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구원이란, 영원하도록 존속되고 우거지고 무성하고 풍성하고 넘치는 가치, 영광의 무성함, 그 끝없는 발휘이다

nazunzaro 2020. 3. 17. 18:17

생명이란 다만 존재가 존속되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망과 대비되고 있다. 자유는 죄와 대비되고 있고, 진리는 거짓과 대비되고 있다.

거짓이란 뭘까? 죄란 무엇일까?

거짓으로 사망으로 우리를 이해시키려고 하는 성경의 촛점은 무엇일까?

 

죄는 목표에 미달하는 것이다. 죄는 목표를 빗나간 것이다. 그리고 죄는 목표를 왜곡하는 것이다.

죄는 거짓된 거다. 영존하지 못한다. 뭐가? 생명이.

 

생명 그러니까 자꾸 혼란이 생기는데, 죄는 그 가치가 영원하지 않다. 그런 차원에서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진리를 안다면, 진리 속에 있다면 너희는 영원한 가치, 영원한 존재가 될 것이다. 죄와 사망의 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은 오늘 우리에게 아주 인류 역사 속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이었다.

●뭐가 진리냐? 그것이 아무리 괜찮아 보여도 사망을 이기지 못한다면, 사망은 헛된 거다, 목표에 미달한 것이다. 그래서 사망이 결과되는 것이다.

 

그러니 철학이 얘기하고 답을 찾아내지 못한, 이 '진리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 때문에 철학하는 사람들 치고 웃는 얼굴이 없다. 답을 못 찾았으니까.

뜻밖에 목사는 아무리 엉터리라도 웃는다. 큰소리 팡팡치고 `내 말만 들으면 갑부되는 거 잠깐이야` 그딴 구라를 푼다. 그 근거가 있다. 그 근거가. '이게 되는 게 아니라 될 수도 있다`라는 나라에 와 있는 거다.

 

이 세상에서 하는 노래하는 그룹들을 만나도 성가대를 따라올 수는 없다. 성가대는 자기가 부르는 것보다 더 큰 어떤 임재, 본문이 있다고 믿는 거다. 세상에서는 그것이 관객들의 호응을 얼마나 받느냐의 문제지만, 성가대에서는 `하나님이 내 찬송을 받으신다`는 것 때문에 언제나 떳떳하고 희열에 차있고, 너무 희열에 차서 인상도 쓰고 그런다. 아주 이게 다르다. 그 지위와 운명과 조건이 너무 다른거다.

 

●`신자된 우리는 영생으로, 영광으로,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기회와 명예를, 세상이 만들지 못하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이렇게 성경이 얘기하는 거다.

 

자유는 선택권인데, 선택권은 선택할 지위와 신분이 있어야 한다. 종이면 선택권이 없다. 종이면 시키는 것을 해야 된다.

●우리는 다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오지만 굴복해서 오지 않는다. 당신이 선택한다. 그의 죽음도 '내 생명을 나에게서 뺏아가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어놓는다. 나는 생명을 내어놓을 수도 있고 다시 가져올 권리도 있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굉장하다.

 

그러니까 우리 신자의 인생에서는 우리는 얼마든지 자랑을 할 수도 있고, 우리는 얼마든지 섬길 수도 있다. 그건 우리에겐 우리의 선택이고 우리의 영광이지, 힘의 균형이 깨어져서 굴복하거나 혹은 정복자로 서는, 그런 식의 이해를 가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그러니까 그 구원이 뭔가? 영원하도록 존속되고 우거지고 무성하고 풍성하고 넘치는 가치이다. 영광의 무성함, 끝없는 발휘, 이게 구원이다.

 

●우린 가난하고 고단하고 우리는 불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한 가치에서 영광을 키워나가기 때문에, 우리를 기르는 과정에서 고난이 생긴다. 더 가자는 거다. 더 가자.

예수 믿고 제일 많이 원하는 게 뭔가? 쉽게 끝내자는 것 아닌가? 쉽게 끝내자는 것. 하나님 이것만 들어주시면 저도 이 만큼은 할테니까 그러고는 더 이상은 만날 일이 없게 하자는 것 아닌가?

 

우리 모두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가 어디로 발전하나? `빨리 죽는 게 복이야`그렇게 갔다. 나이 들어서 비극을 당하면 꼭 이 따위로 얘기한다. `내가 너무 오래 산 게 죄지..` 그렇게 너무나 흔하게 하는 거다.

왜 그런다고? 세상은 이렇게 밖에 할 수 없고, 우리는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억지로 아닌 척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실제로 다르다.

 

●성경이 실컷 이 얘기를 하는 거다; '우린 다르다고. 우리가 가진 자유를 보라고. 그 자유로 영광의 자리에 가라'는 거다.

 

자유란 지금 오늘 본문으로 말하면, 신분상 `아버지와 동등한 자녀들에게만 허락되고 종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거다.

그 구원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지위와 신분이 달라진다.

그리고 우리에게 선택권이 주어지고, 책임이 지게 하신다. 굉장한 특권이다.

 

인간은 하나님 편에 섰던지, 하나님 반대편에 섰든지 두 지위 밖에 없다.

내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지키고 싶어하는데 지킬 수가 없더라는 거다. 왜?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더라는 거다.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 있더라는 거다

내가 나에게 하는 것은 하나님 없는 선, 하나님 없는 어떤 이상들을 행하고 있더라는 거다.

우리가 정의사회를 구현한다 할 때 이 말의 무서움은 `뭐가 정의냐?`하는 것이다.

뭐가 정의냐? 정의의 보편적 근거를 공유할, 공감할, 납득할, 보편적 근거를 이 세상이 만들지 못했다.

●개인주의가 되어서 그런 게 아니라, 각각 개인이 절대가치의 판단자가 됐기 때문이다. 개인주의라는 말로 쉽게 넘기지 말고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가치를 판단하는 근거가 각각에게 주관적으로 허락이 된다.

 

내가 잘하려고 그랬다는 거 아닌가? 역사상 제일 무서운 현실이 뭐냐? 인류학자 조던 피터슨이라는 사람이 쓴 '혼돈의 해독제' <열 두가지 인생의 법칙>이 있다. 그 인류학이라는 것은 옛날 농경사회에는 있을 수 없었던, 죄가 너무 크게 나타나는 이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인간이 뭔가?`라는 문제를 연구하면서부터, 처음에 심리학이 나오고, 정신병리학이 나오고, 사회학이 나오고, 그리고 드디어 인류학까지 왔다. 인간이란 뭔가? 뭔가? 뭔가? 답이 없다.

이 조던 피터슨이라는 사람이 얘기하는 그 책의 핵심은 이거다. 악당은 잘 죽여야 열 명 죽이는데, 진실한 놈은 몇 백만 단위로 죽이더라 이거다. 히틀러가 그랬고 스탈린이 그랬고 폴보트가 그랬습니다. 왜 그러나? 사심이 없는 본인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양보한 판단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는 옳고 저것들은 틀렸다. 틀린 놈들을 제거하면 좋은 사람들만의 이상국이 된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다.

 

이게 지금 서구로부터 동양까지 현대의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서구사회가, 우파가 데리고 있다가 좌파로 넘어갔다가 다시 우파로 왔다가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다`라고 혼란상태에서, 다들 나라가 망하려면 망해라. 난 희생 못한다..

 

진심이라는 것은 보편적 근거가 아니고, 보편적 심정인 거다. 심정인 것이지, 객관적 보편적 절대근거를 만들지 못하는 거다. 율법이 선한 것을 알고 그렇게 살고 싶은데 안되는 거다.

●내가 내가 아닌 거다. 나는 죄에 붙잡혀 있어서, 하나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에, 내가 최선을 만들어도 죄더라는 거다. 거기에 능력까지 많으면 큰일이라는 거다. 많은 만큼 더 죽이기 이다.

 

로마서 7장에 사도바울이 이 말을 하고 있다. `원하는데 왜 원하는 걸 하지 못하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도대체 왜 우리는 법을 따르고 싶어도 안될까? 내가 자유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권이 없다. 나는 죄 아래, 죄의 종이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한다. 비명을 지른다.

 

우리 늘 하는 것 아닌가? `신앙생활 더 잘하고 싶습니다`에서 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못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로 늘 반복하는 것이다.

성경이 얘기한다. `법은 자체로 의지를 가지지 않는다` 무슨 뜻인가? 법을 많이 알면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법은 그냥 조문이요, 규칙이다. 그것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은 어떻게 되어 있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이게 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으로 꼭 이렇게 설명이 되어야 할까?

●인격이 주는 의지로, 생명과 성령은 우리에게 율법같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는 한 인격자의 뜻으로 고집으로 주장으로 운명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다. 그래서 큰소리 칠 수가 있다. 내 잘잘못 내 무능 유능보다 큰 의지에 잡히는 거다

 

그래서 율법과 새로운 복음을 비교할 때 성경은 이 표현을 자주 쓴다. 옛 언약은 돌비에 쓴 것이고, 돌에다 써 놨는데 돌이 뭘 하겠나?, 새 언약은 심비에 한 것이다. 새로운 존재, 새로운 의지에 준 거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 우리가 예수 안에 있게 하심으로 그의 의지가 내 의지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게 자유이다. 신분이다. 우리의 지위라는 거다.

 

우리에게는 잘잘못이 돌비로 갔다, 심비로 왔다 하는 식으로 왔다갔다 하는 게 아니라,

●이 약속과 의지와 동행과 운명으로 함께 하시는 이가 우리가 지금 겪고있는 이 과정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고난이 있는 거다.

 

●왜 그렇게 하실까? 이 고난이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는데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라 그런다

우리는 절망을 당해보지 않고는, 오해를 당해보지 않고는, 아파보지 않고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안된다 이해가 없다.

 

●세상에서 우리가 꼭 하면 안되는 대화법, 특별히 한국 사람에게 꼭 하면 안되는 것; `나 어제 무슨 영화 봤는데 얼마나 슬픈지 눈물을 펑펑 쏟았어`, `난 하나도 안 슬프던데?`

이거 어디서 나온 예법인가? 남이 슬펐다는데..

`그랬어? 그랬구나.. 어디가 제일 슬펐어?` 그렇게, 얘기한 사람이 처지를 풀어내게끔 자리와 시간을 줘야 되는데, `난 아닌데?'

칼 꺼내갖고 싸우자고?

왜 이렇게 됐나? 왜?

한번도 내가 다른 사람에게 위로와 공감을 못 받아서 우리 마음이 딱딱해져서 그런다. 누가 말을 하면 이렇게 튕겨나가는 것 같다. `건들지 마. 잡아먹을 꺼야`

 

●그러니까 이걸 윤리와 도덕같이 신앙을 강요로 해 갖고는 도무지 안나오는 거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해서 녹아내려야 된다. 정말 은혜를 받아야 된다. 하나님이 뭘 하고 계시는지..

 

●지금 우리가 당하는 어떤, 어떤 어려움들이, 우리를 비극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그것이 시험이다. 거기를 지나 와야 된다. 다 해결하고 다 이기지 않는다.

● <별 것 아닌 것 같은, 그리고 마음에 안드는 그것들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라고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로 증명하시지 않았는가. 전혀 이 드라마에서 나올 수 없는 결론이 무덤에서 터져버린다.

그러니 성경이 우리 보고 믿음을 가지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경우가, 우리의 잘잘못을 뛰어넘는, 우리에게 허락된 선택과 지위에 의한 기회라는 걸 기억해서, 잘 하려고 하지 말고 실력만큼 하라. 그래서 크라.

 

그리고 인생이 얼마나 기적인가를, 하나님이 얼마나 많이 나와 함께 대단한 일을 함께 하고 계시는가를 깨우치는, 그래서 여유있는 우리 각각의 인생되어야 한다.

부러워 하거나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게 무엇인지를 깨우치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게 얼마나 굉장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굉장한가.

창조주께 심판주께 부활과 생명의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우리는 살며 존재하고 있다.

겁내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이겨내는 용감한 인생이 되라.

● <우리 인생의 어디나 언제나 기적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말씀을 따른 믿음으로 이겨내는 자녀가 되기로 소원하라.

 

(*다보요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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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당하는 어떤, 어떤 어려움들이,

우리를 비극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그것이,

시험이다.

거기를 지나 와야 된다.

다 해결하고 다 이기지 않는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그리고 마음에 안드는 그것들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된다.

 

우리 인생의 어디나 언제나 기적이다.

 

생명과 성령(=영원한 가치)은,

우리에게 율법같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는 한 인격자의 뜻, 고집, 주장, 운명으로, 그 인격의 의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곧 그의 인격이 주는 의지로, 주장으로

우리는 담대할 수가 있다.

내 잘잘못 내 무능 유능보다 큰 주의 의지에 잡히는 거다.

 

(*다보요17)