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한 인격과 존재를 하나님의 목적으로 만들기위해 과정속에 도전 시험 모든 환란 갈등을 놔두고 있다

nazunzaro 2020. 4. 1. 23:02

I.

율법은 조문이다. 그러니까 규칙이다. 그런데 그 규칙은 규칙 자체가 인격을 갖고 있지 않고, 규칙 자체가 의지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저 하나의 명분이다.

그걸 쓰는 사람이, 그 선택할 인격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그 율법은 다양하게 잘못 쓰인다.

 

사도바울 얘기가;

`그런 말은 하는 거 아니다. 우리의 마음에서는 선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율법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사랑을 위하여 거룩을 위하여 준 율법을 이스라엘 역사 내내 오용하고 왜곡했다. 부패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새 언약을 주셨다. 어떻게 하기로했느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우리 마음판에다 새기기로 했다.' 

 

●그러니까 율법과 성령이 대비되는 것은 율법은 자체로 의지를 가지지 못하지만, 성령은 당연히 인격이시고 의지를 가진다.

그 은혜와 율법이 대비될 때는 은혜라는 단어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율법에서는 그것이 율법이 하나의 돌에 새긴 조문에 불과해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이제 은혜는, 이제 새 언약은, 이제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 안에 오사, 우리라는 존재 그 안에 인격으로 의지로 우리의 마음에 작용하신다.그게 이 대비를 만들고 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해보면,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왜 우리로 하여금 아직도 만족할 만한 신앙생활이 안되는 현실을 주었는가? 고난과 갈등과 절망의 시간이 왜 있는가?' 라고 묻는다.

■갈등을 놔두고 있다는 거다.

그 갈등에서 죄의 법과 이 은혜의 법의 갈등 속에서 은혜의 법, 생명과 성령의 법이 이긴다.

 

너희가 겪는 갈등은 너희를 천국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가느냐? 를 나누는 갈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성령의 약속, 임재 속에서 그 인격과 한 존재를 하나님의 목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가지는 과정 속에 도전과 시험 앞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리고 이기고 만다. 그러니 모든 환란과 고난을 겁내지 마라.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 새 언약이다

 

율법도 지켜야 하는 것이었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고 싶은 일도 우리가 책임지는 사람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이 책임지는 일은 분별이 있어야 되고, 망설임이 있어야 되고, 지혜가 있어야 되고, 선택에 의한 책임이 있어야 된다.

그런 과정이 없이 그냥 우리 심령에 어떤 코드를 바코드를 찍어놓은 것같이 어떤 매뉴얼을 찍어놓은 것 같이 성령이 오신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성경은(갈라디아서 5장) 언제나 이렇게 얘기한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육체를 따르면 성령을 따르는 게 아니다. 성령을 따르면 육체를 따를 수 없다`라는 선택, 이런 권면, 그리고 우리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심판을 위하여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며, 그 데려가는 과정에 어떤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느냐를 얘기하고 있다.

 

■율법은 왜 그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을 달성 못했나? 율법은 자체에 의지가 없다.

그러나 은혜의 성령은 의지가 있다. 그 성령께서 우리를 흔들고 붙잡고 실패하면 다시 일으키고 하는 일들이 우리 안에 있다.

 

그럼 왜 이런 얘기를 해야 되느냐?

이것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혹 선한 의지와 선한 뜻이 생긴다면 새 마음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II.

비난을 하고 어디를 원망을 해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때울 수 없다.

못난 짓을 한 사람들을 꾸중하는 것이 내가 잘하는 일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교회를 비난 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정당함을 설명하는 방법일 수 없다. 그리고 사회는 더더욱 그렇다.

사회라는 것은, 또 국가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보내어 이 은혜와 구원을 베풀고자 하는 대상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아직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세상 역사를 계속하시고 있는 한 믿지않는 자들에 대하여 성경이 하지않는 정죄와 협박을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교회는(믿는 자들은)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그리하신 것처럼 많은 일을 양보해야 된다. 감수하고 걸어야 한다.

우리는 그때마다 선한 일을 해야 된다. 예수님께서 장님을 만나면 눈을 고쳐주시고 앉은뱅이를 만나면 일으켜 주셨지만, 그가 져야 할 십자가의 길에 그것이 어떤 면제가 되지 않는다.

 

이 점 꼭 기억해야 된다.

우리가 어떤 선행을 하고 어떤 일을 했다고 해서 주께서 부탁한 `너희는 내 제자다 내가 걸어간 길을 따라와야 된다` 라는 것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려움을 당하면 무엇을 잘못했기보다 당연한 길을 걷는다라고 생각해서 각 교회가(우리 각자가) 자신의 자리가 자신의 몫을 다하여 하나님이 아직도 열어놓고 있는 복음과 구원의 열매를 마음껏 확인하고 누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한 사도바울의 기쁨에 동참하는 그런 기쁨과 감격을 누려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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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율법이 하나의 돌에 새긴 조문에 불과해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이제 은혜는, 이제 새 언약은, 이제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 안에 오사 우리라는 존재 그 안에 인격으로 의지로 우리의 마음에 작용하신다.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내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노니`라고 나오고 로마서이 8장 1절이 터지는 이유는, 갈등을 놔두고 있다는 거다.

 

'그 갈등에서 죄의 법과 이 은혜의 법의 갈등 속에서 은혜의 법, 생명과 성령의 법이 이긴다. 너희가 겪는 갈등은 너희를 천국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가느냐를 나누는 갈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성령의 약속, 임재 속에서 그 인격과 한 존재를 하나님의 목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가지는 과정 속에 도전과 시험 앞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리고 이기고 만다. 그러니 모든 환란과 고난을 겁내지 마라`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 새언약이다.

 

율법도 지켜야 하는 것이었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고 싶은 일도 우리가 책임지는 사람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이 책임지는 일은 분별이 있어야 되고 망설임이 있어야 되고, 지혜가 있어야 되고, 선택에 의한 책임이 있어야 된다.

그런 과정이 없이 그냥 우리 심령에 어떤 코드가 바코드를 찍어놓은 것같이 어떤 매뉴얼을 찍어놓은 것 같이 성령이 오신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그 성경은 언제나 이렇게 얘기한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육체를 따르면 성령을 따르는 게 아니다. 성령을 따르면 육체를 따를 수 없다`라는 선택, 이런 권면 그리고 우리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심판을 위하여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며 그 데려가는 과정에 어떤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느냐를 얘기하고 있다

.

율법은 왜 그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을 달성 못했다고? 율법은 자체에 의지가 없다.

그러나 은혜는 성령은 의지가 있다. 그 성령께서 우리를 흔들고 붙잡고 실패하여 다시 일으키고 하는 일들이 우리 안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혹 선한 의지와 선한 뜻이 생긴다면 새마음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II.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분별과 지혜가 되어야 하는게 있다;

●비난을 하고 어디를 원망을 해서 자기가 해야할 일을 때울 수 없다.

못난 짓을 한 사람들을 꾸중하는 것이 내가 잘하는 일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교회를(모임을) 비난 하는 것이 우리 교회(모임)의 정당함을 설명하는 방법일 수 없다.

그리고 사회는 더더욱 그렇다. 사회라는 것은 또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보내어 이 은혜와 구원을 베풀고자 하는 대상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아직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세상 역사를 계속하시고 있는 한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성경이 하지 않는 정죄와 협박을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교회는(신자들은)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그리하신 것처럼 많은 일을 양보해야 된다. 감수하고 걸어야 한다.

우리는 그때마다 선한 일을 해야 된다. 예수님께서 장님을 만나면 눈을 고쳐주시고 앉은뱅이를 만나면 일으켜 주셨지만, 그가 져야 할 십자가의 길에 그것이 어떤 면제가 되지 않는다.

 

이 점 꼭 기억해야 된다. 우리가 어떤 선행을 하고 어떤 일을 했다고 해서 주께서 부탁한 `너희는 내 제자다. 내가 걸어간 길을 따라와야 된다` 라는 것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려움을 당하면 무엇을 잘못했기보다 당연한 길을 걷는다라고 생각해서,

각 교회가(신자가) 자신의 자리, 자신의 몫을 다하여 하나님이 아직도 열어놓고 있는 복음과 구원의 열매를 마음껏 확인하고 누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한 사도바울의 기쁨에 동참하는 그런 기쁨과 감격이 있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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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님이 그리하신 것처럼 많은 일을 양보해야 된다. 감수하고 걸어야 한다. 선한 일을 해야 된다.

어려움을 당하면 당연한 길을 걷는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자리 자신의 몫을 다해야 된다

 

(*일병목회_고후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