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려는 것은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것이다
`너희는 안 믿었고 난 믿었다`로 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쉬워진다. `나쁜 놈들, 회개해라` 이렇게 쉽게 가서,
회개도 믿음도 다 얄팍한 그저 자기 안심과 자기의 선택의 보상을 받는 것에 불과해지고,
복음이 뭔지, 예수가 오셨다는 게 무슨 말인지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터널을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왜 예수를 배척했느냐? 자기 의를 고집하다가 하나님의 의를 볼 수 없었다 그런다.
자기 의란 뭔가? 자기가 생각하는 신앙세계였다. 바리새인들이 이 얘기를 하는거다. 바리새인들이 `우리도 맹인이냐? 우리는 다 본다.`
뭘 갖고 본다고 생각했나?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고 율법이 있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기독교 신앙을 대체한 자기들의 신앙이었다.
본다고 하는 바람에 못 본 게 뭔가?
우리가 하는 종교심 도덕성 어떤 법을 지키는 것같은 정직, 순결, 봉사, 같은 단어로 대변되는 것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려는 것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려는 것은 창조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것이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종교란 일반적으로 자기 안심을 위해서 만들어진 허구이다. 한국에 있는 종교라고 할 것 없이 미신이 뭔가? 돼지대가리 삶아놓고 콧구멍에다 돈 꽂아놓고 절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심리적 안심을 종교심이라는 이름으로 채워서 무모한 일을 감히 할 수 있게 만드는 거다.
'너희는 돌짝밭이다 너희는 가시떨기밭이다 그러나 내가 이 밭에 열매가 되겠다 그리하여 너희 밭을 떨기밭이 아니고, 돌짝밭이 아니고, 생명의 밭이라고 이름하고, 그 존재와 운명을 바꾸겠다'
예수께서 무덤에 들어가사 부활하셔서 시체와 절망 밖에 없는 밭에 열매를 만드는 거다. 그게 부활절이다.
'너희들이 옥토가 된 게 아니다. 내가 열매를 시체를 죽음을 영생으로 내가 바꾼다' 이게 오늘 이 사건이다.
'그러니 내가 없는 부활. 내가 없는 기독교라는 건 없다. 내가 없이 어떤 명분도 어떤 이상도 그건 다 가짜다' 이렇게 되는 게 이 실로암 사건인 거다.
예수가 없으면 그가 가진 무엇도 다 사망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다 헛될 수 밖에 없다 부패하고 그리고 해가 된다.
그러니 예수를 믿지 않으면 어떤 가장 고상한 목적도 이상도 다 헛된 것이다. 다 거짓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세상 사는 사람들의 삶의 가장 중요한 핵심된 그 본질을 보면 세상은 결국 최고의 권력이 공포이다. 죽기 때문이다.
공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많은 부산물들이 있는데, 의심, 조급함, 보복, 이런 것이 다 사망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대책이 없는 것이다.
내가 돌짝밭이고 가시떨기밭이라도 좋다. 예수가 내 밭에 부활생명을 꽃피웠다. 나는 내가 아니고 내가 만드는 절망이 끝이 아니고 그게 운명이 아니고, 우리가 보기에 냄새나고 보잘 것없는 모양을 하고 있을지라도 내 안에 예수께서 영생을 만드신 하나님의 자녀다. 어디로 간다고? <영생으로 부르고 있다.>
영생이 뭔가? 생명이 가치있는 목적, 진리를 향하여 자라나고 무성해지는 것이다.
영광, 명예 거기는 이을 수 있는 보다 작은 단어들이 있다. <겸손, 감사, 용서, 이해, 넘어가는 것>.
●'달라스 윌라드' 사람이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책에서 산상설교를 해설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웃음이 없는 곳에는 복음이 없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주장하면서 웃지 못한다면 그건 너희가 아직도 기독교가 뭔지도 모르는 것이다.
웃는다는 건 뭐냐? '용서하겠다. 넘어가자'라는 뜻이다.
이런 말을(설교를) 할 때는 인자한 얼굴로 해야 되는데 하다 보니까 톤이 높아졌다. 그러나 이것은 고함질러야 할 문제이다.
우리가 스스로 자승자박해서 가장 무섭게 왜곡되는게, 회개이다. 회개가 모든 책임의 면죄권이 된다.
'회개했다'는 '나 거짓말 했다'라고 고백했으면 그 다음엔 정직한 말을 해야 되는데, 정직한 말이란 거짓말을 안하는 게 아니라,
반가워하고 기뻐하고 용서하고..를 해야 된다.
주께서 성육신을 하듯이,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시궁창에 내려오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심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듯이 내려와야 되는 거다.
순교, 핍박, 이런 이름으로 치열한 걸로 대신하면 안된다. 실제로 그래야 된다. 실제로. 만나면 이렇게 표정과 태도가 달라야 되는 거다.
●설교를 하면서 왜 이렇게 악을 써야 되나? 얼마나 쉽게 옆으로 빠지는지, 너무나 교묘하고 너무나 쉽게 미끄러지는 자리에 가서 그런다.
기독교가 뭔지, 예수가 뭔지, 우리를 위하여 와서 죽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 영광과 그 기대와 그 힘을 우리의 생애에 담아내지 못한다면 이 복음서를 읽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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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 (요한복음 9:35 -41)
요한복음 9장 말미에 예수님께서 그가 눈을 뜨게한 맹인을 만난다. 이 맹인이 눈을 뜨는 바람에 굉장히 많은 싸움이 일어난다. 장님이 눈을 뜬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유대인 사회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선지지만 할 수 있는 일인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도 맹인이 눈을 뜨게 한 선지자는 없다. 문둥병을 고치기도 했고 병이 낫기도 했지만 이것은 처음 있었던 일이고, 예수를 반대하는 당시 권력자들은 이 일을 묻어버리기 위해서 예수와 논쟁이 되지 않으니까 이 장님에게 자꾸 그 압박을 가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 맹인의 말은 매우 중요하다.
`그 사람이 널 정말 고쳤느냐?`
`난 다른 건 모르겠고 옛날에 안보이던 게 보입니다` 이거다.
`그 사람은 죄인이다`
`창세로부터 장님의 눈을 뜨게 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틀림없이 이건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 죄인일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권력자들이 이 맹인을 쫓아냈고, 예수님이 찾아와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이렇게 된다.
`그가 누구인지 만나게 해 주십시오`
'내가 네 눈을 뜨게 한 인자다'
`주여 믿나이다` 이렇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뒤에 복음서에 붙어있기를,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바리새인이 `우리도 맹인인가?`
'너희가 맹인이 되었다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 이렇게 결말이 난다.
이 일은 자주 오해되는, 우리가 많이 들었을 법한 설교나 또는 성경 읽으면서 쉽게 결론냈을 듯한, 앞에 어려운 장애물이 있다.
`바리새인들은 안 믿었어. 난 믿었어`이렇게 되면 여기 하려는 얘기가 꽉 막히고 만다.
문도 못 열고 이 사건은, `바리새인들은 그때부터 교만했고 예수를 부정했고, 난 믿었어. 난 은혜를 받았어`그렇게 이분법으로 나가면 아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세상에 왔으나,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렇게 요한복음 1장에 못을 박아놓고 시작하는 중이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지으신 주인이 자기 백성을 찾아왔는데 영접하지 않았다` 이렇게 못을 박고 시작하는 거다.
●☆그런데 여기서 `너희는 안 믿었고 난 믿었다`로 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쉬워진다. `나쁜 놈들, 회개해라` 이렇게 쉽게 가서,
회개도 믿음도 다 얄팍한 그저 자기 안심과 자기의 선택의 보상을 받는 것에 불과해지고,
복음이 뭔지, 예수가 오셨다는 게 무슨 말인지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터널을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놀랍게도 성경에 나왔던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고 자기 백성이 왔으되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리고 금방 뭐라고 나오나?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다.
●☆그 둘의 이 모순과 간극을 예수가 메꾸러 오신 것이다. 못 보는 자들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 예수가 오셨고, 예수가 오셔서 이제 십자가와 부활이 있기까지 그들은 봐도 못 볼 것이다. 못 알아 볼 것이다.
`여기 이것을 십자가로 져야 했고 부활이 필요했다`라고 성경이 말씀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 얘기에 결론을 내버린다. 마치 본인이 믿음과 의지를 가지면 감겼던 눈이 스스로 뜬 것같이 말이다. `나는 믿었어`가 된다. 그러면 복음서는 원래의 의도를, 원래 내용을 우리에게 전달할 수 없다.
그럼 그들은 왜 그랬느냐? 못 보는데 본다는 거다
우리의 성경적 표현에 의하면 사도바울이 로마서 10장에서 얘기한 것같이,
●이스라엘은 왜 예수를 배척했느냐? 자기 의를 고집하다가 하나님의 의를 볼 수 없었다 그런다.
자기 의란 뭔가? 자기가 생각하는 신앙세계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얘기를 하는거다. 바리새인들이 `우리도 맹인이냐? 우리는 다 본다.`
뭘 갖고 본다고 생각했나?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고 율법이 있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기독교 신앙을 대체한 자기들의 신앙이었다.
●본다고 하는 바람에 못 본 게 뭔가? 우리가 하는 종교심 도덕성 어떤 법을 지키는 것같은 정직, 순결, 봉사, 같은 단어로 대변되는 것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려는 것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려는 것은 창조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것이다>
이 둘이 충돌을 한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이 세계가 전부다. 자기자신이 아는 세계가 전부다. 자기 세계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오셔서 계속 뭐라고 하시냐 하면, '아버지가 나를 보냈다'이다. 왜 그 얘기를 해야 돼나?
유대인들이 아버지라고 믿는 아버지와 예수가 증언하는 아버지가, 이름은 같고 개념의 단어들은 같은데, 내용은 다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증언한다' 그거다.
'나는 봤다. 아버지가 뭘 하는지, 뭘 하려 하시는지 난 다 봤고 너희는 못 봤다. 그런데 못 본 주제에 다 봤다고 너희가 우기는 바람에 아버지가 보낸 나를 너희가 거절하고 있다. 나를 거절하는 것은 아버지를 거절하는 것이고, 아버지를 거절하는 것은 나를 거절하는 것이 된다. 너희가 아버지를 앞세우고 그의 이름으로 너희들의 주장과 모든 근거를 내세우지만, 나를 부정하는 것을 보면 너희가 아버지를 모르는 것이요, 너희가 알고 있는 것이 아버지의 뜻과 다르다는 말이다.' 이렇게 된다
●그러니까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종교란 일반적으로 자기 안심을 위해서 만들어진 허구이다.
한국에 있는 종교라고 할 것 없이 미신이 뭔가? 돼지대가리 삶아놓고 콧구멍에다 돈 꽂아놓고 절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심리적 안심을 종교심이라는 이름으로 채워서 무모한 일을 감히 할 수 있게 만드는 거다.
우리 속에 있는 원죄, 하나님을 모르는 것, 하나님과 끊겨있는 것, 그 우리의 마음 깊은 공포와 두려움을 달래기 위한 것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그렇게 여러번 자신을 나타내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진정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 뜻과는 선이 닿아있지 않았다.
그러니 예수님이 오셔서 이렇게 말하는 비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된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씨뿌리는 비유를 한다. 씨 뿌리는 농부가 나가서 씨를 뿌린다. 더러는 길 가에도 떨어지고, 더러는 돌짝밭에도 떨어지고, 더러는 가시떨기에도 떨어지고, 그리고 옥토에도 떨어진다.
너무나 결과는 뻔하다. 길 가에 떨어진 건 새가 줏어 먹었고, 돌짝밭에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가시떨기 밭에는 뿌리를 내렸으나 가시떨기의 기운이 막혀서 결실하지 못했고, 옥토에서는 결실하여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었다.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묻는다. `뭐 이렇게 뻔한 얘기를 비유까지 들어서 하십니까?` 그게 제자들의 반응이었다.
우리 다 아는 얘기다. 그러자 예수님이 뜻 밖에 말씀을 하신다. 이사야 6장에 이사야의 소명을 얘기하신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보내소서`
'가라. 네가 가도 네 말을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리라 내가 이들 백성을 눈과 귀를 닫고 완악하게 하여 저들이 듣고 회개할까봐 겁이 난다' 그런 이상한 소명을 받고 이사야가 선지자가 된다.
''그 예언이 오늘 여기에 이루어졌다 내가 그다 봐도 모르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일로 내가 왔다 그러나 내가 왔다 너희는 나를 봄으로 복되다 너희 선조들이 나를 보려고 그렇게 간절해 했지만 못 봤다 그러나 너희는 본다''
무슨 소리인가? 뭘 봤을까? 우리가 다 아는대로다.
길 가에 떨어지고 돌짝밭에 떨어지고 가시떨기에 떨어진 것이 결실할 수 없는 건 너무나 뻔한 이치다.
옥토에 심으면 결실한다. `옥토가 되자` 그게 오늘 맹인 사건으로 돌아오면;
'봐라. 눈에 힘을 주고 봐라. 내가 왔다. 눈을 뜨고 봐라.' 그렇게 눈을 뜰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예수께서 고치지 않았는가?
●'너희는 돌짝밭이다 너희는 가시떨기밭이다 그러나 내가 이 밭에 열매가 되겠다 그리하여 너희 밭을 떨기밭이 아니고, 돌짝밭이 아니고, 생명의 밭이라고 이름하고, 그 존재와 운명을 바꾸겠다'
●예수께서 무덤에 들어가사 부활하셔서 시체와 절망 밖에 없는 밭에 열매를 만드는 거다. 그게 부활절이다.
'너희들이 옥토가 된 게 아니다. 내가 열매를 시체를 죽음을 영생으로 내가 바꾼다' 이게 오늘 이 사건이다.
'그러니 내가 없는 부활. 내가 없는 기독교라는 건 없다. 내가 없이 어떤 명분도 어떤 이상도 그건 다 가짜다' 이렇게 되는 게 이 실로암 사건인 거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3:18)
<벌써>.. 눈을 뜨지 못하면 소경인 채로 사는 게 심판이다.
눈을 보고 있던 자를 장님으로 만드는 벌을 주는 게 아니라,
●예수가 없으면 그가 가진 무엇도 다 사망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다 헛될 수 밖에 없다 부패하고 그리고 해가 된다.
그러니 예수를 믿지 않으면 어떤 가장 고상한 목적도 이상도 다 헛된 것이다. 다 거짓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세상 사는 사람들의 삶의 가장 중요한 핵심된 그 본질을 보면 세상은 결국 최고의 권력이 공포이다. 죽기 때문이다.
공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많은 부산물들이 있는데, 의심, 조급함, 보복, 이런 것이 다 사망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대책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얻게 되었다 하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결국 이긴다. ●지금 내가 돌짝밭이고 가시떨기밭이라도 좋다. 예수가 내 밭에 부활생명을 꽃피웠다. 나는 내가 아니고 내가 만드는 절망이 끝이 아니고 그게 운명이 아니고, 여러분이 보기에 냄새나고 보잘 것없는 모양을 하고 있을지라도 내 안에 예수께서 영생을 만드신 하나님의 자녀다. 어디로 간다고? 영생으로 부르고 있다.
●☆영생이 뭔가? 생명이 가치있는 목적, 진리를 향하여 자라나고 무성해지는 것이다.
영광, 명예 거기는 이을 수 있는 보다 작은 단어들이 있다. 겸손, 감사, 용서, 이해, 넘어가는 것.
●'달라스 윌라드' 사람이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책에서 산상설교를 해설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웃음이 없는 곳에는 복음이 없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주장하면서 웃지 못한다면 그건 너희가 아직도 기독교가 뭔지도 모르는 것이다.
웃는다는 건 뭐냐? '용서하겠다. 넘어가자'라는 뜻이다.
이런 말을(설교를) 할 때는 인자한 얼굴로 해야 되는데 하다 보니까 톤이 높아졌다. 그러나 이것은 고함질러야 할 문제이다.
우리가 스스로 자승자박해서 가장 무섭게 왜곡되는게, 회개이다. 회개가 모든 책임의 면죄권이 된다.
'회개했다'는 '나 거짓말 했다'라고 고백했으면 그 다음엔 정직한 말을 해야 되는데, 정직한 말이란 거짓말을 안하는 게 아니라,
반가워하고 기뻐하고 용서하고..를 해야 된다.
주께서 성육신을 하듯이,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시궁창에 내려오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심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듯이 내려와야 되는 거다.
순교, 핍박, 이런 이름으로 치열한 걸로 대신하면 안된다. 실제로 그래야 된다. 실제로. 만나면 이렇게 표정과 태도가 달라야 되는 거다.
●설교를 하면서 왜 이렇게 악을 써야 되나? 얼마나 쉽게 옆으로 빠지는지, 너무나 교묘하고 너무나 쉽게 미끄러지는 자리에 가서 그런다.
기독교가 뭔지, 예수가 뭔지, 우리를 위하여 와서 죽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 영광과 그 기대와 그 힘을 우리의 생애에 담아내지 못한다면 이 복음서를 읽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뭘 봤나? 예수가 나를 위하여 죽고 새생명을 만드는 걸 보았다. 그게 우리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생명으로 옮겨지면 뭘 하나?
의롭고 선하고 거룩하고 명예롭고 위대하고 소망을 가지고 기쁘고 감사하고 질 수 있다. 양보할 수 있다. 우리에게서 이것을 뺏아갈 자도 없고 아무리 뺏어가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욥은 제일 이쁜 딸들을 두었지만 어떻게 했다고? 이름은 그저 언년이, 말순이 이렇게 지은 거다.
왜 그렇게 지었다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게 무슨 뜻인지 깊고 풍성하게 알게 됐더라 이거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관한 이 이해를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잘 생각해 보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치시고 예수를 보게하는 것은 지금 요한복음에 9장의 실로암 사건에서가 아니다.
부활하시고 성령이 임하셔야 되는 일이다.
●그가 오셔서 한 일은 당시에 물론 바리새인들은 몰라봤고, 제자들도 몰라 본다.
우리 다 아는 것같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 다 도망가 버렸다. 왜 이걸 그 전에 해 놓는가?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갈릴리 바다를 잠잠케 한 일로 모두를 굴복시키지 않고 또 굴복시킬 이유도 없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시는가?
결국 십자가를 질 사람이 왜 이런 큰 일을 하고 수모를 당하는가?
이 질문은 그대로 지금 현실에 들어온다.
예수를 믿어서 영생을 얻었고, 마지막 날에 천국갈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 왜 지금은 안믿는 자와 우리가 구별이 없느냐? 이 질문과 일치한다.
뭘 하려고 그러시는 걸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서 우리에게 이 말을 하고싶은 거다;
''너를 장님들 세상에 보낸다. 그들은 너를 모른다. 네 말을 들어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네가 가서 그 일을 하는 것이 너에게도 복이고 너를 통해서 그 장님들이 눈을 뜨게하는 복도 함께 하려고 한다'' 이렇게 말씀하는 거다.
●그러니 분노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 일을 우리가 분노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보상받지 못한 탓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모두에게 수모와 배반과 고난을 기꺼이 받으신다. 하나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언제나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셨다` 라고 표현을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하는 어떤 수모, 어떤 어려움들,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은 우리의 인생이 우리에게 영광이라고 얘기한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개념화하고 이해하지 않는다면, 회개하고 헌신하고, 하는 것들로 쉽게 보상으로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실제로는 괜찮지 않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를 죽이려고 드는 것같고, 우리를 버려둔 것같고, 하나님이 어디 도망가신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하신다. 어떻게 아나? 내가 믿고 있잖은가..
그러니 우리의 생애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모르거나 외면하거나 일하지 않는 시간과 경우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납득해야된다.
●부활은 무덤에다가 열매를 맺은 거다. 그렇게 내가 죽어나가는 인생으로 하나님이 부활과 영광을 받으시며, 우리 자신에게 <영광>이라고 선언하신다.
이 신앙의 길을 감사와 기쁨과 명예로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 공포 사이에서 늘 오락가락한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탓이다. 그러나 이만하면 이제 <위대한 길을 향하여 한걸음 나아갈 때>도 되었다.
●한국 교회가 (우리 신앙인이) 쉽게 신앙생활을 피상적으로 만들고 쉽게 보상받으려 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귀한 기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 교회로(신앙인이) 그 일에 한 발 앞서 나가는 열매도 맺어야 한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께서 부활의 열매를 우리 각자에게 주셨다. 그러니 우리는 <사망을 이기는 운명과 현실을 권세 속에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커다란 믿음의 증거가 이 어려운 시기에 교회에(우리에게) 넘쳐야 한다
*다보요 20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