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사회

『전환 시대의 논리』를 읽고 _ 이희석 2007.05.14

nazunzaro 2019. 12. 29. 18:33



연구원 북리뷰 › 『전환 시대의 논리』를 읽고 이희석 2007.05.14 14:09:2

 

들어가며...

 

대학시절부터, ‘지식인’이라는 키워드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홍세화, 김규항, 진중권, 강준만, 노암 촘스키 등의 책을 한두 권씩 읽었는데, 그 중에 강준만 교수의 글이 나에게 적지 않은 울림을 주었다. 9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강준만 교수는 경향신문에서 조사한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지식인으로 백낙청, 리영희, 최장집에 이어 4위로 꼽혔다. 앞선 세 분의 원로 지식인들에 비해 강준만 교수(1956년생)는 젊다. 또한 90년대부터 활약하기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강 교수는 분명 혜성같이 등장했다. 후마니타스 출판사의 박상훈 주간은 그의 약진을 두고 “강교수가 남긴 사회문화적 영향은 매우 컸다”고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다작의 교양도서 작가로서의 현재 모습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차치하고라도 민주화 이후 기성체제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날카로운 시각과 직설적 논쟁화법으로 비판해 ‘강준만식 글쓰기’ 양식을 만들었다.”

 

실명을 거론한 전방위적 비판이 가득한 그의 책들과 월간지 <인물과 사상> 을 통하여 나는 비판적 지성이 어떤 것인지 눈을 뜨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도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여 실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듯 몽롱한 의식의 수준이지만, 강준만은 언제나 나에게 ‘찬물 한 바가지’와 같은 존재였다. 나의 몽롱한 의식을 깨우는 찬 물 한 바가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글도 나에게 참 깊은 울림을 주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리영희 前 한양대 교수인데, 왜 뜬금없이 홍세화, 강준만 교수를 소개했는가? 리영희 교수가 (진실의 빛을 밝히기 위한 글을 쓰는) 지식인들의 사상적 스승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홍세화는 SBS <한수진의 선데이 클릭>에서 리영희를 한 마디로 표현해 달라는 요청에 대하여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제시해 주신 분.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상적 스승”이라고 말했다.

 

강준만 교수는 ‘리영희’라는 키워드로 한국현대사를 정리한 한 권의 책을 썼다. 강준만은 말한다. “리영희 교수는 순수 그 자체다.” 강준만이 지식인들에게 들이대는 칼날은 날카롭다. 그의 날카로움 앞에서도 아름답고 순수하게 빛나는 지성 리영희는 누구인가?

 

지식인 리영희(李泳禧)

 

사실, 대학 시절에 리영희의 이름을 듣기는 했다.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몰랐지만, ‘통혁당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신영복, 유럽 여행 갔다가 ‘남민전 사건’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20년을 파리에서 이방인 생활을 한 홍세화, 그리고 나에게 최고의 데이터수집가로 보였던 강준만과, 리영희 교수는 같은 폴더에 정리해 둔 지식이었다. 폴더의 이름은 ‘지식인’이다. 나에게 지식인이라는 단어는 사회학적인 의미였다. 경영학 혹은 경제학에서는 지식인을 변화의 흐름 읽고 미래비전 제시하는 자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지식인이란, 김수영 시인이 표현한, “지구와 나라의 문제를 마치 자신의 문제처럼 여기며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 정의가 마음에 들었고, 리영희를 이런 ’지식인’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었다. 2007년, 리영희에 대해 몇 가지를 조사하며 새롭게 깨달은 것은 리영희는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지식인들의 ‘스승’으로 분류해야 할 사람이었다.

 

메트르 드 팡세 VS 의식화의 원흉

 

경기도 산본에 살고 있는 리영희의 고층아파트 현관에는 특이하게도 ‘李泳禧’라고 쓰여진 나무 문패가 달려 있다. 집으로 찾아간 한수진 기자가 아파트에서 나무 문패를 본 것은 처음이라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물었다. 리영희 교수의 답변이다.

“군대에서의 7년, 형무소 3년 동안 있으면서 인간이 번호로 불리는 게 제일 싫었어. 군대에서의 비인간화, 죄수로서의 비인간화... 이게 싫었어. 아파트도 번호로 불리는 집에 살고 싶지 않은 거지.”

 

이 짧은 답변에서 그의 생애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6․25를 최전방에서 보내며 전쟁의 참혹함을 몸으로 체험한 이후에도 리영희의 생애는 말 그대로 시련의 연속이었다. 언론사에서의 두 번의 파직, 대학교에서의 두 번의 해직, 다섯 번의 옥고를 치르며 3년여를 감옥에서 보냈던 그다. 정말이지 순탄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다. 강준만의 말처럼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따라왔던 것이다.

 

모진 시련이 닥치면 변절하기 쉬운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평화와 안정의 시대에서는 진정한 지식인과 변절할 지식인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정의가 권력에 굴복하고, 진실을 발설하면 보복이 가해지는 상황이 되면 앎과 실천의 괴리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런 시절에도 말과 글로써 강직함을 지켜나가는 것이 어렵다. 상황이 닥치기 전에 어려움을 가늠하는 것과 실제의 상황에서 실천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언론인, 문인, 사학자,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 명성을 쌓아 올린 최남선은 1929년 가을부터 변절의 길을 걷는다. 그해 10월에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의 총탁으로 임명되고, 12월에는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된 후에는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일삼았다고 한다. 1929년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민족투쟁인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해였다.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이후 일제의 통제와 탄압이 한층 가중되었고, 그 즈음에 최남선이 변절한 것이다.

 

리영희는 끌까지 변절하지 않은 지식인이다. 그는 언제나 진실로부터 시작해서 진실로 마쳤다. 진실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세월 중에는 숨막힐 듯이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었다고, 회고록인 『대화』에 썼다. 그 구절을 두고 한수진 아나운서가 이렇게 물었다. “타협을 하고 살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안 하셨어요?”

“타협이라... 나는 다른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는 거니까. 나에게는 ‘진실인가, 아닌가?’라는 질문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인간관계에서는 서로 양보하고 부둥켜안고 할 수 있지만, 진실을 추구함에 있어서는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 둘 밖에 없어.”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그의 강직한 성품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김만수는 『리영희:살아있는 신화』라는 성실한 리영희 평전을 썼는데, 그 책의 맺음말에 이렇게 썼다. “리영희는 실천과 공부를 통해 한평생을 변절하지 않고 초지일관하여 광신적인 냉전․반공․극우․독재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웠다.”

 

김만수는 ‘실천과 공부’를 리영희가 사용한 계몽의 수단으로 보았다. 리영희의 ‘실천’하는 모습은 지금까지 살펴 본 그의 강직하고 타협하지 않는 성품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다. 이제는 그가 어떻게 이성을 연마해 왔는지 살펴보자. 리영희는 어떻게 공부해 왔을까?

 

리영희는 많은 공부를 했다. 리영희는 어릴 적부터 공부를 썩 잘 한 것으로 보인다. 리영희는 ‘대관초등학교 개교 이래의 몇 천재 중의 하나’였고, 당시엔 알아주던 명문 ‘경성공립공업학교’에 진학했다. 리영희의 진학은 면의 큰 화젯거리가 되어 축제를 벌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리영희 교수님은 개인 생활에서도 학구적인 것과 기자적인 취재욕이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대화』의 대담자였던 임헌영의 말이다.

 

강준만은 『리영희 한국현대사의 길잡이』에서 짧게 리영희의 대학 시절의 학습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을 썼다. “언어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던 그는 대학 시절에 탄탄한 영어 실력을 쌓은 데다 많은 독서를 통해 인문사회과학도의 자질을 갖추었다.”(p.29) 독서를 통한 지성 훈련은 지성인에게는 필수적인 능력이다.

 

리영희는 왜 그렇게 공부에 열심을 내었을까 그는 안철수 의장과 비슷한 말을 한다. 남들보다 뛰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공부를 더 많이 할 수 밖에 없었단다.

“내가 본래 다른 재주가 없어. 골프, 화투, 바둑, 아무 것도 할 줄을 몰라. 공부가 적고 머리가 남보다 못한데 무지하게 공부하고 시간을 아끼고 분초를 아껴서 하지 않으면 따라가지 못하니까. 불어도 영어만큼은 못하지만 또 중국어도 일어만큼은 못하지만, 자료 읽을 만큼은 했거든. 그러니까 구하는 자료의 폭은 넓어지지." 극비 문서들을 구한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리영희는 미국 CIA의 첩자가 아닌가? 했다는데, 와싱턴포스트의 통신원이었던 까닭에 그런 것을 협조해 주어 (내게는) 소스가 많았어.“

이 말 속에서 강준만이 말한 ’언어에 탁월한 재능‘이라는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

 

그의 곧은 성품과 예리한 지성이 날이 갈수록 더욱 굳건하고 첨예해져서 결국 그는 많은 지식인들에게 사상의 은사가 된다. ‘사상의 은사’라는 말은 분명 리영희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키워드이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을 전두환 정권이 대량 학살했던 이른바 ‘광주사태’로 내가 투옥됐을 때, <르 몽드> 동경 특파원 퐁스 기자가 한국사태 긴급취재를 와서 <르 몽드>의 파리발 첫 보도에 나를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큰 은사)라고 썼어요. 한국 지식인과 대학생의 사상의 은사인 리영희가 잡혀갔다고요.” (『대화』에서)

 

하지만, 일각에서는 ‘사상의 은사’에 정반대되는 평가로 리영희를 ‘의식화의 원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상반되는 평가에 내려진 배경에 대해서는 강준만 교수가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해 두었다.

 

“멀쩡하던 대학생들이 리영희의 책만 읽으면 충격을 받고 이상하게 변해갔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공부에만 몰두하겠다던 ‘청운의 꿈’을 내던지고 진실과 인권과 상식의 가치에 입각해 이 사회와 나라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가족의 안전에 개의치 않고 ‘빅 브라더’가 해선 안된다고 규정한 말과 행동을 악착같이 하려고 들었다. 학생들의 그런 변화를 가리켜 ‘의식화’라고 했다. 젊은 학생들이 그런 자세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 사람들은 리영희를 ‘의식화의 은인’이라 불렀고, 병영체제 수호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리영희를 ‘의식화의 원흉’으로 보았다.” (『리영희 한국현대사의 길잡이』p.6)

 

리영희, 한국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는 우리 나라가 일제 치하에 있던 1929년 태어났다. 그리고 해방의 기쁨을 잠시 맛보고 1948년 해양해 학생으로 승선 실습을 하고 있던 리영희는 여순사건의 참혹한 현장을 보게 된다. 해방 후 나라의 법이 간데없고, 권력을 등에 업은 정치깡패 조직의 행패가 난무하던 시절을 고스란히 겪는다. 리영희에게 1950년대는 전쟁과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로 살아가는 시기다. 전쟁 중에서도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등은 리영희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다 준 사건이었다.

 

전쟁의 참혹함을 뼈저리게 경험한 이들은 전쟁의 비참함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아는 것이다. 리영희는 이것을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작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리영희는 평화주의자이다.)

“나는 6.25 전쟁을 최전방에서 경험했는데,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처참하고 비참한 것인지 모른다. 빌딩이 쓰러지는 것보다도 인간의 처참한 비인간화는 한국전쟁을 겪은 사람들만 안다. 나는 통일을 굉장히 중요하시는 것이지만, 통일조차도 전쟁에 의한 통일은 반대하는 사람이야.” - <한수진의 선데이클릭>에서

 

그 이후의 세월에서도 그는 한국 현대사를 현장에서 몸으로 겪는다. 4․19 혁명의 최전선에서 뛰었으며, 5․16 쿠데타로 인해 당시 많은 사람들처럼 혼란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는 1990년대까지 한국의 현대사와 함께 자신의 삶을 살았다. 강준만은 이러한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리영희라는 창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큰 줄기를 보게 하는 책 『리영희 한국현대사의 길잡이』를 썼다. 머리말에 자신의 작업에 대한 설명을 해 두었다.

 

“그건 리영희만큼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큰 사건들을 그 누구보다 더 직접적으로 광범위하고 치열하게 겪은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의 글은 곧 실천이었기에 그는 누구보다 더 넓은 행동 반경에서 살아왔다. 리영희의 삶이 곧 한국 현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리영희 한국현대사의 길잡이』p.6)

 

리영희라는 창은 맑고 깨끗했다. 창이 깨끗해야 제대로 볼 수 있는 법이다. 강준만 교수는 다음과 같이 리영희라는 창의 효용성을 설명했다.

 

“리영희는 한국 현대사에 최상급의 증언과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왜 ‘최상급’인가? 투명하기 때문이다. ‘아사리판’에 어느 정도 타협했거나 그 판을 멀리서 구경만 했던 사람들은 결코 감지할 수 없거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리영희는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은 역사학 교수가 아니지만 나는 그의 ‘리영희 = 한국현대사의 길잡이’ 라는 의견에 신뢰를 보낸다. 강준만은 성실하다. 그의 자료 수집은 능력도 출중하겠지만, 성실함에 있어서도 대단하다. 또한 강준만은 강직하다. 타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만큼 자신의 행동에도 엄격하게 대한다. 어느 날,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성실하고 강직한 강준만 교수가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총 18권의 『한국현대사 산책』을 펴내면서, 아마도 ‘리영희’라는 이름이 자주 눈에 밟혔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 본다. 그렇게 하여 나온 것이 ‘리영희=한국현대사의 길잡이’ 라는 그의 주장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자의 삶에서 노자의 삶으로

 

리영희는 2000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후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산본 자택에서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오른손이 떨리어 더 이상 글을 편하게 쓸 수가 없다. 그의 최근작 『대화』는 임헌영과의 대담으로 쓰여진 책이다. 그 책을 마지막으로 하여 더 이상 그는 글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책은 더 안 쓰실 거냐는 질문에 “쓸 만큼 썼고, 싫은 소리도 많이 했고, 한 사회에 영향도 많이 줬으니 더 이상 하려고 한다면 그건 욕심이지.”라고 답하는 말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노인의 남모를 감회가 묻어난다. 그 속에는 자신의 지식인적 소임을 다하였다는 자아의식과 또 다른 소임을 향한 어떤 다짐인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 소임은 아마 가정에서의 못 다한 역할에 대한 소박한 꿈일 것 같다는 생각이다.)

 

리영희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뒷산을 산책한다고 한다. 그토록 아끼던 책도 도서관에 기증하고 TV나 신문도 애써 멀리하고 있다. 뇌출혈로 쓰러진 후에 그는 “앞으로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는 애써 알지도,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않으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는데, 그것이 삶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지팡이를 짚고 다시 역사의 현장에 섰던 적이 있다. 강준만 교수는 리영희 교수의 글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텍스트임을 주장한다.

“리영희는 자신의 책들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고 여러 차례 밝혔지만, 나는 정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다. 리영희가 원한 세상이 이루어진다 해도 그의 책들은 계속 읽혀져야 한다. 그런 세상이 누구의 피와 땀 덕분에 오게 됐는지 그것도 알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점점 언론을 통해 세상에 할 말을 하기보다는 내면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할 말을 하며 살아갈 것으로 여겨진다. 경향신문 2004년 1월 26일자 인터뷰에서 요즘의 삶이 어떤지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공자의 삶에서 노자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정치적 의미가 있는 행동이라든가, 그와 관련한 상황 조성이라든가, 그런 걸 군자의 미덕으로 삼았던 논어적 삶을 떠나려 하는 것이죠. 난 이제 환자니까, 내면을 바라보면서 우주의 원리를 찾고, 그 원리 속에 일체화하는 노력을 하면서 살려고 해요. 지난 50년을 외향적으로 살았다면, 이제 내향적으로 살 수 밖에 없어요. 뇌기능도 많이 상실했어요. 나이도 너무 많고요.”

 

그의 글은 우리의 지성을 흔들어 깨워 준 귀한 선물이었지만, 리영희의 피를 들끓게 할 비극적인 사건이 터지지 않는 한, 그는 더 이상 새로운 선물을 줄 것 같지는 않다. 리영희 선생의 글은 오랫동안 남겠지만, 리영희 교수는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날 것이다. 왠지 그날이 나에게도 슬픈 날이 될 것 같다.

 

■ 내가 저자라면..

- 21세기『전환 시대의 논리』를 찾아서

 

영남대 박홍규 교수는 그의 저서 『자유인 루쉰』에서 루쉰의 글을 이렇게 평가한다.

“나는 지난 30여 년간 그의 글을 보며 울고 웃었다. 글은 바로 이래야 한다. 글 속에는 강렬한 주제와 강직한 태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는 그에게서 글을 배워야 한다.”

 

루쉰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것이 강렬한 주제와 강직한 태도라면, 굳이 80년 전에 사망(1936년)한 우리 땅도 아닌 중국 대륙의 어느 지식인을 찾아갈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지금 우리 땅에 살아 있는 신화, 리영희에게서 그 강렬함과 강직함을 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으며 그의 이성적 사유의 탁월함만을 맛보았다. 1970년대에 이 책을 읽었던 지식인들은 리영희의 지성뿐 만 아니라, 그의 용기에도 감탄했을 것이다. 강준만의 말처럼, “언로(言)가 폐쇄되고 사실과 진실의 발설엔 보복이 가해지는 상황에서 글은 곧 실천, 그것도 무서운 실천“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한국사회가 얼마나 암울한지 알지 못하는 1970년대 이후 출생한 젊은이들은 『전환 시대의 논리』를 읽고 김동춘이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고까지 표현한 감정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나 역시 70년대의 끝자락을 잡고 태어났기에 이 책의 지성사적 의미를 상상해가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김세균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책『전환시대의 논리』을 밤새워 읽었고, 그 후에도 읽고 또 읽었다. (중략) 그 책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지닌 상식물에 어떤 것을 보태어 ‘주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책은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다. ‘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상식을 버려라. 네가 진실로서 믿고 있는 많은 것들은 허위의식, 미신들이다. 그 허위의식, 그 미신들을 버려라. 그리고 그러한 허위의식, 그러한 미신들을 네 머릿속에 주입한 이 우상들의 세계의 본질을 꿰뚫는 새로운 눈으로써 이 세계를 다시 바라보라.’ 따라서 그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기쁨에 앞서 괴로움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와... 대단한 지성이다. 리영희 교수님이 얘기한 언론의 두 가지 유형은 내가 계속 생각해 오던 화두를 일갈에 해소하는 명쾌한 지적이었다. 냉전용어의 반지성성을 주장하는 그의 논리 또한 얼마나 탁월한가!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국제적 감각을 가졌으면서도, 거기서 오는 우월감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미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갖춘 보기 드문 지식인 것 같다. 하지만 김동춘, 혹은 김세균이 느꼈던 천지개벽의 감동까지는 아니다.“

 

내가, 보다 정확하게 70년대 후반에 출생한 이들이 감동을 느끼지 못하리라는 것을 리영희 교수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리영희는 김동춘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70~80년 대에 몇 십만 부가 나간 『전환시대의 논리』만 하더라도 지금의 30대 초반은 거의 모르다시피 하고, 또 잊혀지는 게 좋죠. 나는 나의 글과 책으로 ‘의식화’한 후학들과 후배들이 이제는 이 나라의 학문과 사상계에서 막강한 역량으로 자란 것으로 나와 내 책의 시대적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초반의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에게 『전환시대의 논리』와 같은 지성의 빛이 되어줄 책이 있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비화식으로 얘기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발설하기에는 전혀 안전한 상황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용기있게 진실을 밝혀주는 책 말이다.

 

90년대 후반, 나는 강준만의 『한국 지식인의 주류 콤플렉스』를 충격을 받으며 읽었다. 그래서, 강준만의 책을 몇 권 더 샀다. <인물과 사상>도 여러 번 구입했다. 그가 원로학자들과 함께 한국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학자로 꼽혔던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를 공부해 보는 것도 무척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아! 5월의 주제는 ‘역사’인데, 엉뚱하게도 나는 ‘지식인’이라는 키워드를 갖고 이렇게 헤매고 있다. 윌 듀란트의 『역사 속의 영웅들』에서는 길을 잃지 않고 지나간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또 다시 ‘철학’을 잡고 헤매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 내 마음에 들어온 글 귀

 

1. 강요된 권위와 언론자유

 

[6] 언제나 그는 진실로부터 시작해서 진실에서 마쳤다.

 

[18] 역사는 한 단계의 투쟁이 끝나면 으레 ‘임금은 알몸이다’라고 폭로한 소년의 용기에 열중한 나머지, 힘없는 소년에게 그런 엄청난 임무를 떠맡기게 된 그 사회의 실태에 대해서는 눈이 미치질 않는다. 문제시해야 할 중요한 것은 그 영광(또는 해결)까지의 과정에 얼마나 많은 인간적 타락과 사회적 암흑과 지적 후퇴가 강요되었느냐 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겠다.

 

[21] 위기에서 되살아날 수 있는 하나의 사회 내면적 자질에 관해서 프랑스 정치학자 또끄빌은 “문제는 법적 구조보다도 정치의 내면정신에 있다”고 말한다.

 

[24] 『뉴욕 타임스』의 용기는 반사적으로 우리 언론의 두 가지 유형을 연상시킨다. 하나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유형이고, 또 하나는 ‘이제는 비밀을 말할 수 있다’는 유형이다.

전자는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로 발표도 하지 못하고 있던 언론이나 지식인이 문제를 자유롭게 논할 수 있는 객관적 상황의 변동이 생기자, 말하지 않고 있던 비굴은 제쳐놓고 알고 있었다는 것을 내세우는 유형이다. 지식인과 언론의 소임에 이처럼 모독적인 유형은 없다.

 

[25] 우리의 언론과 지식은 한마디로 반공 외의 딴 가치나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그러한 지식과 사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가치가 없다. 어떤 개인의 지식이나 사상은 그 개인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얻은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사회 계발을 위해 반환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고집하지 않아도 좋다. 소크라테스처럼 자기의 지식과 사상을 부인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자세를 누구에게나 요구할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운명을 같이할 수 밖에 없는 한 사회의 대중이 오도된 사고방식이나 정세 판단을 하고 있을 때 그것을 깨우쳐야 하는 것은 언론과 지식인의최고의 책임이자 의무다.

 

[26] 언론과 지식인이 알고 있는 지식과 갖고 있는 사상을 발표해야 하는 때는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이다.

 

[27] 오늘의 사실을 오늘에 규명하지 않고 먼 훗날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비화나 읽을거리의 자료로 생각하는 한, 통치계급의 횡포는 계속되고 대중은 암흑을 더듬는 상태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

 

[30] 지성인의 최고 덕성은 인식과 실천을 결부시킨다는 것이다.

 

[31~32] ‘가장 진실을 잘 알고 있는 국민이 가장 국가를 위할 줄 안다’는 기본원리는 공통으로 통한다. 진실은 비판을 낳는다. 어떤 사회도 어떤 정부도 비판의 여지없이 최선이거나 만능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럴수도록 민주제도는 진실-비판-개선의 끊임없는 과정을 걸어갈 수 있다.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회체제나 정부는 분명 비판에 견딜 수 없는 체제와 정부다. 그러기에 비판을 봉쇄한다.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는 개선과 향상이 없고 그 결과는 더한층의 타락이며, 타락한 제도를 유지하려는 지배세력은 탄압에 호소하는 악순환 속에 침체할 수 밖에 없다.

 

[37] 『뉴욕 타임스』나 『뉴 리퍼블릭』 같은 지성인의 대변지들이 기정사실=현실=타당=필연성이라는 공식화를 꾸준히 거부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국민은 정부의 기만적 선전과 사관의 미숙 때문에, 정부가 꾸며나가는 기정사실화를 그대로 역사로 시인하는 편이었다.

 

[38] 집권세력과 어떤 권력집단, 예컨대 군부 같은 것이 국민을 구렁텅이로 끌고 가는 수법이 이 현실주의다. 오늘의 현실을 수정하지 않으면 내일의 현실이 우리를 구속할 것이라는 지성인들의 사관만이 이런 불행을 예방할 수 있다. 미국의 지성인들은 역사의 ‘현실’을 수락할 뿐 역사에 ‘작용’하려 하지 않았다.

 

[45] 인식은 관념을, 관념은 개념을, 그리고 그 개념을 담은 용어가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로 상대방에게 관념표상의 작용을 일으켜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어떤 사상을 표현․전달하려는 용어가 그 사상의 내용이나 성격의 정확한 반영이 아닐 때에는 전달된 뜻이 더욱 왜곡․변형되거나 혼란이 생기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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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출판된 『전환시대의 논리』는 리영희가 1970년 전후 월간지와 계간지에 기고한 글들을 묶은 책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언급하며 종교의 박해를 피하려고 이 저작에 ‘가설’이라는 말이 붙은 일화를 제시한다. 리영희는 여기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빗대 『전환시대의 논리』에 실린 글이 정치적 신학에 빠진 한국 사회에 코페르니쿠스적인 ‘가설’의 역할을 담당할 것임을 암시한다. 그의 예견대로, 『전환시대의 논리』는 베트남 전쟁과 중국 사회주의를 심도 있게 분석해 우회적으로 한국의 극단적 반공주의에 문제를 제기했으며, 당시 사회과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순식간에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차지했다.

 

천천히 드러나는 베트남 전쟁과 사회주의의 실체

 

◇베트남 전쟁 다시 보기 = 한국은 갖은 논란 끝에 1965년 파병을 시작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파병이 결정됐을 때 언론은 파병부대들의 용맹을 드러내며 대체로 그것이 당연하다는 논조의 기사를 보도했다. 국내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관해 통찰할 여유가 전혀 없었고, 전쟁의 본질과 근본 원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부족했다. 최영묵 교수(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는 “모든 언론에서 베트남 전쟁이 베트콩을 물리치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이라는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었다”고 전했다. 모두가 정의를 위해 참전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리영희는 1964년부터 1967년까지 「조선일보」 외신부에서 근무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 당시 언론의 지배적인 논법과는 다른 자신만의 시각을 형성했고, 이후 기고한 글들을 『전환시대의 논리』에 담았다. 그는 역사적 사실과 베트남 민중의 처지를 근거로 들어 베트남 전쟁을 성스럽고 정의로운 전쟁으로 인식했던 당대의 사회 통념을 반박했다. 베트남 전쟁은 오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베트남 민중이 독립하기 위한 민족해방전쟁일 뿐만 아니라, 그 시작도 미군의 통킹만 사건에 의해 도발됐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미국 국무부 공식 문서를 근거자료로 사용해 반박하기 어려운 논리로 베트남 전쟁의 허와 실을 드러냈다. 당시 국내 언론이나 관제 지식인들은 실증적 분석 대신 반공 논리를 그대로 따르는 데 그쳤다. 이와 대조적으로 리영희는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공작이며 미국이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을 미 국무부 스스로 인정한 것을 증명했다. 백승욱 교수(중앙대 사회학과)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정부의 자료를 근거로 들었으면 누구나 그를 반박했겠지만, 미국이 직접 발표한 문서를 근거로 들으니 모두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했다.

 

◇중국 공산당에 대한 새로운 시각 = 리영희는 중국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제시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남북 간의 무력 충돌이 빈번했기 때문에 반공 이데올로기는 당시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사회주의에 대해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무엇이 문제인지 합리적으로 통찰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못했다. 한국 사회에서 중국은 ‘빨갱이들이 완전히 통제하는 사회주의 국가’ ‘모두가 똑같은 생각으로 똑같이 행동하는 전체주의 괴물’이라는 선전에 뒤덮여 그 실체가 인식될 수 없었다.

 

리영희는 책에서 당시 한국 사회가 사용한 냉전 용어들이 의미를 왜곡해 선입관을 만든다는 점을 지적한다. 미국과의 관계는 ‘혈맹’ ‘영원한 맹방’으로 표현하고,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서는 북괴, 중공(中共), 괴뢰로 표현하는 세태가 정치적으로 편향된 인식과 관념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선입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요청하며, 중국의 민족해방과 상징 혁명으로서의 사회주의를 부각해 마오쩌둥이 가진 정치적 권위와 원천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당시 아무도 알지 못했던, 중국의 공산당이 어떻게 형성됐고 전개됐는지 그 내부를 들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반공주의 입장에 서서 공산주의가 누구나 다 똑같은 생각을 하는 전체주의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리영희는 중국식 사회주의와 마오쩌둥을 둘러싼 거대 사회운동인 문화대혁명의 실체를 드러내 객관적인 사회주의 연구의 진전에 영향을 줬다.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주간은 “중공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당시 중국은 뭔가 무서운 일을 꾸미는 세력으로 사람들한테 공포감을 주곤 했다”며 “『전환시대의 논리』가 중국 정권의 내부 실상을 전해 전혀 다른 관점에서 사회주의를 볼 여지를 줬다”고 평가했다.

 

사고의 전환, 그 거대한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은 당시 젊은이들은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이나 주입된 지식과 180도 다른 측면을 보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책이 독자로 하여금 기존의 논리, 이념, 가치들이 잘못됐을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만들어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해준 것이다. 최영묵 교수는 “인터넷도 없던 시절 베트남 전쟁의 본질과 중국 사회주의를 미국, 중국 현지 정보를 갖고 부각해 굉장히 쇼킹했다”고 책의 영향력을 평했다.

 

당시 한국은 세계정세를 제대로 보도하는 외신이 없었고 국내 언론도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는커녕 스스로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어두운 상황에서 『전환시대의 논리』는 베트남과 중국을 통해 미국의 패권적 시각에 대해 의문을 던지며 세계를 보는 시야를 넓혔다. 천정환 교수(성균관대 국문과)는 “당시 남한이라는 나라는 사실상 단절된 섬이나 다름이 없었다”며 심한 검열에도 불구하고 세계정세에 대한 정보를 전달한 이 책의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물론 『전환시대의 논리』는 사회주의와 문화대혁명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봤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책이 갖는 의미가 크다는 의견이 다수다. 백승욱 교수는 “사회주의에 대한 무조건적 혐오를 넘어서 이성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해야 한다는 시각은 리영희가 처음 시작했다”고 말했다. 또 중국의 사회 구조적 문제, 계급적 차이, 평등의 문제 등 여러 문제에 대한 고민이 섞여 있어서 너무 이상주의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숨겨진 사실을 밝히는 데 있어 일 점 타협도 없었던 리영희는 여러 번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반공주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베트남 전쟁의 모습을 조명한 그는 1968년 「조선일보」에서 끝내 해직되고 만다. 이후 중국에 관한 권위 있는 학자들의 논문을 편역한 『8억인과의 대화』에 이어 독재 정권을 직접 건드린 리영희의 두 번째 평론집인 『우상과 이성』은 금서가 됐다. 이로 인해 그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1977년 11월 구속돼 1980년 1월까지 형을 살고 이후 해직과 복직을 반복한다.

 

백승욱 교수는 이와 같은 탄압을 역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리영희가 겪은 고난은 그의 목소리가 진실을 추구함을 증명해준다는 것이다. 백 교수는 “리영희는 상대의 가장 잘못된 점을 짚어 논리로 반박할 수 없게 만든다”며 “논리로 반박할 수 없으면 힘으로 누르는데 그것을 리영희가 대표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1970~80년대에는 주로 조직사건, 정치운동 때문에 잡혀간 경우가 많았는데 리영희는 오로지 글 때문에 끊임없이 문제가 됐다. 정권은 리영희의 글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고, 그 첫 단추에 『전환시대의 논리』가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국방부의 압수 도서 사진과 문체부의 도서관 추천도서 좌편향 지적은 금서 논쟁을 재점화했다. 독재에서 벗어난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비판적 지식 추구와 사유에 대한 자유를 제한당하고 있는 듯하다.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보여준 올곧은 지성의 정신이 오늘날 다시 요청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백 교수는 “리영희의 글쓰기 방식은 상대의 잘못된 점을 논리적으로 짚어 이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을 잘 보여준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권력의 압제에서도 이성과 진실의 가치를 지키려한 『전환시대의 논리』는 지금 한국 사회보다도 더 앞선 금서가 아닐까.

 

『전환시대의 논리』가 금서로서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 백승욱 교수(중앙대 사회학과)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은 사람들이 사회주의나 베트남 전쟁에 대해 모두 리영희와 같은 의견을 갖게 된 것은 아니지만,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웠다. 『전환시대의 논리』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억압했던 시대에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의심하게 했기 때문에 금서가 될 수밖에 없었다.

 

▲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주간

금서는 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어서 금지된 책이다. 그러므로 유신 정권이 어떤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는 것은 오히려 그 책에 뭔가 엄청난 것이 감춰져 있음을 스스로 폭로하는 셈이다. 『전환시대의 논리』가 금서라는 것은 시대를 고민하는 젊은 대학생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했을 책이라는 것을 거꾸로 가르쳐준다.

 

▲ 최영묵 교수

 

(성공회대 신문방속학과)

 

당시 열띤 시위와 민주화 운동으로 대학생들이 수업을 듣지 않곤 했다. 그럼에도 같이 모여 ‘숨어서’ 공부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책이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전환시대의 논리』가 대학생들의 숨은 교과서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전환시대의 논리』는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책이다.

 

▲ 천정환 교수(성균관대 국문학과)

대부분 사람은 미국이 제공하는 환영과 이미지에 따라 반공주의로만 국제 관계를 바라봤지만, 리영희는 오랜 외신 기자 경험 등을 토대로 세계 전체 정세를 파악하려고 했다. 『전환시대의 논리』는 박정희가 신이 아니라는 것과 베트남 전쟁의 은폐된 진실을 알려준, 1970년대 대학생들이 세상을 보는 눈을 만들어준 책이다.

 

권우용 기자 cardiacsmil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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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마라톤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2011. 10. 26. 8:00

 

이영희평론집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 전환시대의 논리, 이영희, 창작과비평사, 1974년 6월.*

 

이제는 고인이 되신 이영희 선생님의 평론집이다.

19세기 말에서 1970년대까지 우리 나라를 둘러싼 일본, 중국, 베트남, 미국 등과 관련된 국제정세에 대한 논문들과 신문기자로서의 직업과 관련된 수필 몇 편이다.

 

70년대 초에 쓰여진 글들로 당시의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 부족과 나의 미숙함, 그리고 글의 깊이감 때문에 감히 서평을 쓰기가 쉽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책 표지에서 발견한 추천인의 글들이 책을 읽는 내내 느꼈던나의 마음을 너무도 멋진 말로 잘 표현하였기에 여기에 그대로 옮겨 보고자 한다.

 

●'가설의 증언이라는 형식에 담은 이 책의 내용은 기실 증언에 의한 시대의 심판이다. 여기에 우리는 혼탁한 정치의 기류를 고발하는 양식과 지성의 용기를 본다.'

- 서울대 문리대 교수 노재봉(전 국무총리)

 

●'신문기자는 <앵글>을 중요시한다. 보는 각도가 정확해야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글을 쓸 수 있다. 저자는 이 점에 있어 특히 뛰어나게 날카로웠고 그런 점에서 그의 글은 높이 평가되었다.'

- 동아일보 논설위원 송건호(한겨례신문 창간인)

 

●'중국관계, 베트남 전쟁, 일본의 재등장...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이영희 교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좁은 방안에서 문득 시원한 바깥 공기를 숨쉬는 느낌을 맛보곤 했다.'

- 평론가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

  

편견과 선입견이 없는 잘 정제된 글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정곡을 찌른다.

아무리 삶의 동시대라 하더라도 주변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어 내는 그런 통찰력은 정말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왜 이 책이 그토록 많은 지식인 사이에서 회자되었는지 절로 감이 온다.

다루는 주제 하나하나 관계된 모든 주장들을 많은 사료에 입각하여 객관적으로 담아 내고 있다.

편견과 아집에 사로 잡히지 않은 대단한 균형감이다.

글로 쓴 100분 토론이라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다.

당시 정치적 상황 하에서 다루기 쉽지 않았을 주제를 거침없이 토해 내고 있다.

 

지식인의 참 모습이다.

저자가 우리 언론의 문제를 지적하며 분류한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유형의 언론들, 그리고 관리가 되어버린 지식인들에게 거침없이 쏟아 내는 질타와 고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통쾌하다.

 

특히나 저자인 자신도 기자이면서 기자를 강하게 고발하고 있는 '기자풍토 종횡기'는 참 지성인의 참 용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주제 하나 빼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슴 벅찬 글들이었다.

 

중국 근대사와 베트남 전쟁에 대한 균형 잡힌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던 아주 좋은 기회였다.

진심으로 선생님께 감사 드린다.

 

끝으로 '기자풍토 종횡기'의 몇 구절을 아직까지도 침묵하고 굴종하는 이 땅의 언론과 지식인들을 위해 몇 구절을 옮겨 본다.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어찌 이리도 가슴에 와 닿는지...

 

●경제, 재계, 정계의 상층부에서 어울리는 동안 기자는 자기의 물질적 소속이 그 사회의 하층민중임을 망각한다.

 

●모든 것이 '가진 자'의 취미와 입장에서 취재되고 기사화된다. '지배하는 자'의 이해와 취미에서 신문은 꾸며진다.

 

●기사재료를 독점으로 준다는 미끼로 그 '죽음의 키스-무료해외여행, 생활보조 등-'를 받게 되고 이권청탁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 폭력 앞에 무력해지고 만다.

 

●깡패라는 것이 강한 자에 아부하고 약한 자에 군림하는 것이라면, '펜을 휘두르는 깡패'라는 말을 뭣으로 반박할까.

 

●국가권력의 횡포에 대해서도 기자는 어쩌면 파수꾼의 위치에서 망보기꾼으로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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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독재 항거에 ‘지적 대들보’로

한승동 기자

등록 2010-12-07 08:26

 

리영희의 저서

80년대엔 핵·통일로 관심 확대

90년대엔 ‘사회주의 붕괴’ 성찰

 

“나는 그 책을 밤새워 읽었고, 그 후에도 읽고 또 읽었다. 그 책을 먼저 발견한 동료가 내게 권했던 것처럼 나 역시 만나는 동료·후배들마다 그 책을 권했다.

그러나 그 책은 우리가 지닌 상식에 어떤 것을 보태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네 머릿 속에 들어 있는 상식을 버려라. 네가 진실로 믿고 있는 많은 것들은 허위의식, 그러한 미신들을 네 머릿속에 주입한 이 우상들의 세계의 본질을 꿰뚫는 새로운 눈으로써 이 세계를 다시 바라보라.’ …그래서 진실을 안 데 대한 최초의 반응은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일 수밖에 없었다.”(김세균 서울대 교수)

 

‘그 책’을 읽고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고, 같은 대학 조희연 교수는 “이미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냉전적 의식 및 사고의 깊은 중독상태에서 벗어나는 지적 해방의 단비를 맛보았다”고 했다.

 

1974년에 창작과비평사가 펴낸 리영희의 평론집 <전환시대의 논리- 아시아·중국·한국>. 리영희라는 새로운 민주주의 전사, 우상 파괴자의 등장을 알린 그의 첫 단행본은 1970년대 유신 전체주의 억압체제하에서 “‘전논’이라는 은어로 불리면서 학생과 노동자들 사이에 ‘해일과 같은’ 폭발력으로 퍼졌다.”(김삼웅 <리영희 평전>)

 

금서가 된 이 스테디셀러는 이처럼 권력의 감시망을 뚫고 떠돌고 회자되면서 20세기 말 한국사회 격동을 예비했다. 87년체제와 민주정부 탄생이 상징하는 한국 민주화와 변혁운동의 이론적·실천적 주역들 다수가 그 세례를 받았다. 그런 점에서 리영희는 분명히 ‘의식화의 원흉’이요 ‘주범’이었다.

베트남전에 개입하기 위한 미국의 ‘통킹만 사건’ 조작 사실을 폭로한 대니얼 엘스버그와 그 사실을 보도한 <뉴욕타임스>의 보도태도, 냉전의식에 사로잡혀 미국사회를 분열과 해체상태로 몰아가던 반공주의세력을 비판하면서 권력의 언로차단과 비밀주의, 자유 억압이 결국 비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논한 그 책 제1장은 이후 평생 변하지 않은 우상파괴자 리영희의 존재방식에 대한 예시였다.

코페르니쿠스처럼 ‘가설’임을 전제로, 6개의 장으로 구성된 그 책은 중국에 대한 접근을 축으로 한 이른바 ‘닉슨 독트린’에 따른 연쇄반응인 주한미군 감축, 그 자리를 대신할 일본의 군사적 재무장, 그것이 야기할 한반도 정세의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담고 있으며, 아무것도 모른 채 조건반사의 토끼처럼 권력과 외세의 조종에 놀아나던 한국인들에게 토끼장에서 벗어나라고 절규한다. 그가 전한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으며, 그것은 결연하고 처연했던 그 뒤 한국사회의 변혁을 예고했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는 유명한 선언적 머리말이 실린 <우상과 이성>(1977년, 한길사)은 <전환시대의 논리> 출간 이후의 세상변화까지 담은 그 책의 ‘속편’적 성격을 지니면서 그 책과 더불어 리영희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광복 32주년의 반성과 중국이란 나라, 베트남전 총평가, 냉전과 독일통일문제 등을 담아 시야는 더욱 넓어졌다. 이 책 두달 전에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비평사)가 나왔다. 1974년에 한양대가 설립한 ‘중국문제연구소’를 맡은 리영희의 중국연구 성과를 담은 <8억인과의 대화>는 해외 중국 전문가들 저술의 편역이었음에도 출간 약 2달만인 그해 11월1일 중장정보부가 판매금지 조처를 내렸다. 그 책이 판금당한 바로 그날 <우상과 이성>이 출간됐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고 있던 그 상황에서 당국은 그 이념적 배후로 리영희를 지목했고 <전환시대의 논리>와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은 그를 반공법으로 옭아넣는 구실이 됐다.

“1977년 11월23일 아침 7시, 나는 집에서 세 사람의 낯선 손님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다짜고짜로 서재로 올라가 수백 권의 책을 훑어 꾸린 다음 ‘잠깐 조사할 일이 있으니 함께 가자’고 했다.” 그가 끌려간 곳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었고 1980년 초에야 그는 광주교도소에서 출감했다.

 

<80년대의 국제정세와 한반도>(1984년, 동광), <분단을 넘어서>(1984년, 한길사), <역설의 변증- 통일과 전후세대와 나>(1987년, 두레)는 이스라엘-아랍 등 제3세계로 그의 시선을 더욱 넓히는 한편, 문화적 접근단계를 넘어 군사협력체제로 나아가던 한-일 보수정권 유착관계의 진화와 이를 뒤에서 조종한 미국의 세계정책 구상 분석을 중심으로 핵문제와 통일 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킨 그의 ‘80년대’ 저작들이다.

 

이들 80년대 저작 중에서 특별한 책 하나가 그의 탄생부터 5·16쿠데타 직후 그의 30대까지의 삶을 뒤돌아본 <역정>(1988년, 창비)이다.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하게 녹아 있는 이 책의 내용은 이후 말년까지 그가 여러 글과 책에서 회고하고 재인용한 그의 삶의 형적들의 원형을 이룬다. 고향에 대한 애틋한 기억들, 가난했던 서울 유학시절, 문사기질의 그가 경성공립학교 전기과와 국립해양대 항해과에 들어가게 삶의 궤적과 백범 김구를 연모하며 4·19혁명에 뛰어들었던 얘기, 미군 통역장교 등으로 복무한 7년간의 군대생활, 그때 목도한 군과 국가의 부패와 부도덕이 그의 인생지침을 돌려놓게 되는 과정, 언론사 입문 과정 등이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장교 시절 군인들이 불쏘시개로 삼던 신흥사 목판경전들을 구한 얘기, 술 마신 기분에 호기를 부렸다가 도리어 준엄한 꾸중을 듣고 무릎꿇고 사죄해야 했던 어느 진주 기생의 기개와 인간적 무게를 보며 깨친 생각 등 흥미로운 대목들이 많다.

 

<自由人, 자유인>(1990년, 범우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1994년, 두레), <스핑크스의 코>(1998년, 까치), <반세기의 신화- 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1999년, 삼인) 등 그의 ‘90년대 저작’들에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급속히 진행된 현실사회주의체제 붕괴를 지켜봐야 했던 리영희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고뇌가 깊게 배어 있다.

 

하지만 그의 1970년대적 시선과 문제의식은 일관되게 유지되며 종교·문화·언론·통일문제를 아우르는 그의 사유는 더욱 깊고 풍성해진다. 1996년 지중해 일대를 여행한 뒤 쓴 <스핑크스의 코>는 지식·문화·종교·예술·정서 등 모든 면에서 오로지 자기 것만을 내세우며 약자에게 이를 강요한 지배적 문명, 그 폭력숭배와 잔인성, 반지성, 반문화, 몽매와 독단이 이집트 스핑크스의 코를 무참하게 뭉개버린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를 처참하게 망가진 얼굴의 한국사회를 대비시킨다.

 

2005년에 문학평론가 임헌영 교수와 대담형식으로 엮은 회고록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은 리영희의 삶과 사상의 종합편이다. 리영희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역할을 맡은 임 교수의 주도면밀한 진행에 따라 리영희의 삶과 기억들은 깔끔하게 정리되고 풍부하게 종합된다. 원숙과 깊이, 그리고 삶에 대한 달관의 경지까지 느낄 수 있는 <대화>는 <전환시대의 논리>의 문제의식이 세상과의 사투를 벌이며 마침내 당도한 변증법적 종합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은 ‘자유’와 ‘책임’이었다.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이런 신조로서의 삶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 바로 그것이 형벌이었다. 이성이나 지성은 커녕 상식조차 범죄로 규정됐던 대한민국에서랴.”

 

2006년에 한길사가 기존 저서에 담지 못한 글들을 모은 새 책 <21세기 아침의 사색>을 포함한 총 12권의 ‘리영희 저작집’을 냈는데, <8억인과의 대화>, <중국백서>(1982년, 전예원)는 번역·편역·주해서라는 이유로, <인간만사 새옹지마>(1991, 범우사)와 <동굴속의 독백>(1999년, 나남) 등은 기존 저서들에 담긴 내용들과의 중복이나 재수록을 이유로 제외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