다정하심, 온유하심, 오래 참으심,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비우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를 배우고 자라가는 존재다.

우리의 분노, 우리의 절망은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걸로 하나님이 뭘 하시는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어서, 너무 답답해서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게 우리가 상상치 못했던, 우리의 기대와 비교할 수 없는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지혜고 하나님의 권능이었다.

☆우리의 삶은 후회와 눈물로 얼룩져 있다. 눈물나는 날, 불안한 날, 말이 안되는 날, 그날을, 그날을 감수해야 된다. 하나님이 그걸로 무엇을 만들었는지는 지금 보이지 않는다.
그 믿음이 우리를 승리케 하고 나중에 그 모든 것으로 하나님 앞에 함께 찬송하는 날이 올 것을 믿는다.
2020.04.14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사망이 공포와 위협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활의 영광과 권세는 어느 것에나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법이다.

'하나님 뭐 하시다가 이제 오셨어요? 당신은 누구세요? 여태껏 뭐하셨어요?' 라는 모세의 원망에 대하여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운 답을 하시는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여호와의 일을 중단 한 적이 없는 하나님이란다'

모세는 죽어났고 반발했고 원망했고 체념했고 절망했고 통곡했고, 그런 날들이 그에게 아코디언의 주름같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하심을 과소평가하지 않아야 된다.
우리의 잣대로 원망과 감사가 교차하는 변덕이 죽끓듯 하던 신앙의 자리에서 부터,
견고하고 무한하고 위대하고 그리고 오늘을 책임지는 자리로 와야 된다.
2020.04.16

내가 형통하냐, 내가 어려우냐 하는 것은 사실 큰 문제도 큰 조건도 아니다.
어떤 조건 속에 있을지라도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부르신 그 부름의 핵심되는 내용이고 그의 성육신에서의 모범이다.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
<죽음을 두려워 할 것이냐? 아니면 죽음마저도 일을 한다고 믿을 것이냐?>

나는 무엇을 할것이냐?
예수 안에서 보여진 성육신과 고난과 배신과 수치와 죽음을 넘어선 하나님의 일하심의 위대하심을 기억하여 우리를 변명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자책하는 모든 시험을 넘어설 것이냐?
울 수 있고,한숨 쉴 수 있지만 그것에 얽매여서 스스로 자책하고 소멸되는 헛된 슬픔과 자책 안의 사로잡히는 시험을 벗어 날 것이냐?

사도 바울이 그 비난을, 그 억울함을 슬퍼하거나 그것을 억울해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는 다시 힘을 내어 이 귀한 영광과 복을 우리의 생애 속에 담아내는 하나님의 진정성을 기쁨으로 감수할 것이다

2020.04.17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현실에 있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그 조건 속에서 우리가 가진 책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코로나 전염병이다. 누구나 불안하고 걱정이 된다. 세계경제가 무너지고 있고, 왕래가 끊겼고, 모두가 집안에서 격리된 채 가능한한 사람들 만나는 것이 중단되고 있다. 함께 모여서 예배도 드리지 못하고, 교제도 할 수 없는, 독방에 갇힌 것같이, 어려운 우울증, 어떤 답답함, 마음깊이 찾아드는 어두움 같은 것들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얘기하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환경과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우리의 일차적인 임무가 아니라,
우리의 임무는, '내가 보내진 상황과 조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들, 영생을 가졌고 예수의 사랑과 구원과 권능 속에 있는 자는 그때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이다.

예수를 믿는 자로서, 오늘 내가 사는 지금 이 조건에서, 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주의 사랑 용서 구원의 크기를 지금 이 자리 이 여건에서 어떻게 내 몸에 담아낼 수 있는가?

우리는 도덕 윤리 법 상식 교리 명분 이런 것들을 동원하여 누구를 비난하기 위해서, 누구를 정죄하기 위해서 쓰지는 않는가?
우리는 그런 것들을 다 동원해서 남을 위로해야 된다. 힘이 되게 해야 된다. 살려내야 된다. 용서해야 된다. 기다려줘야 된다. 그게 우리 믿는 사람들의 특권이다.
세상은 할 수 없다. 세상은 상대를 죽여야만 살아남는 적자생존의 논리 속에 있고,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친구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은 그 세상에,
사랑과 기쁨의 명예와 영광의 자리에 서있는 신분인 것이다.

2020.04.18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것은, 나의 인간성이다.

세상이 말하는 힘과 가치는,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나의 인간성을 이루어 가기 위한 소품, 의상, 치장물에 불과하다.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이, 배신과 수치와 고난을 지나는 십자가로 세워지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배신 수치 고난을 참고 감수하는 속에서 이웃을 섬기고 용서하고 온유 겸손 예의 친절로 대응하는게 곧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임을 기억해야 한다.

2020.04.19



우리가 하는 종교심 도덕성 어떤 법을 지키는 것같은 정직, 순결, 봉사, 같은 단어로 대변되는 것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려는 것은 이다. 이다.

내가 돌짝밭이고 가시떨기밭이라도 좋다. 예수가 내 밭에 부활생명을 꽃피웠다.
내 안에 예수께서 영생을 만드신 하나님의 자녀다. 어디로 간다고?

영생이 뭔가?
거기는 를 이을 수 있는 보다 작은 단어들이 있다.
.

이 없는 곳에는 복음이 없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주장하면서 웃지 못한다면 그건 우리가 아직도 기독교가 뭔지도 모르는 것이다.
웃는다는 건 뭐냐? 라는 뜻이다.
'회개했다'라고, '나 거짓말 했다'라고 고백했으면 그 다음엔 정직한 말을 해야 된다.
정직한 말이란 거짓말을 안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성육신을 하듯이,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시궁창에 내려오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심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듯이 되는 거다.
순교, 핍박, 이런 이름으로 치열한 걸로 대신하면 안된다.
실제로 그래야 된다. 되는 거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옆으로 빠지는가. 너무나 교묘하고 너무나 쉽게 미끄러지는 자리에 간다.
기독교가 뭔지, 예수가 뭔지, 우리를 위하여 와서 죽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 영광과 그 기대와 그 힘을 못한다면 이 복음서를 읽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2020.04.20



나는 얼마나 큰 일을 해야 할까?
멀리갈 것까지 없이 이웃 앞에서 이다.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는 바로 내 이웃이다
이웃이란 우리에게 정해준 어떤 구획이다

내가 살고 인사 나누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 믿는 사람은 뭔가 달라야 된다.
그 뭔가는 다만 도덕과 윤리 정도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어떤 영성 어떤 소망 어떤 기적 어떤 다름일 것이다.

그런 것들이 나의 일상과 내가 지금 걱정하고 불안해 하는 모든 일상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결실되는,
귀한 기회, 시간, 남은 생애에서의 내 책임이고 자랑이 되어야 한다.

2020.04.21

하나님은 어려운 형편 속으로 우리를 떠밀어서 훈련시킨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데까지 걸리는 그 모든 시간을 다 허락하신다.

우리는 살면서 또 살면서 늘 고민하고 두려워하고 막막했다.
그 우리의 경험, 상처, 질문을 통하여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나를 알게 되어야 한다.
과거를 돌아보고 자책하고 절망 후회 눈물흘리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것이 일을 해야 된다. 그것으로 내가 변하고 위대해 져 있어야 된다.

우리는 흔히 예수가 왜 죽었는지를 놓치고 있다.
죽어서 천국가는 건 다 붙잡고 있지만 살아서 해야 할 일은 모르고, 누려야 할 위대함과 명예들에서 늘 거리가 먼 것 같다.

우리의 실수들이, 우리의 실패들이 끝일 수 없다.
창조의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영생과 부활의 주인이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는 자로 살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생명으로, 온유와 겸손으로, 남 섬김과 용서로 살아가는 위대한 우리 존재와 인생이 되어야 한다

2020.04.21

감옥에 갇힌 요셉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기서 훈련이 되고 쌓여가듯이
'그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다' 그 말이,
이 한계와 고난의 현실 일상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동일하게 약속된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용서하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이 되어
내가 만나는 가장 몇몇 안되는 소수의 사람들, 내가 만나는 가장 가까운 이웃들 앞에서
빛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충성된 내 존재와 인생 되어야 한다.

2020.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